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18)화 (353/486)

제118화

“네, 오랜만이네요.”

나는 세월이 흐른 탓인지 벗겨진 바리스탄의 머리를 힐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바리스탄 경.”

“드디어 공녀와 전투를 붙게 되는 날이 오다니…!”

바리스탄은 아직 여덟 살에 불과한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 히죽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이날만을 기다려왔소.”

당장이라도 내게 손을 뻗으려는 듯 몸을 움찔하는 바리스탄을 막아선 사람은 쁘띠 플뢰르의 운영 위원도, 하차니아의 기사도 아닌 라르스 발탄이었다.

“바리스탄 경. 슈발리에는 쁘띠 플뢰르의 참가자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라르스.”

라르스에 의해 나와 사이가 벌어진 바리스탄이 우악스레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본다.

“나와 공녀 사이엔 오랜 시간 풀지 못한 앙금이 남아 있다고.”

“여덟 살 아이를 두고 도대체 무슨 앙금을 논하십니까. 추합니다, 바리스탄 경.”

“뭐, 뭐라? 추해?!”

혀를 끌끌 차는 라르스의 말에 발끈한 바리스탄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나는 저 멀리 능선 너머로 작게 보이는 깃발을 힐끗했다.

곧, 본선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운영 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쁘띠 플뢰르 본선 주제인 깃발잡기의 규칙은 단 두 개뿐이었다.

1. 슈발리에는 직접 깃발을 잡지 못한다.

2. 슈발리에는 쁘띠 플뢰르 참가자를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참가자인 동시에 슈발리에였기 때문에 라르스나 바리스탄보다는 제약이 없는 편이었다.

‘흐응. 둘이 싸우는 동안 슬금슬금 깃발에 접근해 볼까.’

라르스와 발탄이 서로를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어느새 깃발이 꽂힌 언덕 근처로 다가선 나를 발견한 모드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내지른다.

“발탄 경! 지금 뭐하고 있는 거예요! 레오노라가 깃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잖아요!”

그녀는 바리스탄을 막아선 라르스를 노려보다 내 쪽으로 우다다 달려오기 시작했다.

타악, 내 손목을 붙잡은 모드가 바리스탄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공녀를 잡았어요! 어서 해치워요!”

모드의 목소리에 라르스보다도 먼저 반응한 바리스탄이 기회라도 된다는 듯 내 몸을 거칠게 움켜잡는다.

라르스는 이번에도 바리스탄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걸 참을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영애, 이건 단순한 깃발잡기일 뿐입니다. 상대를 굳이 해칠 필요는-”

“지금 레오노라를 처리하지 않으면 황녀 전하께 제 말을 듣지 않았다고 전부 고해 버릴 거예요!”

악에 바친 모드가 바락바락 목소리를 높이자 라르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미안합니다.”

목검 몇 번 휘두르는 것으로 바리스탄을 몰아낸 라르스는 검끝을 내게 겨누며 연신 사과를 거듭했다.

“영애,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부디 물러나 주십시오.”

움직이기 편하게 승마복을 입은 나는 재킷 안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 손바닥만 하게 축소한 바주카포를 꺼내 들었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페리도트를 꾹 누르자 바주카포에서 뻗어 나온 마력이 회오리를 치며 내 몸을 감싸 안는다.

“비겁한 협박 때문에 원치 않는 대회에 참가하게 된 경에게 미안한 일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는 곧 새하얀 레이피어로 변한 바주카포로 라르스의 목 끝을 겨누며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제 사정에 대해 알고 계셨던 겁니까.”

라르스가 쁘띠 플뢰르 본선에 슈발리에로 나서게 된 경위를 언급하자 그의 예쁘장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렇다면 제가 영애를 다치게 하기 전에 물러나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라르스의 간절한 얼굴 위로 에녹과 실비의 얼굴이 겹쳐져 마음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그의 여동생이 앓고 있는 병은 아이네스와 내가 앓게 될 루에릭병처럼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은 병이었으니까.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이 세계에 하나뿐인 엘릭서고, 그 엘릭서를 아이네스가 라르스의 동생에게 내줄 리 없어.’

아이네스를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는 라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는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경. 아이네스 황녀 전하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내 말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라르스의 입매가 허물어진다.

“제게는 선택지가 없습니다, 영애.”

“라르스 경의 여동생이 앓고 있는 병을 치료할 방법이라면 제가 알 것도 같아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네스와 아멜리아의 대화로 유추한 병이라면 가능할 거야.’

내 말에 목줄에 매여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라르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생기가 맴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네. 확실하진 않지만, 움베르토 제약의 명성이라면 경도 익히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해요.”

힐다는 하차니아의 지원에 힘입어 제국 최고의 의술사이자 약제사로 성장했고, 지금도 성장 중이었다.

나는 희대의 천재라고 불리는 자랑스러운 힐다를 떠올리며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이는 라르스를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지금 영애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기권할 수는 없어요.”

모드 이아론의 슈발리에로 쁘띠 플뢰르에 참가하는 게 아이네스가 내건 조건이었을 테니 그를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기권하지 않아도 치료법은 알려 드릴 거예요.”

나는 조금 풀이 죽어 보이는 라르스를 위로하듯 조곤조곤 입술을 움직였다.

“어째서입니까?”

“전 아이가 아픈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로렐라인을 치료해 주는 대가로 돈을 받긴 했지만, 만약 백작이 아무런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아픈 그녀를 외면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경이 기권하지 않아도 이길 자신이 있고요.”

휘릭.

실처럼 가늘고 날카로운 레이피어를 횡으로 그으며 나는 바람에 휘날리는 실버블론드를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뜨렸다.

“말했잖아요, 나는 경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고.”

카렌은 훗날 사계절의 검을 뛰어넘는, 제국 제일검의 호칭을 거머쥘 검사 중의 검사였다.

‘그리고 나는 원작에 스며든 카렌의 능력을 바주카포를 통해 발휘할 수 있게 됐고.’

카렌의 페리도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나를 휩쓸고 지나가는 순간부터 나는 발끝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다.

‘허점이 전부 보여.’

지금 이 순간, 어느 방향에서 어느 쪽을 향해 검을 휘두르면 라르스를 무너뜨릴 수 있을지 누군가 레이저 포인트라도 쏴 주는 것처럼 눈에 훤히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너뜨릴 적은 라르스가 아니지.’

나는 놀라 굳어 버린 라르스를 뒤로 휙 밀며 허공을 밟고 도약해 깃발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바리스탄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

쁘띠 플뢰르의 본선을 중계하는 마경은 영상을 송신해 줄 뿐인지라 참가자들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해서 깃발잡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겐 성인 남성, 그것도 기사 작위까지 받은 남자 둘에게 치이는 가녀린 소녀 레오노라만이 눈에 밟히듯 들어올 뿐이었다.

“…이번 쁘띠 플뢰르 본선, 하차니아 공녀에게만 너무 불리한 거 아닌가요?”

멜리사 왕녀와의 친분 덕에 딱히 레오노라에게는 호감이 없었던 시베트 자작 부인이 마경을 가리키며 눈살을 찌푸린다.

“지켜 줄 슈발리에도 없이 저 어린아이를 육탄전에 참가시키다뇨.”

레오노라와 비슷한 나이의 제 딸이 생각났는지 그녀의 눈에는 물기까지 어려 있었다.

시베트 자작 부인과 마찬가지로 레오노라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던 귀부인들마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네요. 쁘띠 플뢰르에서 이런 식으로 몸을 쓰는 주제를 선정한 적이 있었나요?”

“차기 사교계의 꽃을 선정하는 대회인데 깃발잡기라니, 좀 이상하긴 했어요.”

시베트 부인의 말을 시작으로 매해 진행되는 쁘띠 플뢰르를 큰 유희로 여겼던 부인들이 일제히 불만을 터뜨린다.

“도대체 누가 본선 주제를 정한 건지… 대회가 끝나고 심사 위원들이 누구인지 밝혀지기만 하면, 단단히 항의를 해야겠어요.”

“그럼요. 쁘띠 플뢰르는 바하무스의 전통인걸요.”

그런 부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카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내 예상대로 대회가 흘러가고 있지 않잖아!’

모드의 슈발리에인 라르스가 레오노라가 아닌 바리스탄만 견제하는 탓에 순식간에 끝날 것이라 예상했던 깃발잡기가 꽤 오래 중계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레오노라를 불쌍하게 여기게 될 거라고!’

마치 그 점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레오노라는 바리스탄이 자신의 몸을 붙잡을 때마다 과하게 움찔하며 마경을 돌아보았다.

‘저 계집애, 분명히 지금 상황을 이용하고 있는 거야!’

카라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는 레오노라의 가련한 모습에 웅성이는 군중들을 돌아보며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됐어. 이기면 그만이야.’

이미 모드에게 단순히 교황 발레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죽이라고 최면을 걸어 놓은 후였다.

‘이번 대회만 모드가 이기면, 내가 교황이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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