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유사시에 사용해라.”
“오러석같은 거 만들지 말라고 했잖아.”
나는 실비가 내 손에 쥐여 준 반질반질한 조약돌 같은 오러석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이만 한 크기를 만드려면 꽤나 아팠을 텐데.’
“네가 위험에 처하는 것보다는 낫다.”
내가 제 걱정을 하는 것을 눈치챈 실비가 슬몃 웃으며 흐트러진 내 옆머리를 정리해준다.
“황성 한 번 다녀오는 걸로 별 유난을 다 떠는군.”
나는 나를 스쳐 지나간 자카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마차에 올랐다.
* * *
황성에 당도한 내가 문턱을 넘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카리의 손에 내 마나석을 쥐여 주는 일이었다.
“……?”
“실비나 오라버니의 오러석처럼 특수한 이능을 발휘할 수는 없겠지만, 오라버니가 맑은 정신을 유지하는 데는 조금쯤 도움이 될 거예요.”
아직 내 마나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내 마나는 신성력처럼 오러 정화나 치유 효과가 있었다.
‘괜히 아이네스가 내 마나에 집착하는 게 아니지.’
우윳빛으로 반질거리는 실비의 오러석과 달리 투명한 크리스털처럼 반짝이는 마나석을 얼떨결에 손에 쥔 자카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실베스테르놈에게는 하지 말라고 한 짓이 아니었나.”
“오러석 추출은 고통스러우니까요. 마나는 뽑아내기가 쉬워서 상대적으로 덜 아파요.”
나는 내 속내를 가늠하려는 듯 눈을 가늘이는 자카리를 빤히 바라보다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늘 졸리고 피곤해하시는 거, 오러 부작용이라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내 마나석이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는 설명을 해주고 싶었지만, 자카리가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나를 밀어 내 버렸다.
“경고했을 텐데. 내게 잘해줄 필요 없다고.”
“네-네- 알았으니 이제 들어가요.”
나는 싹퉁바가지 없는 자카리의 말에 콧잔등을 찡그리며 몸을 돌렸다.
“아휴, 잘해 줘도 난리야. 무슨 아기 고양이도 아니고.”
“뭐…?”
내가 작게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어이가 없다는 듯 자카리가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의 손길을 스리슬쩍 피하며 본성의 스콜라홀을 가리켰다.
“앗! 학술회장에 도착했어요.”
까칠한 장남이 화를 내기 전에 당도해서 다행이다.
오도도 회장 앞으로 달려간 나는 문을 지키고 선 시종과 학술회의 운영 위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레오노라예요.”
나를 바로 알아본 황성의 시종이 다정하게 웃으며 스콜라홀의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이본느 황비 전하의 티파티라면 본성 유리 온실에서 열린답니다.”
“티파티는 오후에 갈 거예요. 지금은 학술회에 참가하러 왔어요!”
“이런, 학술회에 참가하고 싶으시다고요.”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저명한 박사님들이 전부 모이는 학술회잖아요! 엄청 재밌을 것 같은데요?”
발랄한 내 목소리에 어린아이의 동심을 깨고 싶지 않다는 듯 난감해하는 시종을 대신해 운영 위원이 비딱하게 짝다리를 짚은 채 입을 연다.
“하차니아 공자님이라면 가주 대리 자격으로 참가하실 수 있겠지만, 공녀님은 참가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학자 자격증이 있으면 참가할 수 있는 학술회라고 들었는데요.”
“개나 소나 발급받는 2급 자격증이 아니라, 1급 학자 자격증이 황성 학술회의 참가 조건입니다.”
제국에서 공인한 학자 자격증은 1급과 2급으로 나뉘었는데, 2급은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귀족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을 정도로 흔한 자격증이었다.
‘물론 내 나이에 2급을 딴 아이들은 몇 없겠지만.’
“공녀님이 얼음 마탑 소속 연구자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50명 이하 규모의 마탑 소속 연구원에게 발급되는 자격증은 2급입니다.”
내가 시종을 향해 방긋방긋 웃던 얼굴을 그대로 돌려 운영 위원을 올려다보자 그가 비뚜름히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덧붙인다.
“공녀님이시니 그나마 선별 기준이 되는 제 2급 학자 자격 시험조차 치르지 않으셨겠지만요.”
그는 귀족 아이가 연구자 역할 놀이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비딱한 시선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기까지 했다.
“이름이?”
“타이론 벤지에입니다.”
벤지에라면 남부의 꽤 큰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가였다.
‘하지만 가주와 후계자의 이름은 내가 전부 외우고 있는데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야.’
그럼에도 내게 으스대는 꼴을 보아하니 직계는 맞는 것 같았지만, 아무리 나보다 나이가 많다 해도 그는 일개 백작가의 영식, 나는 5대 귀족에 속하는 공작가의 공녀님이었다.
“그래, 타이론.”
나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어깨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밀치며 입을 열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느라 예법을 익힐 시간이 모자랐던 모양인데.”
매섭게 눈꼬리를 세운 나와 눈이 마주친 타이론의 얼굴에 일순간 긴장이 맺힌다.
“나는 그대에게 내게 말을 걸어도 좋다 허락한 적이 없어.”
윗사람이 먼저 인사를 건넬 때까지 아랫사람은 말을 걸지 못한다.
상대가 아이라면 종종 귀엽게 넘어가 주긴 했지만, 이건 제국의 모든 사교계에 통용되는 기본적인 예의나 마찬가지였다.
“…아, 죄송합니다.”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타이론이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타이론 벤지에, 벤지에 백작가의 삼남이 하차니아 공녀님을 뵙습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서 반짝이는 소속 마탑의 브로치를 눈여겨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소수 규모의 마탑이라도 마탑의 주인에게는 제 1급 학자 자격증이 주어진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죠. 마탑을 운영하려면 그만한 자격을 입증해야 하니까요.”
“당연하겠지. 마탑은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타이론의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공녀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전국의 내로라하는 학자들도 쉽사리 통과하지 못하는 제 1급 학자 자격증 시험을 통과해야만 마탑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마탑은 아무나 세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 1급 학자 자격증은 물론 동료 학자들에게 검증을 받은 논문 실적이 매우, 몹시, 대단히 뛰어나야만 했으니까.
“응. 그러니까 비켜.”
나는 내 앞을 가로막고 선 타이론을 밀치며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바로 그 마탑주니까.”
* * *
황실에서 여는 학술회이자 대회의가 진행될 스콜라홀은 학자들과 귀족들로 이루어진 무리로 벌써부터 소란스러웠다.
“얼음 마탑주, 라노오레 박사님 드십니다!”
호명관의 외침에 일순간 소음이 잦아든다.
“라노오레 박사?”
“얼음 마탑주라면 그 어떤 학술회나 연구 모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을 텐데…?”
나는 의아한 학자들의 의문이 터져 나오는 회장 가운데로 양 갈래로 묶은 머리를 장식한 리본을 팔랑이며 들어섰다.
“으응?”
호명관과 나를 번갈아 바라본 학자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휘둥그레 커진다.
“잠깐, 이 조그맣고 깜찍한 소녀가 라노오레 박사라는 말인가?”
“예, 맞습니다!”
누군가의 물음에 호명관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허어, 설마 드래곤은 아니겠지요. 저렇게 작은 아이가 마탑의 주인이라뇨.”
“그럴 수도… 아니, 잠깐만요. 저 얼굴, 제가 어디서 본 듯합니다.”
위풍당당하게 홀을 장악한 나는 제국에 현존하는 수천의 학자들 중에서도 저명하다고 손꼽히는 학자들이 모여 있는 원탁에 쏙 들어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레오노라예요.”
내 깜찍한 인사에 나를 어디선가 봤다며 중얼거리던 학자 한 명이 원탁을 탁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레오노라! 레오노라 하차니아 공녀님이 아니십니까? 이번대 쁘띠 플뢰르로 선정되신!”
“네, 맞아요.”
나는 뾰족한 수염이 인상적인 학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방싯 웃었다.
“세상에! 공녀님께서 북부의 현자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 라노오레 박사였다고요?”
“얼음 산맥의 현인이 이 쪼꼬미 공녀님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오랜 시간 베일에 쌓여있던 아크레아 유물의 원리를 파악해 낸 천재…!”
내 대답에 내 주변 학자들이 몸을 움찔하며 놀란 원숭이처럼 제 입을 틀어막는다.
‘조금 부끄러워지려고 하네.’
나는 학자들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내 업적에 민망한 뒤통수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체내 마나양이 워낙 방대해서 유물을 해체하기 유리하기도 했고, 아크레아의 왕이었던 히스가 도와줘서 가능한 성과였으니까.
“천재라뇨. 그냥 어렸을 때부터 유물에 관심이 많았을 뿐인데 너무 과한 칭찬이세요.”
아크레아의 유물은 돈이 된다.
‘돈 되는 유물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
내가 발그레하게 뺨을 붉히며 하는 말에 학자들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라노오레 박사가, 아니, 공녀님이 천재가 아니라면 저희는 도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올해 몇 살이시지요?”
“여덟 살이에요.”
응애응애.
내 대답에 학자들은 하나같이 허탈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덟 살… 나는 여덟 살에 뭘 했더라….”
그 순간, 한숨을 푹푹 내쉬는 학자들 사이에서 뾰족한 시선이 내 쪽으로 날카롭게 꽂힌다.
“공녀가 정말 라노오레 박사인지는 학술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밝혀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