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바리스탄은 정식으로 검술을 배운 적도 없는 내 검에 밀려 자신이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나는 바리스탄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바람처럼 가벼운 몸을 움직여 그의 뒷목을 검등으로 내려쳤다.
‘쁘띠 플뢰르의 참가자가 슈발리에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으니까.’
“으악!”
그가 고꾸라지자, 돔 형식으로 구성된 쁘띠 플뢰르의 본선 대회장에 몰린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레오노라 영애, 힘내세요!”
“레오노라 이겨라!”
나를 응원하기 위해 바하무스까지 올라온 로렐라인이 크게 외치자 그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든 사람들이 하차니아의 상징인 검은 늑대가 그려진 깃발까지 흔들며 내 이름을 외치기 시작한다.
“우!유!빛!깔!공!녀!님!”
“사!랑!해!요!공!녀!님!”
왠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슬쩍 들었던 나는 수도인 바하무스와는 거리가 꽤 먼 하차니아에서 올라온 듯한 고용인들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렸다.
‘본성에 일손이 남아도는 모양이야. 나 하나 응원한다고 수도까지 올라오다니.’
저택 고용인들 중에서 쓸만한 인재들을 차출해 자르파라 상단 쪽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하며 어깨를 으쓱한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이만 부득 가는 바리스탄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우우, 바닥을 향해 엄지까지 흔들며 지탄하는 군중의 목소리에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슈발리에가 참가자를 대놓고 공격하려고 드니까 원성을 사는 거예요.”
자신은 성인 남성, 나는 여덟 살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까먹어 버린 걸까.
나는 바리스탄의 돌발 행동에 멀리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스텔라를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스텔라가 깃발을 잡도록 돕는 게 경의 임무인데, 지금 완전히 그녀의 지시를 무시하고 있잖아요.”
모드에게 발이 묶여 엎치락뒤치락 바닥을 뒹굴던 스텔라는 아까부터 바리스탄에게 모드를 저지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솔로아 공작가의 직계도 아닌 방계 계집의 명령 따위, 솔로아의 기사들을 이끄는 내가 들어줄 필요는 없소.”
퉤엣.
걸쭉한 침을 바닥에 내뱉은 바리스탄이 허공에 붕 떠오른 채 상황을 중계하고 있는 마경을 힐끔하더니 제 목검에 검붉은 오러를 두르기 시작한다.
“참가자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룰이 있다라.”
흥, 콧방귀를 뀐 그가 비열하게 입꼬리를 히죽 올린다.
“내가 참가자를 다치게 했다는 걸 그 누구도 모르게 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지.”
짧게 욕설을 중얼거린 그는 목검을 휘둘러 나를 공격하는 대신 바닥을 내려쳐 부연 흙먼지를 일으켰다.
“다행히 이 돔 안에는 마경의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말이야.”
재빨리 바닥을 딛고 도약한 그는 제 허리에 겨우 닿는 내 작은 몸을 낚아채 관중석 아래, 쁘띠 플뢰르의 참가자들과 슈발리에가 등장할 때 사용했던 통로에 들어섰다.
‘단순히 지금 이 장면이 마경에 중계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다치게 해도 되는 건 아닐 텐데.’
나는 깃발이라도 쟁취했다는 듯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로 킥킥 웃는 바리스탄의 얼굴에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바보인가? 바리스탄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지금 나를 공격하면 스텔라조차도 바리스탄이 나를 해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앞날이 두렵지 않은가 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작가의 직계인 저를 해치려고 하다니요.”
“내게는 이제 앞날 같은 게 없어.”
바리스탄은 통로의 벽에 바싹 붙은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불빛을 받아 번쩍이는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슈발리에는 목검만 사용하는 게 룰이었을 텐데, 몰래 단검까지 들고 왔구나.’
바리스탄의 극단적인 행동은 마치 이번 기회에 내게 해코지를 하겠다고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바로 너 때문에 말이다, 이 맹랑한 계집!”
바리스탄은 공대도 집어치우고 내게 대놓고 적의를 보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앞날이 없어졌다는 게 무슨 말이죠?”
‘그가 트리스탄을 여태 학대했다는 사실을 내가 밝혔기 때문에 가문 내에서의 입지가 줄어들었으리란 예상은 했었지만, 내게 이렇게 악심을 품을 정도라고?’
솔로아 공작은 제 유일한 후계자가 학대를 당했든 말든 관심이 없는 것에서 나아가 바리스탄의 학대를 여태 묵인하고 동조했던 인간이었다.
“네깟 계집 때문에 나와 공작 각하의 철저한 훈육 속에서 후계자로 성장하던 트리스탄이 어긋나기 시작했으니까! 결국엔 적랑의 기사단들과 합심해 나와 공작 각하의 뒤를 노리게 되었다고!”
‘으음. 트리스탄, 다행히 안 보이는 곳에서 잘 크고 있었구나.’
대충 남자 주인공인 트리스탄을 학대하다 이제 가문에서 내쫓길 위기를 맞았다는 얘기인 모양이었다.
나는 추악한 바리스탄의 몰락이 꼴 좋다고 생각하며 어깨만 으쓱했다.
“그러게 진작에 잘해 주지 그랬어요.”
트리스탄은 원작의 남자 주인공, 즉 되는 주식이었는데.
“너만 아니었어도…! 네가 트리스탄을 자극하지만 않았어도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갔을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나만 원망하던 바리스탄이 날카롭게 벼려진 단검을 높이 치켜든다.
적랑의 기사 단장직까지 오른 인물답게 매끄럽고 빠른 발도였지만, 카렌의 이능력이 몸에 깃든 내게는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만 보일 뿐이다.
휘익.
그의 공격을 손쉽게 피해 낸 나는 레이피어에서 다시 바주카포로 변신한 무기를 어깨에 올린 채 그의 머리통을 겨냥했다.
쾅, 콰쾅-!
새빨간 빛이 발화하는 바주카포의 입구를 노려보던 바리스탄이 비죽 입꼬리를 들어 올린다.
“나는 이제 가문에서 내쫓길 신세지만, 촉망받는 공녀인 네가 나를 죽이면 단순한 사고로 마무리가 되진 않을 텐데?”
“경의 시체가 써머나이츠의 오러로 감싸인 채 발견된다면 누가 나를 의심할 수 있을까요?”
취미는 노예매매, 특기는 아동학대인 바리스탄은 내 기준엔 이 세상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이었다.
바주카포를 장식하는 트리스탄의 루비를 꾹 누른 채 마탄에 시동을 걸자 바리스탄의 얼굴이 그제야 창백한 흰빛으로 물든다.
“스, 스텔라 공녀가 깃발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그 순간, 본선을 중계하는 운영 위원의 목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진다.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옆을 돌아보자, 모드를 뿌리친 스텔라가 능선을 넘어 깃발에 다가서는 모습에 눈에 들어온다.
‘이런, 바리스탄 때문에 시간을 너무 낭비했어.’
나는 아무런 이능력이 없다고 믿었던 내가 써머나이츠의 붉은 오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모습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은 바리스탄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 버리고 싶지만, 당신을 처리하는 건 내 몫이 아닌 것 같아.”
바리스탄의 말대로 트리스탄이 솔로아 공작가 내에서 점점 입지를 넓혀 가며 그를 압박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처리하지 않은 이유도 존재할 것이다.
“아앗, 모드 이아론 영애가 스텔라 공녀를 막아섭니다! 이 와중에 레오노라 공녀는 왜 보이지 않는 걸까요?!!”
나는 다시금 울려 퍼지는 중계위원의 목소리에 덜덜 떨고 있는 바리스탄을 지나쳐 어두운 통로를 빠져나왔다.
빛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모습을 드러내는 나의 등장에 모드나 스텔라가 마경에 비칠 때와는 차원이 다른 함성이 울려 퍼진다.
“레, 레오노라 공녀의 모습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깃발이 꽂혀 있는 언덕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는데요, 그녀가 과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을까요?!”
어른인 바리스탄과 라르스에게 불쌍할 정도로 치이는 모습을 보여 나를 응원하는 군중들을 확보했으니, 이제 내 힘을 보여 줄 때였다.
나는 마경이 내 모습을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중앙으로 날렵하게 몸을 날린 다음 ‘미친개’였을 적 심심풀이로 대원들에게 선보이곤 했던 잔재주를 부리며 바주카포를 허공에 던져올렸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슈발리에이자 쁘띠 플뢰르의 영광을 노리는 레오노라 공녀가 무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차그락.
나는 바주카포를 장식하는 보석 중 하나인 자수정, 그러니까 ‘레오노라’의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보석을 꾹 누른 채 마탄을 장착했다.
세계관에서 가장 강한 소울나이츠로 손꼽히는 트리스탄의 붉은 오러보다도 강력한 마력이 느껴지는 새하얀 빛이 바주카포의 주둥이에 웅웅 소리를 내며 모여들기 시작한다.
‘내가 더는 하찮은 엑스트라가 아니라는 걸 알려 줘야지.’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아.황.장>의 주인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세계를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드는 아이네스에게.
‘아주 똑똑히 말이야.’
쿠쿠쿠쿠쿵-!
소리부터 심상치 않은 새하얀 오러로 이루어진 마탄이 바주카포를 떠나 언덕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한다.
쾅, 콰콰쾅-!!!
깃발이 꽂힌 언덕을 바주카포 한 방으로 날려 버린 나는 아이네스도 지켜보고 있을 마경으로 시선을 돌린 후 생긋 웃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