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42)화 (377/486)

제142화

“너무 늦어서 미안하구나, 리니.”

나지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꾹 누른다.

“아빠…!”

나는 그런 그의 팔에 매달리듯 안겨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마치 어린아이로 되돌아간 듯 쉼 없이 서러운 눈물이 흐른다.

“뚝.”

가스파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우는 나를 안아 든 채 내 작은 등을 느릿느릿 두드렸다.

“착하지.”

“히끅!”

시야가 뿌옇다.

그러나 그 흐릿한 시야로도 내가 아이일 수 있게 해 주는 다감한 얼굴만은 또렷이 보였다.

‘가스파르가 돌아왔어.’

나는 가스파르의 목을 감싸 안은 채 엉엉 우느라 진을 잔뜩 뺀 고개를 묻었다.

“당장 내 아들에게서 손 떼십시오, 앙리 경.”

그런 나를 보호하듯 꽉 끌어안은 가스파르가 자유로운 오른손을 움직여 그림자를 퍼뜨린다.

마도사들이 형성한 빛무리는 그를 방해할 힘이 손톱만큼도 없다는 듯, 가스파르의 그림자는 세상 모든 어둠을 흡수한 것처럼 짙은 색을 띄었다.

“가, 각하께서는 지금 역모죄를 조사받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황실 근위대장의 이름을 제 부하를 부르듯 친근하게 부르면서도 정중함을 잃지 않는 가스파르를 마주한 앙리가 인상을 찌푸린다.

“내 아들의 혐의가 벗겨졌는데 감히 공작인 나를 누가 구금할 수 있겠습니까.”

가스파르의 단호한 어조에 반박할 말을 잃었는지 근위대장이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문다.

“…하지만 폐하께서-”

“손 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그의 말을 끊으며 팔을 든 가스파르의 손 위로 새까만 오러로 이루어진 검이 형성된다.

‘이게 각성한 쉐도우나이츠의 힘이구나.’

자카리의 위세도 어마무시했지만, 그와는 비견할 수도 없을 만큼 가스파르의 오러는 압도적이었다.

“내 인내심을 더는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으읏!”

마도사 무리와 근위대 병사 몇 명으로는 가스파르를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근위대장이 새하얗게 질려 반보 물러난다.

“이 얼굴 보고싶은 걸 참느라 죄 써 버렸으니.”

근위대와 마도사가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가스파르는 제 품에 안긴 나를 턱으로 가리키며 쾅! 오러를 땅에 내려찍었다.

“…이제 돌아가자.”

나는 가스파르의 말에 눈물이 잔뜩 고인 눈가를 쓱쓱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집으로요?”

“그래, 집으로.”

벌게진 내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린 그가 차분하게 대답하며 걸음을 옮긴다.

* * *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로제의 발랄한 말에 테이블 위로 시선을 돌린 나는

뚜둔! 딴!

<구국의 어린 영웅, 레오노라 하차니아! 세상을 구원하다!>

신문 1면에 아주 진하게 박힌 헤드라인에 살짝 머금었던 홍차를 흘리고 말았다.

“…이거 뭐야. 일간특급이야?”

자극적인 제목이 발렌타인사의 가십지처럼만 보여 눈을 가늘게 만들자, 내가 차를 흘린 테이블을 닦던 로제가 고개를 내젓는다.

“아뇨, 베리타스사의 신문이에요! 특종이 있을 때만 발행하는데 아가씨가 대서특필되었길래 가져왔어요.”

‘아니, 왜 나만 이렇게 크게 실린 거야…?’

따지고 보면 고로나를 저지한 건 내가 아니라 자카리였잖아!

“이번 사건이 좀 컸어야죠.”

나는 내 손바닥보다도 커다랗게 실린 내 모습-그리즐리를 타고 있는-에 자괴감을 느끼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베리타스사의 집요한 취재 덕에 그레고르와 아돌프를 저지할 수 있었던 건 다행이지만, 이렇게 영웅 취급 받고 싶지는 않았다고.’

목적이 무엇이었든 결국 고로나 무리를 황도에 몰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죄책감 비스무리한 감정에 따끔따끔 찔려오는 가슴께를 꾹 누른 나는 소거실에 들어서는 가스파르를 발견하고 후다닥 신문을 낚아챘다.

“뭘 숨기는 거냐.”

“…그냥 보지 마세요. 창피해.”

“아, 베리타스사의 신문이라면 아주 멋있게 잘 나왔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젠장! 벌써 봤구나!’

나는 가스파르의 대답에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내가 계속 그의 시선을 피하는데도 뚜렷한 시선이 정수리 위로 내려앉는다.

“왜 그렇게 보세요?”

결국 그의 집요한 눈길에 지고 만 내가 고개를 들자 가스파르가 다감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우리 리니가 어여쁘고, 귀엽고, 또 사랑스러워서.”

나는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가스파르의 손길에 배부른 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며 눈을 감았다.

“…언제 이렇게 컸지. 찰나의 순간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으엑.”

가스파르의 품에 쏙 안긴 채 아주 오랜만에 살가운 부녀의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데 에녹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소거실에 들어선다.

“아침부터 낯간지럽게 뭐하는 거예요, 아버지.”

“에녹.”

가스파르는 에녹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고 셋째의 얼굴을 확인했다.

“…네? 왜 그렇게 애틋하게 부르고 그러세요.”

까칠하고 냉정한 루카스에게 익숙해진 에녹이 그의 부름에 떨떠름히 대답한다.

“보고 싶었다.”

“…저번 주에 봤어요.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요, 아버지.”

에녹이 이상하다는 듯 의구심 가득한 눈을 하기에 나는 재빨리 나서서 에녹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실비를 가리켰다.

“실비도 왔네요, 아빠!”

“몸 상한 곳은 없는 건가?”

가스파르에게 고개를 대충 꾸벅 숙인 실비는 그가 자신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해야겠다.”

“…실비, 일단 아빠부터 좀 봐 봐.”

내 말에 그제야 슬그머니 고개를 든 실비가 제게 팔을 뻗고 있는 가스파르를 발견하고 단정한 미간을 좁힌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뭐, 뭐예요?”

당황한 실비와 에녹을 한꺼번에 껴안은 가스파르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둘째와 셋째의 머리를 아이처럼 쓱쓱 쓰다듬었다.

“둘 다 아주 많이 컸구나. 자랑스럽다.”

“…뭐야, 리니. 황성벽 무너지면서 머리라도 얻어맞으신 거야? 맛이 가신 것 같은데.”

나는 가스파르의 다정한 말이 낯간지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투덜거리는 에녹의 태도에 슬쩍 눈치를 보며 반보 물러났다.

‘으음. 그런 예의 없는 말은 무신경한 루카스나 넘어가지, 애들 교육에 철저히 신경 쓰는 가스파르는 봐주지 않을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았는지 껴안았던 에녹을 바닥에 내려놓은 가스파르가 작게 헛기침을 하더니 셋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장성하는 동안 버르장머리도 없어졌구나, 에녹.”

“네? 장성이요?”

“당장 연무장으로 따라오거라.”

“여, 연무장? 왜요?”

“나와 특훈을 해야겠다.”

“몇 년 동안 안 한 특훈을 왜 갑자기…! 악!”

아주 오랜만에 가스파르에게 귀가 잡힌 에녹이 비명을 내지르며 풀쩍 뛰었지만, 가스파르는 엄한 얼굴로 그를 다그칠 뿐이었다.

“어서.”

“으악! 잠깐만요, 귀만 좀! 아버지!”

‘까불다가 언젠가는 혼쭐날 줄 알았지.’

나는 질질 끌려 나가는 에녹의 무운을 빌며 어깨를 으쓱했다.

* * *

가스파르도 돌아왔겠다, 쁘띠 플뢰르의 막도 내렸겠다.

우리는 몇 달이나 자리를 비운 공작성으로 드디어 귀환할 수 있었다.

“…아가씨!”

“레오노라 아가씨이!!”

분명 휴가를 받아 황도에 올라왔었음에도 룰루랄라의 눈에는 나를 몇 년 만에 본다는 듯 눈물이 고인다.

“잘 지냈어?”

“아뇨. 아가씨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요.”

“저도요. 마침 여태 모은 아가씨 삽화를 너무 들여다봤더니 전부 누래져서 새로운 삽화가 필요했던 시점인데 잘 오셨어요…!”

“…삽화?”

나는 랄라의 외침에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나 그런 거 그려 준 적 없는데?’

“큼, 흠흠! 아무튼 공작성에 돌아오신 걸 환영해요, 아가씨!”

룰루랄라의 호들갑에 나를 에스코트한 후 마차에서 내린 에녹이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찬다.

“와, 형. 하녀들 좀 봐. 우리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나 봐.”

“도련님들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룰루의 뒤늦은 인사에 고개를 까딱한 실비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레오노라가 코앞에 있으니 우리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지 않나.”

‘뭐라는 거야!’

나는 둘째의 오글거리는 말에 셋째가 당연히 반박하리라 생각하고 에녹을 힐끔했다.

“하긴, 우리 막내가 좀 귀엽고 깜찍해야지.”

“…….”

나와 눈이 마주친 에녹이 찡긋 윙크를 하며 암암, 고개를 끄덕인다.

“…시끄러워, 에녹.”

나는 그나마 만만한 에녹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는 휙휙 내 손길을 피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왜? 우리 리니가 얼마나 사랑스러운데! 이렇게 신문 전면에 실릴 정도로-!”

“어머, 그거 아가씨가 실렸다는 신문인가요?”

“저도 좀 보여 주세요!”

“그거 내놔아~!”

에녹이 룰루랄라에게 신문을 넘겨주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폴짝폴짝 제자리에서 뛰는데, 룰루랄라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코제트가 공손하게 읍하며 우리를 맞이한다.

“모두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각하, 돌아오자마자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손님이 와 계십니다.”

나는 코제트의 말에 자그마한 미간을 모았다.

‘빈 공작성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다는 거지?’

코제트가 함부로 객을 들일 만큼 무능한 집사는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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