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눈을 뜨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진짜 이세계에 처음 빙의했을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문장을 속으로 떠올린 나는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늠했다.
“왜 깨어나질 않는 것이지.”
언뜻 점잖은 듯싶지만 냉엄한 목소리는 가스파르의 것이었고,
“제어구의 부작용인 듯합니다, 각하.”
그의 앞에서 쩔쩔매며 대답하는 사람은 힐다의 선배 의사였던 아프롤인 듯싶었다.
“그러니까 그 부작용을 치료하라고 명한 것이질 않나.”
“빌어먹을.”
의사를 혼내는 가스파르의 태도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루카스가 크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내 침대맡에 다가선다.
“공작성의 의사들은 전부 돌팔이인 모양이군. 황실 소속 의사를 불러올 테니 이 자들은 전부 죽이는 게 낫겠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뚜렷하게 들려올 정도로 말이 안 되는 루카스의 말에 의사들이 일제히 부복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쿵.
쿠쿵!
“부디 자비를!”
“저는 집에 임신한 아내가…! 아니, 사실 미혼이지만 어쨌든!”
“끌고 가.”
루카스가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렸는지, 군화 소리가 바닥을 퉁퉁 울리며 침실 안이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저희가 아가씨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선황자 전하!”
“그리고 따지고 보면 아가씨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 아닙니까?!”
‘저 의사, 참 눈치 못 챙기네.’
나는 공작가의 일원도 아닌 루카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게 억울한지 목소리를 높이는 의사를 힐끔한 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지막 말을 한 의사부터 죽여라.”
내 예상대로 루카스의 냉정한 목소리가 의사의 머리 위로 창살처럼 떨어진다.
“공자님들…! 저, 공자님들이 어리실 때부터 몸을 보살폈던 주치의 이솝입니다!”
의사의 다급한 외침에 에녹이 뚱한 얼굴로 입을 벌린다.
“하지만 공작가 주치의라는 관직을 단 주제에 공녀 몸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의사가 굳이 공작가에 필요할까, 형?”
“혹시 모른다. 손목을 자르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레오노라를 돌볼지도.”
나는 울기 직전의 이솝을 본체만체하며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형제의 모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런 인성 파탄자 형제들을 길러 냈다니…!’
나이스!
적어도 원작 남주인 트리스탄-은 나를 이제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지만-에게 착해서 당할 일은 없겠구나.
“손목… 목도….”
나는 에녹과 실비 사이에 불쑥 고개를 들이민 자카리의 나긋한 목소리에 침을 꼴깍 삼켰다.
‘왜 손목이 아닌 목을 자르자는 말처럼 들리는 거지…?’
설마 자카리나 루카스나 똑같은 수준이었던 걸까.
“나, 나….”
스르릉.
나는 자카리의 허리춤에서 새까만 검이 튀어나오는 스산한 소리에 놀라 손을 뻗었다.
‘나 일어났다고…!’
하지만 잠긴 목이 내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아 아무도 내가 의식을 차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첫째 공자가 나와 마음이 조금 맞는군.”
의사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오는 자카리가 마음에 드는지 루카스가 씨익 웃는다.
“고, 공자님들! 각하…!”
구명줄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솝이 내가 깨어났다는 걸 눈치채고 다급하게 아빠를 찾았다.
“더는 변명할 필요 없다.”
그러나 자카리를 말리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지켜만 보던 가스파르는 그를 외면해 버렸다.
“…그게 아니라 아가씨가 깨어나신 것 같습니다!”
이솝은 주군으로 모셨던 가스파르의 냉철한 태도에 울컥한 듯싶었지만, 내가 누운 침대를 가리키며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리니!”
“레오노라!”
그러자 우당탕 내 쪽으로 다가온 에녹과 실비가 침대 위로 얼굴을 들이민다.
“저리 가…. 어지러워…. 웩!”
왼쪽에서 금색으로 번쩍, 오른쪽에서 은색으로 번쩍하니 사방이 휘황해서 속이 울렁거렸다.
‘애들 잘생긴 게 이럴 때 문제가 되네….’
“아가씨!”
내가 빛이 나는 형제들의 미모에 속을 게워 내자 에녹이 화들짝 놀라 내 몸을 일으킨다.
“애가 피를 토하잖아!”
“아버지, 역시 이놈들의 목을!”
실비마저 자카리에게 감화되었다는 생각에 나는 그의 팔뚝을 매달리듯 붙든 채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루카스!”
“레오노라.”
내게 다가온 루카스가 내 머리에 커다란 손을 푸욱 내려놓는다.
“마나를 나눠 줘. 마나가 부족해서 몸에 이상 반응이 생기는 것 같아.”
“알았다.”
공명으로 뜻을 전하자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투명한 마나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어째서 내가 아닌 루카스 황자를 먼저 찾는 것이냐.”
루카스의 마나를 흡수하며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가는 나를 아련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가스파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슬픈 얼굴로 입을 연다.
“…너희들을 두고 오랜 시간 곁을 비운 내 탓이겠지.”
“아니, 아빠 그게 아니라-”
“엥?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허둥지둥 가스파르를 위로하려고 말을 꺼냈지만, 내 앞에 쓱 끼어든 에녹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자른다.
“아버지가 언제 리니 곁을 비웠어요? 사시사철, 하루 종일 24시간 내내 애 옆에 눌어붙은 밀가루처럼 달라붙어 있었으면서.”
“사시사철, 하루 종일…?”
나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가스파르의 동공에 침을 꿀꺽 삼켰다.
‘입 닥쳐, 에녹!’
가뜩이나 자신의 부재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있을 아빠에게는 적절하지 못한 정보 전달이었다.
“24시간… 이라.”
침울한 가스파르의 어깨 위에 손을 터억 얹은 루카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빛낸다.
“그래. 나도 소문으로 전해 들었다. 공작과 공녀의 사이가 지난 몇 년간 아주 돈독했다지.”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루카스까지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리니가 깨어난 것을 확인했으니, 나는 이만 헨리에게 가 보겠다.”
나는 우울하다 못해 땅굴을 파는 듯한 가스파르의 뒷모습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감싸 안았다.
‘이러면 내가 또 아빠 달래 주러 가야 하잖아!’
가뜩이나 몸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놈들아!
* * *
하녀들의 도움으로 피 묻은 옷을 갈아입은 나는 사람들을 전부 내보낸 다음 원작 책을 펼쳐 들었다.
예상대로, ‘레오노라’의 외전이 업데이트된 것이 눈에 띈다.
‘…여기서 분명 빛이 새어 나왔어. 새로운 원작의 인물과 마주치지도 않았는데.’
교단은 나, 그러니까 레오노라를 ‘아스테르’라는 존재라고 말했다.
‘셀레네라는 남자가 아스테르는 이세계의 별이라는 뜻이라고 했지?’
그럼 아이네스가 회귀할 때마다 마주쳤던 모든 레오노라가 나처럼 빙의자였다는 걸까?
착잡한 한숨을 내쉰 나는 <심연의 별>이라는 부제가 붙은 외전의 책장을 넘겼다.
◈
아스테르로서의 각성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다.
‘루엘라병의 원인이 내 마나였다니….’
레오노라는 입안에서 울컥 솟구쳐 오르는 피를 틀어막으면서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반쪽짜리 아스테르.’
교단에 납치된 레오노라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빙의자가 아닌 아스테르는 빈껍데기에 불과했으니까.
타닥, 탁.
제단 위에서 발랄하게 걸어 내려온 아이네스가 레오노라의 이마를 꾸욱 밀어내며 날카롭게 입을 연다.
“네가 반쪽짜리라서 내 계획이 전부 틀어졌어, 아둔한 레오노라.”
레오노라는 아이네스를 자신의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줬고, 애정을 나눴으며, 그녀를 위해 희생을 각오했었다.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레오노라의 물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아이네스가 어깨를 으쓱한다.
“뭐, 마나를 나눠 준 건 고마워. 덕분에 내 병도 전부 치료했고, 헬리오스의 힘도 각성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쓸모를 다했으니 이만 죽도록 해.”
살벌한 말과 어울리지 않는 아이네스의 상냥한 목소리에 레오노라는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네 계획, 아니, 너희들 계획은 앞으로 점점 더 틀어질 거야. 너희 교단은 망했어.”
“…뭐라는 거야, 이 미친년이.”
아이네스는 레오노라의 말에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며 얼굴을 굳혔다.
상냥한 미소가 거둬진 소녀의 얼굴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악귀처럼 음산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 감히 우리 알레테이아를 모욕하는 거야?”
“아이네스, 내가 왜 반쪽짜리 아스테르인지 알아?”
“네가 이번 생이 처음인, 첫 번째 영혼이니까. 빙의자의 조건을 채우지 못한 별이라서 반쪽짜리라는 셀레네의 말, 너도 들었잖아.”
아이네스의 말에 레오노라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리석은 아이네스. 너희들이 ‘그분’이라고 부르는 퀴리오스든 선구자 에티모스든, 사실-”
◈
사실 뭐!
사실 뭔데?!
나는 뚝 끊긴 문장을 내려다보다 천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