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40)화 (375/486)

제140화

  

  

  

“히스, 지금이야.”

내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내리는 신호에 히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쿠쿠쿵-!

그 순간, 그가 미리 황성 근처에 풀어 둔 고로나 무리가 일제히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물의 습격입니다, 폐하!”

스콜라홀에서 어떤 회의가 진행 중이었는지는 꿈에도 모를 그레고르의 친위 대장이 다급하게 들어와 목소리를 높인다.

“폐하, 지금 당장 피신하셔야 합니다! 황성의 세 번째 결계가 파훼되었습니다!”

“뭐, 뭐라? 결계가 무너져?”

친위대의 보고에 그레고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당연했다.

황도 바하무스를 내려다보는 웅장한 순백의 성은 그 어떤 침입자도 허락하지 않는 강력한 결계로 유명했으니까.

아무리 히스가 마도 왕국을 이끌었던 마도사라고 해도 아이네스가 고로나를 황성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결계를 순간이나마 해제하지 않았다면 고로나 무리를 끌고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을 터였다.

‘고마워, 아이네스!’

나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황성의 모습에 제 계획이 틀어진 것을 알고 당황할 여주의 얼굴을 떠올리며 움후후 악당처럼 웃었다.

“폐하, 자카리 오라버니의 근신령을 부디 풀어 주세요.”

나는 친위대와 함께 허둥지둥 피신을 준비하는 그레고르를 향해 간절한 얼굴을 꾸며냈다.

“공녀는 지금 제국의 황성이 마물의 습격을 받는 상황에 제 오라비를 걱정하는가!”

“오라버니의 무죄가 증명되었기에 풀어 달라는 게 아니에요.”

나는 엄한 얼굴로 나를 혼내기라도 하려는 듯 이마에 잡힌 주름을 꿈틀거리는 그레고르를 마주한 채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황성을 공격하는 고로나 무리를 대적하는데 지금껏 자브뤼켄에서 마물과 싸워 온 흑랑(黑狼)의 기사단장인 자카리 오라버니만한 인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합니다.”

“공녀님, 아니, 라노오레 박사의 말이 그르지 않습니다, 폐하! 폐하의 친위대를 포함한 황군은 마물과 싸우는 법을 모르지 않습니까?”

마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입을 모아 간청했지만, 그레고르는 자카리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듯 미적지근하게 대꾸했다.

“…지금이라도 적랑(赤狼), 아니, 청랑(靑狼)이라도 호출하면 되지 않겠는가?”

“남부의 기사들이 황도에 올라오는 동안 고로나가 황성, 아니, 황도 전역에 역병을 퍼뜨리고도 남을 겁니다.”

“폐하, 자카리 하차니아의 근신령을 해제하여 주시옵소서!”

“간청 드리옵니다, 폐하!”

고로나는 한 마리일 때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무리가 형성되는 순간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했다.

고로나 무리의 위험성을 아는 학자들이 일제히 부복하며 고집을 부리는 그레고르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폐하, 이대로 저희만 피신한다면 황족과 귀족은 목숨을 건지겠지만, 황도는 죽음이 휩쓸고 간 땅이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황도를 채울 제국민이라면 황도 밖에도 썩어 넘치거늘!”

‘저 미친놈 또 망언할 줄 알았지, 내가.’

학자들의 간청에 그레고르가 헛소리를 내놓는 찰나였다.

찰칵.

찰칵, 찰칵-!

구석에서 셔터음 비슷한 소리가 터져 나온다.

“감히 짐의 허락도 없이 누가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베리타스 신문사의 기자인 엘레노어 노타입니다, 폐하.”

자신을 소개한 엘레노어 노타는 그레고르에게 인사를 올리는 순간에도 사진기 아티팩트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짐은 황성에 언론인의 출입을 허한 적이 없다! 저년을 내쫓거라!”

그런 엘레노어의 행동이 발칙하게 보였는지 그레고르가 얼굴까지 붉히며 그녀를 손가락질한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번 학술회 마경 중계를 허락하셨습니다, 폐하.”

“뭐라? 짐이 언제?!”

“갈고리 상아탑주의 요청이었던 것으로 압니다만….”

비서관의 대답에 그레고르는 그제야 이마를 치며 히틀 아돌프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랬었지. 제국 전역에 이번 학술회를 중계하면 새로운 정책을 내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네놈이 감히 짐에게 간언하였지.”

그레고르의 낮은 목소리에 역정이 섞여들었다.

순식간에 제게 튄 불똥에 아돌프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연다.

“저, 저는 분명 발렌타인사의 기자를 초청했습니다! 베리타스사의 저 기자는 얼굴도 모릅니다, 폐하!”

아돌프의 변명에 엘레노어는 방긋 웃으며 발랄하게 입을 열었다.

“아, 아돌프 박사님의 초대를 받은 써머가 오늘 배탈이 났다고 해서 제가 급하게 대신 왔습니다.”

“나는 분명 발렌타인사와 계약을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가! 그대는 베리타스사의 기자라면서!”

“천재지변이나 기타 이유로 취재가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다른 신문사의 기자로 대체될 수 있다는 조항을 못 보셨나 봐요.”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엘레노어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듯 성큼 다가오는 아돌프를 막기 위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끼어들었다.

“뭐?”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도 발렌타인사와 몇 번 계약해 본 적이 있어서 저는 알고 있는 조항이거든요.”

‘그러게, 계약을 할 때는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 봤어야지.’

흥.

“이 건방진-!”

잔뜩 성이 난 아돌프가 콧방귀를 뀌며 내게 다가오려는 듯싶었지만,

‘음? 나한테 오려는 거 아니었나?’

내 뒤를 힐끔한 그는 흠칫 놀라며 몸을 멈춰 세웠다.

‘내 뒤에는 히스밖에 없을 텐데.’

나는 아돌프가 무엇을 보고 놀랐는지 영문을 모르겠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히스?”

“네.”

역시 내 뒤에는 내 말에 얌전히 대답하며 순한 얼굴로 서 있는 히스뿐이다.

‘뭐야. 갑자기 내가 공녀라는 사실을 자각한 건가?’

진리를 탐구하는 상아탑의 현자들은 제국 내에서 꽤 큰 영향력을 발휘하긴 했지만, 개국공신이자 귀족을 대표하는 5대 귀족에 속하는 공작가의 위세에는 당연히 비할 수 없을 테니까.

“크흠, 흠! 어쨌든 내가 계약한 대상은 발렌타인사이니, 중계는 물론이고 베리타스사의 신문에 이번 학술회의 내용을 싣는 것은 허락할 수 없소.”

“앗. 죄송하지만, 이미 학술회는 중계되고 있는데요.”

아돌프의 말에 엘레노어는 떨떠름히 턱을 긁으며 대답했다.

“뭐? 하지만 발렌타인사에서는 분명 녹화된 내용을 편집해 주겠다고 약조했었는데!”

“아, 저희 베리타스사는 생중계가 원칙이라서요.”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엘레노어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마경을 가리킨다.

“이미 영상은 전부 송출되었답니다.”

“빌어먹을! 그럼 짐이 한 말도 전부 다 중계되었다는 말인가?”

“예, 폐하.”

엘레노어는 황제의 진노한 얼굴에도 딱히 두려운 기색 없이 담담히 대답했다.

“이 고얀! 감히 짐의 성언을 허락도 없이 유포시켜?! 저년을 극형에 처하라!”

‘성언은 무슨, 망언밖에 안 하는 주제에….’

그레고르의 명에 엘레노어를 붙잡기 위해 친위대의 병사들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폐하,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마력의 파동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습니다!”

나는 은근슬쩍 엘레노어를 내 작은 몸으로 가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 장! 고로나 무리를 막아야만 해요!”

“…황성을 공격했다는 것이 오해였음이 증명되었으니 자카리 카르스텐 하차니아의 근신령을 해제한다.”

내 말에 마경을 힐끔한 그레고르는 입술을 짓씹으며 마지못해 자카리의 무죄를 인정해 주었다.

“카르스텐 경은 지금 당장 흑랑(黑狼)을 이끌고 고로나 무리를 처단하라!”

그레고르의 명령에 한쪽 벽에 기대선 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자카리가 느릿느릿 눈을 깜박인다.

“네….”

제 누명이 벗겨진 것을 기뻐하는 기미도 없이 황제의 명이 귀찮다는 듯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는 자카리의 모습에 학자와 귀족들 사이에서 경악 섞인 외침들이 터져 나온다.

“…정말 카르스텐 경을 믿어도 되는 것이오?!”

“우, 우리 목숨이 달렸는데 너무 대충 대답한 것 같은데.”

그러나 그런 의심스러운 목소리들은 자카리가 스콜라홀의 창문을 열고 단박에 외벽으로 도약하는 순간 일제히 소강되었다.

“허어. 저게 말로만 듣던 쉐도우나이츠의 그림자로군요.”

쉐도우나이츠들은 그림자가 존재하는 공간에서만큼은 이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자카리는 흑랑의 무기인 단검을 양손에 쥔 채 고로나가 우글우글 뭉쳐있는 새하얀 외벽에 달려들었다.

콰직.

그의 검기 한 번에 수십 마리의 고로나가 끼룩 비명을 내지르며 스러진다.

‘아앗, 안 돼!’

영웅의 등장에 안심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만 화들짝 놀랄 뿐이었다.

‘내가 어떻게 길들인 고로나인데…!’

“오라버니 혼자 싸우게 둘 수는 없지요.”

나는 자카리가 내 고롱이들을 전부 없애 버리기 전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에 그를 따라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즐리~!”

내가 황성 문턱을 넘자마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리즐리(곰형 마수)가 개처럼 왕왕 울며 달려온다.

그리즐리의 등에 올라탄 나는 바주카포를 꺼내 들고 황성의 외벽을 향해 총구를 돌렸다.

달칵.

쾅, 콰콰콰쾅-!

방아쇠를 당기는 소리에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건재했던 황성의 외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뒤따른다.

“레오노라, 레오노라 공녀의 등장입니다~!!!”

나는 어느새 나를 뒤따라 외벽에 달라붙은 엘레노어의 외침에 씨익 웃으며 바주카포를 어깨에 얹었다.

“앗, 황실에서 긴급 전언이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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