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공녀가 나는 무슨 일로 찾은 거지?”
나는 내가 황성을 방문한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양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이네스를 마주한 채 생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제국을 밝히는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인사치레는 됐어. 용건만 간단히 말했으면 좋겠는데.”
아이네스는 시녀장이 내온 홍차를 홀짝이며 얌전히 자세를 갈무리했다.
아이네스 드 네아 윌레닌.
하늘하늘한 연갈색 머리를 어깨에 닿을 정도로 기른 그녀는 봄의 초록처럼 푸릇푸릇한 녹안을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
‘외양만 보면 정말 천상 여자 주인공에 어울리는 얼굴이긴 해.’
뾰족하게 올라간 내 눈꼬리와 달리 순하게 쳐진 눈은 소녀의 선한 인상을 완성시켰다.
‘저 얼굴로 황도에 사는 제국민 삼분지 일을 죽게 만들 계획을 세우다니….’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가 내 눈앞에 앉아 있었다.
“응? 나를 찾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황녀의 응접실에서 고로나의 흔적을 찾던 나는 그녀의 재촉에 천진한 아이처럼 눈을 깜빡였다.
“별건 아니고, 단순히 제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얼마 전에 루엘라 신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신전을 찾았는데 그날 밤 묘한 꿈을 꾸고 말았어요, 전하.”
나는 신심 깊은 신도 흉내를 내며 아련하게 두 손을 맞잡았다.
“무슨 꿈이었는데?”
“황도를 새까만 그림자가 덮치는 꿈이요. 새부리 가면을 쓴 사람들이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고요.”
꿈풀이를 할 때 새까만 그림자는 대개 병과 우환, 그리고 새부리 가면을 쓴 사람들은 의사를 뜻했다.
교황인 발레리가 나를 시동으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아이네스가 정말 제국민을 생각하는 황녀였다면 내 꿈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터였다.
내 꿈은 예지몽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
“평소라면 그냥 무시했겠지만, 하필 제국의 안위를 위해 기도를 올린 날에 꾼 꿈인 터라 황녀 전하께 알려 드려야겠다 싶어서요.”
내가 아이네스에게 꾸지도 않은 꿈을 지어내면서까지 말해 주는 건 일종의 경고였다.
더는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
“개꿈이네.”
그러나 아이네스는 내 말에 코웃음을 치며 홍차가 든 찻잔을 거칠게 소서에 내려놓을 뿐이었다.
“만약 개꿈이 아니라면 네 꿈에 나온 그림자는 전염병 같은 게 아니라 네 오라비를 뜻하는 게 아닐까?”
홍차가 튄 탁자를 흘깃한 그녀가 얼굴을 뒤로 젖히며 느릿느릿 말을 잇는다.
“네 오라비인 자카리 하차니아는 쉐도우나이츠잖아. 그가 감히 모반을 계획했다는 의혹을 받아 황군의 수사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기어코 자카리를 걸고넘어지는 아이네스의 말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저희 공작가는 늘 황실의 든든한 우군이었는 걸요. 모든 게 오해였다는 게 곧 밝혀질 거예요, 전하.”
역병을 몰고 다니는 마물 고로나를 황도로 불러들인 건 자카리가 아닌 아이네스였다.
‘자카리는 흑랑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마물을 쫓아 황도까지 올라왔을 뿐이고.’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뻔뻔하게 자카리를 역적으로 모는 아이네스의 태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아이네스가 아이답지 않게 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뻗는다.
“…레오노라, 지금이라도 네가 내 사람이 되어 준다면 내가 황제 폐하를 설득해 이 사태를 마무리 지어 줄 수도 있어.”
‘그 말은 그냥 네 마나통이 되어 달라는 거잖아!’
“어때?”
아이네스의 제안에 울컥 치솟는 말을 간신히 삼킨 나는 그녀처럼 상냥한 가면을 뒤집어쓴 채 대답했다.
“전하, 저는 윌레닌의 귀족이에요. 굳이 전하께서 부탁하시지 않아도 황실을 섬기는 충복이랍니다.”
“아니, 내 곁을 지키는 배동이 되어 달란 말이야.”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아버지의 관계가 워낙 돈독해서요, 그건 힘들 것 같아요.”
아이네스에게 사로잡혀 마나만 쪽쪽 빨리며 이용당하는 삶을 사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내가 원작의 레오노라처럼 순순히 마나를 내어 줄 줄 알고?’
루카스에게 배운대로 내재된 마나의 양을 들키지 않게 잘 갈무리한 내 몸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샅샅이 훑은 아이네스가 차갑게 눈을 빛내며 입을 연다.
“…공녀는 언젠가 지금 내가 내민 손길을 거절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아니, 후회하는 건 너일걸.’
제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병 들게 하려는 아이네스는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테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 거야.’
* * *
레오노라가 돌아가자마자 아이네스는 율리아를 호출했다.
“율리아, 아무래도 레오노라 공녀가 날 또 방해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
잔뜩 인상을 찡그린 소녀의 어깨를 다독인 율리아는 허리 끝까지 내려오는 자신의 치렁치렁한 브루넷을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거랍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황녀 전하.”
“후우. 율리아가 윌레닌으로 와 줘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아이네스는 율리아의 품에 안긴 채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의 제자가 윌레닌 제국에는 나 혼자뿐이라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아멜리아든 로멜리아든, 지금 내가 부리는 푸른 독수리들은 하나같이 전부 무능력하고.”
가스파르 하차니아를 유혹하라는 쉬운 명령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멍청한 카멜리아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고대부터 내려온 진짜 푸른 독수리들이 아닌, 연금술로 만든 가짜들이니까요.”
율리아는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아이네스의 등을 쓰다듬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곧 ‘그분’이 실험에 성공하시면 황녀 전하를 보필할 진짜 푸른 독수리들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내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심장이 저절로 터져 버리는 노예들 말이지? 아아,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아.”
아이네스는 율리아의 말에 아이처럼 기뻐하며 싱글벙글 웃었다.
아멜리아나 로멜리아도 그녀의 명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노예나 마찬가지였지만, 주어진 지령에 실패해도 죽는 저주에 걸리진 않았다.
‘그래서 감히 실패한 주제에 주인인 내게 돌아올 생각을 하는 거야!’
임무에 실패했으면 자결을 하든 해야 할 것 아닌가?
아이네스는 자신의 푸른 독수리들이 괘씸해 어쩔 줄 몰랐다.
“진짜 푸른 독수리는 다르겠지. 너무 기대돼!”
“황녀 전하께서 좋아하시니 저도 기쁘네요. 그나저나 레오노라 공녀 말인데… 정 거슬리시면 가택 연금령을 내리시면 어떨까요?"
율리아는 윌레닌으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멜리아의 보고만으로도 레오노라가 ‘그분’의 계획에 얼마나 큰 방해가 되는 인물인지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가택 연금? 하지만 공녀가 자카리 하차니아의 역모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는걸.”
“어머, 우리 전하는 순진하기도 하셔라.”
율리아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는 아이네스를 내려다보며 그녀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권력자에게 증거는 찾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랍니다.”
“증거를 만들어?”
“네. 제 아버지인 만프레드 황제께서는 그렇게 귀족들의 목을 옥죄고 황권을 강화시키셨지요.”
“흐응. 그렇단 말이지….”
레오노라는 그녀의 ‘불치병’이 발현되었을 때 치료제로 써먹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해서 아이네스는 레오노라를 함부로 처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택에 가두는 정도는 괜찮겠지.’
“좋아, 그렇다면 증거 조작은 율리아에게 맡길게.”
“네. 전하께서는 일단 계획하신 대로 전염병부터 퍼트리시죠.”
“응. 고로나는 내 말을 아주 잘 들으니까.”
율리아의 말에 아이네스는 후후 웃으며 창문을 열어젖힌 후 황성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장을 손짓했다.
“고로나, 광장 근처 우물에 역병을 퍼뜨려.”
“꾸르륵?”
아이네스는 자신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회색 슬라임을 내려다보며 턱을 매만졌다.
“으음…. 그래, 천연두가 적당하겠어.”
천연두 환자의 발진은 사람들에게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으니까.
그야말로 ‘황실에 충성하지 않은 몹쓸 인간들’이 걸릴 만한 저주에 걸맞는 병이 아니겠는가.
“율리아, 발렌타인사의 사장을 다시 한번 매수해 전염병에 대한 기사를 쓰게 해.”
“좋은 생각이십니다, 황녀 전하.”
“응. 기사 제목은 <고대의 저주, 하차니아에 의해 다시 발현되다.>정도가 좋겠어. 윌레닌 황가에 반의를 가진 자들은 저주에 걸린다는 옛 신화를 퍼뜨리면서 말이야.”
제 아비인 그레고르는 무려 제국의 황제였다.
그런 권력자가 제 뜻대로 여자를 취한다는데 반기를 드는 괘씸한 자들이, 지독한 병마에 시달리는 건 당연한 인과가 아니겠는가.
“흥! 천박한 것들이 감히 황실을 무시한 죗값을 치르게 해 줘야지.”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황녀 전하. 황도에 사람은 차고 넘치니까요.”
* * *
다음날, 발렌타인사의 1면에 실린 건 단순히 전염병에 대한 기사가 아니었다.
“아가씨, 이런 거 읽지 마세요! 쓰레기 가십지에 불과하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나는 로제가 기겁하며 빼앗아든 기사를 흘깃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역병을 하차니아 탓으로 돌릴 생각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