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건물 자체가 아티팩트로 이루어진 황궁만큼은 아니었지만, 공작 성은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흔적도 없이 레오노라가 사라지자 공작가는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버지, 리니를 당장 찾으러 가요. 저도 제 수하의 적랑(赤狼) 기사들을 불러 모아 볼게요. 대대까지는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정신을 차린 자르파라에게서 가장 먼저 레오노라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에녹이 굳은 얼굴로 가스파르를 올려다본다.
“저는 백랑(白狼)의 추적 군단을 움직이겠습니다.”
아직 단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실베스테르가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은 대대(Battallion)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징계를 각오하면서까지 백랑의 기사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
에녹과 실비의 말에도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가스파르가 고개를 까딱인다.
“최소한의 경비만을 남기고 영지군 전원을 움직여 레오노라를 찾는다, 헨리.”
영지군 전원.
그건 4개 이상의 집단군으로 이뤄진 하차니아 수하의 기사와 병사들 삼분지 일을 움직이겠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나라에 전쟁이 터지지 않고서야 그만한 인원이 움직인 역사가 없었지만, 헨리는 주군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예, 각하. 지금 당장 영지군 전원에게 명을 하달하겠습니다.”
바짝 굳은 얼굴의 헨리가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에녹이 소파 끄트머리에 틀어박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카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형님은요.”
“…….”
“형님은 흑랑(黑狼)의 단장이잖아요. 적어도 사단은 움직일 수 있는 거잖아.”
자카리가 정체 모를 괴한에게 납치당한 레오노라를 같이 찾아 줄 거라는 믿음이 가득한 에녹의 말에 자카리는 반쯤 뜨인 눈을 움직여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가스파르를 똑 닮은 자카리의 잘생긴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왜 그래야 하지….”
힘없는 자카리의 목소리에 에녹은 기가 막히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야 당연히 레오노라가 형님 동생이니까요…!”
백랑도 적랑도 영지군도 분명 훌륭한 군사로 이루어진 집단이었지만, 그림자를 움직일 수 있는 쉐도우나이츠로 이루어진 흑랑처럼 추적에 능한 자들이 없었다.
“레오노라가 형님 생각을 얼마나 했는데!”
질투가 날 정도로 큰 형님을 챙기려고 들던 레오노라를 떠올린 에녹이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내리치며 눈을 부라렸지만, 자카리는 비스듬히 숙인 고개를 소파에 묻을 뿐 별다른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됐다, 에녹. 더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다.”
울분에 차 발을 구르는 에녹의 어깨에 손을 얹은 실비가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우리를 가족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인간 때문에 괜한 감정을 소모하지 마라.”
차분하지만, 한겨울 서릿발처럼 차가운 말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소파에 기대 누운 자카리를 흘깃한 실비는 에녹과 가스파르와 함께 다급하게 집무실을 나섰다.
쾅!
“…….”
거칠게 닫히는 문소리에 몸을 일으킨 자카리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느릿느릿 주먹을 쥐었다.
“저는 자카리 오라버니랑 친해지고 싶어요.”
고양이처럼 뾰족하게 올라간 눈매였지만 묘할 정도로 따뜻했던 자안이 아른거린다.
“가족이라….”
가스파르는 노엘을 지켜주지 않았다. 어린 자신을 전장에 밀어 넣듯 버렸다.
그러니 자신이 레오노라를 버리는 건 당연한 인과이지 않나.
“자카리 오라버니랑 저는 가족이니까요.”
순간적으로 레오노라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선연하게 떠올랐지만, 자카리는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도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할까.’
아버지가 자신을 버린 것처럼, 자신도 레오노라를 버릴 텐데.
“단장, 어디 가시는 겁니까?”
자카리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흑랑(黑狼)의 부단장 우르시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히스의 힘은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했다.
나는 돔을 뒤흔드는 강력한 마력의 향연에 상황도 잊고 입을 벌렸다.
아크레아 왕국의 마지막 병기, 대륙을 재패할 소년왕.
그런 별칭을 달고 다닌 사람이니 대단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 안 했는데.’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루카스보다도 위력적인 인(印)이 천장을 메울 것처럼 빼곡히 채워진다. 히스가 발동한 인(印)들은 제국에서는 완전히 사장된 위대한 고대의 마법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
“…히스, 무리하지 마. 도망만 가면 돼.”
나는 점점 숨이 차는 듯 입술을 꾹 깨문 히스의 손을 붙잡은 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감히 공녀의 몸에 손을 댄 자들입니다.”
“하지만 전부 죽여 버리면 교단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낼 수 없게 될 거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히스가 높게 치켜들었던 손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셀레네 님이 오셨다!”
히스가 불러일으킨 마력으로 이뤄진 천 개의 칼날에 궁지에 몰렸던 병사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셀레네 님! 부디 악랄한 힘에 물든 아스테르를 구원하소서!”
‘셀레네?’
교단원의 외침에 뒤를 돌아본 나는 거대한 은색 바람을 일으키며 조각난 천장에서 마치 천사가 강림하듯 모습을 드러낸 남자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도대체 무슨 힘이지?’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은색 줄기가 히스를 감싸기 시작한다. 성력도, 마력도 아닌 거대한 에테르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히스를 옭아맨다.
‘내 마나랑 비슷한 성질인 것 같은데.’
나는 은색 거미줄로 온몸이 칭칭 감긴 히스를 힐끔하며 공명을 시도했다.
“도망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히스?”
“공녀를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절대.”
공명으로도 느껴지는 단호함에 나는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노려보며 왼손에 마나를 응집했다.
“도망가라는 게 아니야. 빨리 가서 공작가에 내 위치를 알려 줘.”
나를 어떻게 찾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급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왔을 게 뻔하다.
여전히 무감해 보였지만 죽어도 싫다는 듯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히스의 얼굴을 마주한 채 나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내 말 들어, 히스. 내가 교단에게 필요한 존재라고 했어. 당장 해를 가하진 못할 거야.”
나는 내 전언에도 꿈쩍하지 않는 히스를 응집한 마나를 이용해 돔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 틈을 노린 병사가 내 팔뚝을 붙잡은 채 셀레네라고 불리우는 남자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셀레네 님! 제가 아스테르를 붙잡았습니다!”
“끌고 와. 금제구 채우는 것을 잊지 말고.”
셀레네의 명령에 내 손목에 수갑처럼 생긴 검은색 마도구가 채워진다. 나는 내 마나를 억제하는 듯한 금제구를 움켜잡은 채 내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리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어리구나.”
내 얼굴을 빠르게 살핀 남자가 제 긴 은발을 쓸어내리며 짧게 혀를 찬다.
“하지만 영혼은 순수하지 않겠지. 너는 빙의자 아스테르일 테니.”
‘빙의자라는 개념이 이 세계에 존재했었다고?’
나는 남자의 말에 흠칫 몸을 떨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게다가 내가 빙의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전생에 대해 고백한 사람은 에녹과 실비, 단 둘뿐이었는데.
“놀란 얼굴이군. 아스테르라는 말 자체가 이세계의 별, 즉 빙의자를 뜻하는 거다.”
남자의 말을 듣는 척하며 틈을 노리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나는 그의 그림자가 등불 앞에 놓인 듯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어. 설마….’
“빙의자, 회귀자, 환생자까지. 모두 그분을 위한 소중한 제물이 될 재료들이지. 영광으로 알 거라.”
셀레네라는 남자가 내 목을 움켜잡은 순간이었다.
“그 손 놔.”
“아악!”
남자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길쭉한 손이 그의 팔목을 비튼다.
“자카리 오라버니!”
나는 남자의 그림자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자카리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어쩌자고 혼자 온 거야?’
“눈물겹군. 가족과 함께 죽으려고 온 건가?”
제 팔목을 붙든 자카리를 돌아본 셀레네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내 목을 놓는다.
“그렇지. 흑랑(黑狼)이 괜히 검은 개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지.”
남자가 조르던 목을 컥컥거리며 매만진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굳은 얼굴의 자카리를 돌아보았다.
‘왜 자카리가 온 거야? 어차피 서브남주잖아.’
게다가 히스가 내 위치를 공작가에 전했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으니 자카리가 흑랑을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가족에게 미련도 없고, 여자주인공만 있으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서브남주였잖아.’
울컥해 입술을 꾹 깨문 나를 바라본 자카리가, 나무늘보 같기만 했던 게으른 자카리가 명료한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입을 연다.
“도망쳐.”
“싫어요.”
“내가 발을 묶어 둘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
“오라버니 두고는 절대 안 가.”
나는 자카리의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아빠가 우리를 구하러 올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어째서 아버지를 믿는 거지.”
“가족이니까.”
나는 가스파르를 믿었다. 에녹도, 실비도, 나와 자카리를 찾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나도, 아빠도, 오라버니를 절대 버리지 않아요.”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히죽 입꼬리를 들어 올린 셀레네가 오른팔을 움직인다.
“그럼 다 같이 그분의 양분이 되면 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