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53)화 (388/486)

제153화

“너라뇨? 도련님이 뭔데 우리 아가씨에게 너, 너 거리세요?”

약간 소심해 보였던 하녀는 갑자기 태도를 확 바꾸며 세르주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허. 나를 모르는 건가? 이아론 후작님의 후계자가 될 이 세르주 이아론을?”

그런 그녀의 말에 기가 막히다는 듯 세르주가 우악스레 얼굴을 찌푸린다.

“그럼 아직 후작위도 못 받은 귀족 도련님이라는 거잖아.”

들릴 듯 말 듯 욕설을 작게 중얼거린-분명 들렸겠지만- 하녀는 나를 뒤로 숨기듯 감싸 안으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튼 우리 아가씨께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제가 있는 자리에서 하세요. 저번에도 아가씨에게 손을 대셨다면서요?”

아무래도 주근깨가 자잘히 박힌 이 하녀는 레오노라 팬클럽 본성 지부의 멤버인 모양이었다.

“으음. 나, 세르주랑 둘이 할 말이 있어.”

세르주가 아직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닌지라 약간 뻘쭘해진 나는 그녀의 소매를 조심스레 잡은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날 보호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레아.”

“…제 이름을 아세요?”

내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퍽 감명 깊었는지, 레아의 눈에 눈물이 핑 고인다.

“하, 하지만 각하께서 아가씨 혼자 세르주 도련님을 마주하는 일은 없게 하라고 모두에게 단단히 일러두셨어요.”

‘내 팬클럽 멤버이긴 하지만 가주의 명을 어길 수는 없다는 건가.’

나는 결연한 얼굴의 레아를 올려다보며 손가락을 옴질거렸다.

“…리니, 이제 막 동화책 담당이 바뀔 차례거든. <어린 오리 이야기>는 거의 다 읽었어.”

원래 유모의 역할이지만, 공작성의 하녀들이 제멋대로 순서를 정해 내 동화책 읽어 주기 담당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리니, 레아 목소리 좋아. 다음에 읽고 싶은 동화책이랑 잘 어울릴 것 같아.”

“……!”

내 말에 레아의 동공이 크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녀는 유혹에 넘어갈 수 없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저었다.

“하, 하지만 아가씨를 위험에 노출 시킬 수는 없어요! 동화책 담당, 엄청 하고 싶지만! 이 레아의 평생 소원이었지만~!”

‘그런 걸 평생 소원으로 삼지 마….’

나는 허망한 시선으로 레아의 얼굴을 살피다 세르주를 턱짓했다.

“나 진짜 괜찮아. 얘, 마음만 먹으면 한 주먹 거리도 안 돼.”

“뭐야. 나를 뭘로 보는 거야?!”

“그럼 복도 너머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소리를 지르셔야 해요!”

“응!”

세르주의 항의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무시한 레아가 두 손을 불끈 쥔 채 천천히 복도를 벗어난다.

나는 그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마자 팔짱을 낀 채 세르주를 노려보았다.

“왜? 아까처럼 리니를 무례하게 불렀으면 용건을 말해야지.”

“…왜 우리가 교단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작에게 알리지 않았지?”

자신과 뮤리엘이 교단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공작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으리란 것을 잘 아는 모양인지, 세르주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증거가 없어서인가?”

증거 같은 거야 만들면 된다.

게다가 가스파르는 내 말이라면 증거 없이도 믿어 줄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직 교단의 정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어.’

세르주는 몰라도 뮤리엘은 교단에서 필요로 하는 것 같았으니, 곁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나았다.

‘그분이라는 사람이 직접 저주를 내렸는데도 살아남았을 정도니까 분명 교단에서 맡은 역할이 있는 거겠지.’

나는 나를 의심하는 듯 눈을 가늘인 채 노려보는 세르주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알리지 않으면 고마워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궁금한 건 나야.”

“뭐가 궁금하다는 거지?”

“네들 모자(母子), 당연히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작 성에 돌아왔잖아. 내가 입을 열면 어쩌려고?”

“그, 그건….”

세르주가 내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인다.

‘뮤리엘이 고집한 건가? 아니면 교단의 명령?’

“아무튼, 난 뮤리엘과 너를 발고할 생각은 없어.”

당분간은, 이라는 중요한 단어는 쏙 빼놓고 말하는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곧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든다.

“허! 역시 너도 교단의 위대함을 알아본 거로군. 그래, 아스테르라면 응당 선구자 에티모스 님을 따라야지.”

‘봐, 지금도 내가 캐묻지도 않았는데 술술 교단에 대해서 불고 있잖아.’

역시 세르주를 바로 가스파르에게 이르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만한 세르주의 얼굴을 흘깃했다.

“왜 아스테르가 에티모스를 따라야 하는데?”

“선구자 에티모스 님은 별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니까.”

“흐응. 그래? 하지만 에티모스 님은 지금 없는 것 같던데.”

“곧 부활하실 거다! 셀레네 님과 헬리오스 님이 전력을 다해 ‘그분’의 원래 힘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니까!”

“오호. 그렇구나.”

나는 혼자 들떠 교단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 세르주에게 대강 맞장구를 쳐 주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그분-퀴리오스-가 힘을 되찾고 나면 에티모스라는 선구자가 재림한다는 게 교단의 교리라는 말이네.’

여기까지는 흔한 사이비 종교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분’의 힘이라는 건 어떻게 되찾는 건데?”

“‘아스테르’나 작은 ‘비타’들처럼 타고난 마나가 강력한 아이들을 제물로 바치기만 하면 돼. ‘그분’의 그릇이 전부 채워질 때까지.”

나는 전생의 레오노라가 아이네스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세르주의 말에 눈을 가늘였다.

“그리고 교단에게 인정받고 싶다면 넌 내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야.”

“왜?”

“그야 나는 신탁을 해석하는 위대한 사제 중 한 명-.”

신이 나서 교단에 대해 떠들던 세르주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입을 딱 다물어 버린다.

하지만 이미 나는 소년과의 대화를 통해서 교단을 꽤 파악한 후였다.

‘루엘라드교처럼 신탁을 해석하는 자가 여러 명인 데다 브리넨 후작처럼 어린애들을 제물로 쓰는 종교 집단이라….’

그럼 신탁 내용을 가지고 싸우는 분파가 나뉠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뭐, 오늘은 이 정도만 알아볼까.’

“그렇구나! 교단에 대해 말해 줘서 고마워, 세르주.”

나는 날카로운-그래 봤자 별로 무섭지는 않았지만-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는 세르주를 향해 생긋 웃으며 등을 돌렸다.

“너, 너 지금 날 이용했어?!”

그러자 소년이 내 손목을 거칠게 붙잡아 내 걸음을 막는다.

“지금처럼 콧대 세우는 날도 얼마 안 남았어, 너. 결국 교단을 위해 희생될 제물 주제에 감히 누굴 가지고 노는 거야?!”

나는 이를 부득 갈며 세르주가 내뱉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 그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을 번쩍 들었다.

하나, 둘, 셋.

콰직.

“아악!”

“미안. 콧대 어쩌구 하길래 때려 달라는 건 줄 알았네.”

단단히 뭉친 마나로 주먹을 감쌌으니 아마 웬만한 짱돌로 얻어맞은 것보다 아플 거다.

“이 미친X이 진짜-! 아악!”

무너진 콧대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피를 흘리던 세르주가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내게 달려들었지만,

“공녀.”

아까부터 창가를 어슬렁거리며 나와 세르주를 지켜보던 히스가 조금 더 빨랐다.

“죽이는 건 안 돼, 히스.”

내 말에 세르주를 질질 끌며 복도를 벗어나던 히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후작님께서 지금 내가 당한 수모를 알게 되시는 날에 너네 다 죽을 줄 알아!”

나는 히스에게 끌려가는 세르주의 발악에 어깨를 으쓱하며 등을 돌렸다.

‘쟤는 진짜 바보인가?’

우리 아빠가 공작인데 후작 따위가 무서울 리가.

* * *

세르주를 히스에게 맡긴 후, 하녀가 일러 준 대로 서재에 당도한 나는 루카스를 발견하고 뽀짝뽀짝 걸음을 옮겼다.

“루카스!”

내 부름에 창가 근처에 앉아 책을 뒤적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또 책 보고 있었구나.”

하여간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책 엄청 좋아한다.

“이왕 공부하는 김에 나랑 힐다랑 같이 루에르병에 대해 연구해 볼 생각 있어?”

“…내가 굳이 필요한 일인가?”

나는 내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려는 듯 비스듬히 얼굴을 돌리는 그를 따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입을 열었다.

“루카스의 마나랑 나의 마나는 결이 같잖아. 그런데 루에르병이 마나와 연관이 있대.”

“내 마나와 루에르병이 관계가 있다라, 금시초문이군.”

나는 딱딱한 루카스의 목소리에 조그마한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왜 이렇게 퉁명스러워?’

“게다가 네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지.”

“다 아는 방법이 있거든?”

나는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차가운 루카스의 태도에 서러워져 입술을 삐죽였다.

“몸까지 되찾았으면서 그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더니 계속 이렇게 틱틱대기만 할 거야?”

“…….”

“루카스?”

나는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창가만 바라보는 루카스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루카스, 책 치우고 손 좀 위로 올려 봐.”

“싫다.”

“올려 보라니까!”

나는 루카스의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팔을 덥석 붙잡아 책 위에 올려놓았다.

“…손, 왜 이래?”

그러자 책의 글자가 그대로 비칠 만큼 투명한 손이 눈에 들어온다.

“왜 이렇게 흐릿한 건데?”

꼭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희미한 몸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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