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드디어 쁘띠 플뢰르 본선 대회 날이 밝았다.
‘발칙한 아이로구나.’
나는 감히 제국을 삼킬 욕심을 드러내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던 네르바를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신전은 원래 황실과는 딱히 유대감이 없는 곳이지. 그녀의 입장에서 그레고르를 황위에서 끌어내리려는 나를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을 거야.’
아니, 네르바는 분명 나를 돕게 될 거다.
이제 곧 카라가 아이네스와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날 테니까.
“정말 괜찮은 거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리니.”
나는 굳이 구태여 쁘띠 플뢰르의 본선 대회장까지 따라 나와 나를 말리려고 드는 에녹과 실비를 돌아보며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괜찮다니까.”
‘도시락까지 싸 들고 다니며 나를 말리려고 들 줄이야.’
나는 그들이 품에 달랑 안고 있는 도시락을 발견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바닥에 발닦개처럼 깔려 있는 백랑의 기사단장 로더릭 경을 힐끔했다.
“…그런데 로더릭 경은 왜 바닥에 누워 있어?”
“으윽! 고, 공녀님…!”
로더릭은 고통 받는 자신을 유일하게 알은체해 주는 내게 감동 받았다는 듯 눈시울까지 붉히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고, 공녀님께서 데려오신 소년이 갑자기 저를 공격했습니다!”
“응? 설마 히스말이에요?”
로더릭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그의 말대로 목검을 든 채 휙휙 바람 소리가 나게 휘두르는 히스가 눈에 들어온다.
“온전히 검만 사용했습니다, 공녀.”
히스의 목검을 휘감은 오러는 윈터나이츠인 실베스테르의 오러처럼 흰색을 띠지도, 에녹의 것처럼 붉은색을 띠지도 않았다.
폭발할 것 같은 투명한 오러를 사용하는 히스는 누가 봐도 소울나이츠로 보였다.
‘내가 아기 때 했던 것처럼 마나를 집약해 오러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겠지만….’
히스가 지닌 마나의 흐름은 아이네스가 노릴 정도였던 내 마나를 옆에 둬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광활했다.
‘이 정도 강함을 선보이면 사람들에게 전설의 소울나이츠라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어.’
나는 혹시나 본선 대회에 구경 온 사람들에게 히스가 주목받을까 봐 허둥지둥 그에게 달려가 목검을 빼앗아 들었다.
“히스, 네가 강하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니까 내게 그 사실을 증명할 필요는 없어.”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슈발리에로 삼지 않는 겁니까.”
나는 구휼원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조금도 자라지 않은 히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늘 말했잖아. 나는 널 ‘사용’하고 싶지 않아.”
물론 그를 슈발리에로 삼아 본선에 참가하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일 것이다.
사계절의 검이라고 불리는 발탄 자작도 아크레아의 소년왕이자 고대 병기였던 히스를 당해 낼 재간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히스가 대중에게 노출될 거야.’
이번 쁘띠 플뢰르 본선은 히스를 데리고 돌아다녔던 무도회와 달리 전대륙에 마경으로 중계될 만큼 스케일이 컸다.
‘히스가 강력한 힘을 선보여 사람들의 이목을 사게 된다면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도 생겨날 테고, 그렇게 되면 자라지 않는 그에게 의구심을 품는 사람도 분명 생길 테니까.’
“나는 네게 자유를 줬어.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
사실 나는 지금도 히스가 하차니아, 아니, 윌레닌 제국을 떠나 들꽃처럼 자유롭게 흩날리길 바랐다.
“슈발리에는 연회 파트너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네. 공녀는 나에게 자유를 줬습니다.”
내가 뺏어 든 목검을, 날이 무뎌 다칠 위험도 없었는데 조심스레 가져간 히스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리고 나는 선택을 했고.”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히스의 청회색 눈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처럼 오묘한 빛을 띠었다.
계속 바라보고 있노라면 빨려들 것만 같은 묘한 빛에 내가 재빨리 눈을 내리깔자 히스가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쥔다.
“공녀를 위해 살겠다는 선택.”
“…어?”
“그게 내가 선택한 삶입니다.”
속삭이는 히스의 목소리는 소년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의 고백에 내가 얼굴을 붉힐 새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온 에녹과 실비가 그의 양팔을 붙잡아 나와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감히 지금 누구 얼굴에 손을 댄 건가.”
“손 씻어, 당장 손 씻어!”
에녹의 발악 같은 외침에 히스는 평생 손을 씻지 않겠다는 것처럼 제 옆구리에 팔을 숨기며 그들을 뿌리쳤다.
“어, 어쨌든 슈발리에는 안 돼. 그럼 다른 참가자들과 차별점이 없어지잖아.”
나는 나와 거리가 벌어진 히스와 오빠들을 흘깃하며 내가 왜 슈발리에를 선정하지 않았는지 이유를 설명했다.
“이번 대회는 마경으로 전국에 중개된다면서. 내 이름과 우리 가문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릴 기회야.”
여태까지는 신전에서 루카스의 마나를 추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힘을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루카스의 육체도 발견됐고, 더는 내 힘을 숨길 필요가 없어.’
여태 그레고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자행하며 희대의 폭군 노릇을 하면서도 공고히 황권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대체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차니아 공작가가 엄연히 5대 귀족에 속하는 명문가이자, 황실과 대립각을 세울 수도 있을 만한 권력을 자랑하는 가문이라는 걸 만천하에 보여 줘야 해.’
특히 그 과정에서 모드 이아론의 치졸한 면모가 보일 수 있다면 일석이조였고.
나는 모드 이아론이 데려온 슈발리에, 사계절의 검이자 봄의 기사님이라고 불릴 만큼 정중한 기사도를 자랑하는 라르스 발탄에게 다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라르스 경. 평소에 존경하던 기사님을 뵙다니 영광입니다.”
차양에 앉아 부채질을 하는 하녀들을 채근하던 모드와 라르스가 동시에 나를 돌아본다.
“…설마 제가 싸워야 할 대상이 영애인 겁니까.”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구긴 모드와 달리 라르스는 내가 걱정된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문 채 제 이마를 짚었다.
“기사로서 이보다 더한 불명예는 없을 테지요.”
나는 사계절의 검에 속한, 제국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가 왜 모드 이아론의 슈발리에 따위를 자처했는지 알고 있었다.
◈
“뭐? 트리스탄이 모드 이아론의 슈발리에를 맡는 것을 거절했다고?”
아멜리아의 보고에 아이네스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입술을 깨물며 제 책상에 쌓인 서류를 집어던졌다.
“왜! 내 부탁인데 어째서 거절했다는 거야?!”
아이네스는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나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내가 먹으라고 하면 독이 든 사과라도 집어 먹을 애였어. 언제나, 늘!’
이전 생에도, 그 전전 생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글쎄요 트리스탄 님이 ‘레이디’로 모실 분은 따로 있다면서 거절하셨어요.”
“레이디? 트리스탄은 아직 성인도 아닌데 도대체 누가 트리스탄의 레이디라는 거야?”
소년 기사는 레이디를 섬기지 않는다. 기사들이 섬길 레이디를 정하는 건 대개 성년이 된 이후였다.
“그 ‘레이디’라는 여자가 누군지 찾아와.”
“어쩌시게요?”
“죽여 버려야지. 감히 내 것을 탐냈으니까.”
아이네스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죄 없는 아멜리아의 머리채를 붙들었다.
“아악! 정말 짜증 나 죽겠어! 이번 생은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고!”
아이네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멜리아는 그녀의 주군이 다시 한 번 제게 단지(斷指)를 명할까 두려워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럼 모드 이아론의 슈발리에는 어떻게 선정할까요?”
“라르스 발탄에게 기별을 보내. 이번에 날 돕는다면 정말로 여동생의 병을 치료할 엘릭서를 내주겠다고.”
물론 아이네스에게도 필요한 엘릭서를 라르스에게 주겠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엉터리 물약이라도 허겁지겁 받아 갈걸. 오늘내일하는 여동생 때문에 애가 닳았을 테니까.”
아멜리아는 악독한 아이네스의 말에 속으로만 혀를 찼다.
◈
‘그 레이디라는 거, 설마 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솔로아 공작령으로 돌아가 꽤 오래 보지 못한 트리스탄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나를 레이디로 섬기겠다고 고집 부린 건 애들 장난 같은 거였으니까.’
“왜 슈발리에를 선발하지 않은 겁니까. 행여나 다치면 어쩌려고요.”
나는 아픈 여동생을 위해 관심도 없는 쁘띠 플뢰르에 참가한 라르스를 힐끔하며 방긋 웃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부디 경도 조심하시길 바라요.”
여덟 살 어린 여자아이에 의해 자신이 다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라르스가 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는다.
“고맙습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라르스의 연한 분홍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린다. 과연 봄의 기사님이라고 불릴 만한 미모다.
“오랜만이군, 하차니아 공녀.”
눈을 정화시켜 주는 라르스의 뒤로 휙 튀어나온 인영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인간이 스텔라의 슈발리에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