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31)화 (366/486)

제131화

‘고로나가 황성에 숨어들었다는 증거부터 대라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나는 브라우스의 회신에 찡그린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무려 마물이 황성의 결계를 뚫고 숨어들었다.

결계를 늘 감시하고 있을 황성의 마탑이 마물의 흔적을 추적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러니까 황실 소속 마법사들에게 물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를 우리 보고 증거를 가져오라고 우겨 댄다는 건….’

역으로 황실에서 이 사건을 은폐하겠다고 나오는 거나 다름없지.

“하필이면 이럴 때 각하께서 언질도 없이 신전에 기도를 올리겠다 향하셨으니….”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헨리가 묻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가씨?”

방금 전 마주쳤던 소년의 떠오르는 맑은 녹안에는 내가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우직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황실에서 하차니아를 고의적으로 믿지 않겠다고 나오는 건데,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아.”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해결 방안을 떠올리시겠죠.”

“…왜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그야 본좌의 태양께서는 아름답고 귀엽고 상냥하신 데다 현명하기까지 하시니까.”

집무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온 자르파라가 헨리를 대신해 대답한 뒤 마치 으스대듯 그를 돌아본다.

“내 말이 그르지 않지 않소, 헨리 마사드?”

“우리 아가씨는 제가 모시는 공작가의 공녀이십니다!”

“본좌의 빛과 태양이시지.”

“그건 그냥 별칭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아가씨는 저의 빛과 태양이시기도 합니다! 아니, 아가씨는 제 우주세요!!”

으음….

나는 묘한 기 싸움을 펼치는 둘을 지켜보다 살금살금 뒷걸음질 쳐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계속 보고 있으면 헨리까지 나를 태양이네 빛이네 부르는 사태가 올지도 몰라.’

우주까지는 정말이지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침실로 돌아온 나는 오망성의 꼭짓점을 전부 채워 오색찬란하게 빛이 나는 원작책을 펼쳐 들었다.

‘그나저나 정말 원작과 전개가 달라진 걸까?’

내가 기억하는 원작에서 여자 주인공 아이네스는 역병을 해결하는 역할이었지, 역병을 황도로 불러들이는 역할은 절대 아니었으니까.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황녀 전하, 길들이신 마물을 서부에서 무사히 황도로 송환했습니다.”

아멜리아의 보고에 대충 턱을 끄덕인 아이네스는 아주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벨벳 쿠션 위에 얌전히 자리 잡은 회색 슬라임을 쓰다듬었다.

“우쭈쭈. 우리 예쁜 고로나, 먼 길 오느라 힘들었지?”

정작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물을 황도까지 옮겨 오느라 갖은 고생을 다한 아멜리아의 노고는 치하해 준 적이 없으면서 그녀는 마물만은 기특해 죽겠다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테이머(tamer)의 손길을 느낀 고로나가 그르릉거리며 아이네스의 작은 손바닥에 제 축축한 머리를 비빈다.

“애교를 부리네. 고로나가 배고픈 모양이야.”

“…아, 네. 마침 로멜리아가 주방에 내려갔습니다.”

아멜리아의 대답에 아이네스는 의아한 얼굴을 찌푸렸다.

“주방에는 뭐 하러 내려가?”

“마물의 주식은 고기 아니었습니까?”

당연히 살아 있는 인간이나 동물을 잡아먹는 걸 가장 선호하긴 했지만, 황성에서 살아 있는 동물을 마물의 먹잇감으로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해서 아멜리아는 생고기라도 먹이기 위해 또 다른 푸른 독수리인(아이네스의 비밀 병기 단체) 제 여동생을 주방에 내려보낸 참이었다.

“응. 먹이라면 여기 있잖아.”

그런 아멜리아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아이네스가 자신의 생일 선물로 젠나일 선황녀가 보내온 아름다운 새장 문을 열어젖힌다.

끼룩. 끼룩끼룩.

생명의 위협이라도 감지한 건지 아이네스의 손에 잡힌 작은 흰비둘기가 연약한 울음소리를 내며 발버둥 친다.

“그, 그 새는 황녀 전하의 전령새가 아닙니까?”

“맞아. 이번에 태풍이라도 만났는지 편지를 비에 적신 채 돌아왔더라고.”

비둘기는 똑똑해서 전령새로 많이 쓰이는 새였지만, 맹금류는 아니었으니 태풍을 뚫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네스는 햇볕에 바싹 마른 편지가 얼룩덜룩해진 지점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인상을 썼다.

“제 임무를 완벽하게 실행하지 못하는 전령새 따위, 아이네스는 필요 없어.”

끼룩. 끼룩끼룩.

와그작.

끼…룩.

아멜리아는 망설임 없이 비둘기의 다리를 부러뜨려 고로나에게 던져 주는 아이네스의 만행을 지켜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황녀의 행동은 일종의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아이네스가 바라는 바를 빈틈없이 수행하지 못하면, 그녀도 무사하지 못하리란 경고.

“…전하, 고로나를 어떻게 사용하실 생각이신지요.”

공포에 잠식된 아멜리아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애써 끌어올리며 물었다.

“제가 확인한 바로, 고로나는 미약한 검기에도 몸이 베이는 약한 마물입니다.”

“고로나 자체는 힘이 대단한 마물은 아니지. 하지만 역병을 몰고 다니잖아?”

아멜리아가 아이네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자, 황녀는 답답하다는 듯 그녀의 이마를 쿡 찔렀다.

“역병의 여파야말로 고로나의 진짜 힘이야, 아멜리아. 특히 황도처럼 폐쇄된 지역에서 발휘할 힘은 어마어마하지.”

고로나의 존재만 들키지 않는다면 이제 곧 황도의 제국민들은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는 전염병을 앓게 될 것이다.

마치 건국 황제가 더럽혀지지 않는 순백의 성과 함께 남긴 예언처럼.

“황가에 충성하지 않을 때 너희에게 필히 재앙이 찾아오리라.”

아이네스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그 예언을 다시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군주가 될 바에는 두려움을 심어 주는 군주가 되는 게 낫지 않겠어?”

황녀는 당황한 아멜리아를 향해 후후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요즘 내가 군주론을 배우는데,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위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위대할 수도 없는 법이라고.”

“그 선생님, 혹시 성함이 뭔지 여쭤봐도 될는지….”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아무튼 아빠의 사소한 실수들로 황실을 향한 제국민들의 충심이 나날이 떨어지고 있어. 내가 바로 잡아야만 해.”


탁, 소리 나게 책을 덮은 나는 아이네스의 망언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뭐? 사소한 실수?’

그레고르의 ‘실수’는 전혀 사소하지 않았다.

이미 남편까지 있는 자작 부인에게 청혼한 것도 모자라 거절당하자 보복 심리로 존경받는 영주였던 알렉시오스 남작의 작위를 명분도 없이 거두어들인 것이 제국민들의 공분을 산 첫 번째 실수였고,

제국의 적대국이나 다름없는 중앙 대륙의 또 다른 강자, 칼리시만 제국의 황녀인 율리아 칼리시만을 비(妃)로 들인 것이 제국민들 사이에서 그레고르는 여자에 미친 폭군이라는 이미지를 굳건하게 한 두 번째 실수였다.

‘율리아는 원작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중앙 귀족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기어코 비 자리에 올리는 파격 행보에는 나도 조금 놀라긴 했지.’

율리아는 아이네스의 든든한 조력자 중 하나여서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칼리시만의 현 황제인 만프레드가 가장 아끼는 딸이었으니 친정을 등에 업고 윌레닌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발휘하게 될 터였다.

윌레닌보다는 국력이 한참 떨어지는 아스텔리우의 왕녀인 멜리사를 사교계에 바로 받아들일 만큼 중앙 귀족들은 타국의 황족과 귀족들에게 우호적이었으니까.

‘그만큼 제국 황실에 충직하지 못하다는 뜻이지만, 어쨌든 아이네스는 율리아가 이본느를 밀어내고 황실 안주인 노릇을 하게 만들 거야.’

여기까지는 아이네스의 검은 속내만을 빼놓고 본다면 원작의 흐름과 비슷했다.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전에는 황제에 대한 제국민들의 반발이 이렇게 심하지 않았다는 점이겠지.

“헨리, 수도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신문사가 베리타스 신문사라고 했지?”

내 물음에 자르파라를 피해 내 침실로 피신 온 듯한 헨리가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힌 이마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하지만 재미없고 이해하기 힘든 주제를 다뤄서 소수의 지식인들만 읽는 학술지에 가깝습니다. 그 탓에 지금 재정난을 겪고 있고요.”

나는 헨리의 말에 잘됐다는 듯 손뼉을 치며 움후후, 악당 같은 웃음을 흘렸다.

“재정난이라고? 그럼 지금 베리타스사의 사장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 만한 소재에 아주 목말라하고 있겠네.”

“아무리 힘들어도 꿋꿋하게 진리를 추구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인데 정말 그럴까요?”

“그가 긍지를 버리지 않을 수 있게 공익을 가져오면서 베리타스가 겪고 있는 재정난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자극적인 특종이라면, 당연히 넘어오지 않겠어?”

“또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거야?!”

내 말에 헨리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과 동시에 허락도 없이 열린 문틈 사이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네가 뭔데 그런 기삿거리를 안다고 나서냐고? 비겁하게 수작만 부리는 저열한 사생아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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