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너, 정체가 뭐니?”
동그란 바 의자 위로 주저앉듯 무너진 이본느가 나를 올려다본다.
“아이를 가지고 나를 협박할 셈이야?”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프레데릭의 초상화를 품에 안은 이본느는 제국 최대 정보 길드의 수장답게 금세 차분함을 되찾고 나를 돌아보았다.
“나, 레이디 이베트를? 감히?”
나는 반가면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명민한 녹안을 마주한 채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아이에 불과한 제가 감히 황비 전하를 협박할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내 정체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이본느는 내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가면을 집어 던졌다.
드러난 황비의 얼굴은 소문처럼 휘황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평온함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저는 그레고르 황제를 무너뜨리고 싶어요.”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말이니?”
“그레고르 황제는 역사에 기록될 폭군이에요.”
나는 미인이라면 상대의 의지에 상관없이 손에 넣고 말아야 하는 파멸적인 소유욕, 상대가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인지하지 않는 아둔함을 두루 갖춘 황제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지배자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황비 전하 한 분뿐이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넌 네 말대로 아이에 불과해. 그레고르 폐하를 바른길로 이끄는 건 황실 어른들의 몫이지, 네 몫이 아니란다.”
그레고르는 갱생이 불가능했다.
원작에서 폭군이었던 그레고르를 교화시킬 수 있었던 아이네스가 글러 먹었으니까.
“브리넨 구휼원을 습격한 건 타국의 괴한도, 브리넨 후작가에게 원한을 품은 귀족이 아닌 저예요. 제가 그랬어요.”
이미 몇 년이나 지난 범죄를 고백하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이본느가 비스듬히 고개를 꺾는다.
“이유가 무엇이었지?”
“황실과 5대 귀족에 속한 브리넨 후작가와 솔로아 공작가가 갈 곳 잃은 아이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나는 지금도 쉬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구휼원의 악몽을 떠올리곤 했다.
“제국이 뿌리부터 썩었다는 사실을 황비의 자리에 오른 전하께서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 네 추측대로 나는 황제와 황실을 증오한단다. 하면 너는 어찌 황실을 증오하는 거니?”
나는 이본느의 물음에 망설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정보 길드의 수장이었으니 이미 아이네스와 나의 관계 정도는 파악했을 거야.’
아이네스가 생일 연회에서 나를 배동으로 삼고 싶다 그리 억지를 부렸으니 모를 리 없었다.
“…황실이 구휼원 아이들을 착취했던 것처럼, 아이네스도 저를 이용하려고 해요.”
내 말에 이본느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래. 이본느는 아이네스의 정체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겠지.’
원작 책이 자세히 묘사하고 있진 않았지만, 아이네스는 착실하게 황실 내에서 이본느를 괴롭히는 중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는 네 역심을 폐하께 발고하고 그 상으로 황실을 벗어날 수도 있어.”
나는 무표정한 이본느의 얼굴을 마주한 채 침을 꼴깍 삼켰다.
“황비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하세요. 단,”
“역시 내 아이를 인질로 잡아 나를 협박할 셈이로구나.”
나는 내 말을 끊어 내며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이본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뇨.”
“…뭐?”
“전하의 협조와는 상관없이 프레데릭은 황비 전하 품에 돌아가게 할 거예요.”
이본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러 하는 말이 아닌, 내 진심이었다.
“아이는 보호자의 품 안에서 보호받고, 또 사랑받는 게 마땅하니까요.”
그건 가스파르가 이번 생에 내게 알려 준 유일한 가치나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이렇게나 애타게 자신을 찾고 있는데 모자(母子) 사이를 갈라놓을 순 없어.’
유일하게 쥐고 있던 패를 던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제 이본느가 나를 도와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나와 손을 잡을 거야.’
나는 이본느를 믿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본느가 그레고르와 아이네스에게 품었을 앙심을.
“좋아. 내가 프레데릭을 되찾아준 은인인 너를 위해 뭘 해 주면 되겠니, 맹랑한 꼬마 아가씨?”
내 예상대로 이본느는 매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하차니아가 자르파라 상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그래.”
“저희 상단이 이베트 부인이 운영하는 정보 길드에서 수집하는 정보를 선점하고 싶어요.”
“하지만 네가 알아낸 대로 이베트 부인의 정보 길드는 프레데릭을 찾기 위해서였어. 길드는 내게 더는 의미가 없단다.”
“하지만 그레고르에게 대항하기 위해 필요할 거예요.”
나는 쉬고싶다는 듯 피로가 눅진하게 뒤덮인 얼굴을 쓸어내리는 이본느를 바로 응시하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황비 전하, 저는 그레고르를 황좌에서 끌어내리고 제국을 뒤엎을 생각이에요.”
* * *
이본느와의 대화를 마치고 지휘실을 나선 나는 멜리사 왕녀와 클라하 부인을 위시한 귀부인들이 내가 예산을 초과했으니 당연히 탈락할 것이라며 분위기를 주도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요즘 레오노라 공녀와 관련해서 구설수가 많네요.”
“그러고 보니 마담 아그네스의 살롱도 표절 논란에 휘말렸잖아요? 공녀의 외조모였죠.”
“말만 외조모지, 후작에게 이혼당했잖아요?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요.”
나는 멜리사 왕녀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주장대로라면 나는 티에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그럼 그녀의 논란과도 상관이 없는 거 아닌가?
‘물론 티에리는 내 할머니가 맞지만.’
혈연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티에리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노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왕녀님, 왕녀님이 저를 걱정해 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뭐?”
“저는 예산을 초과한 적이 없으니까요.”
“방금 공녀가 이베트 부인에게 건네는 목걸이를 목격한 사람만 수십 명이에요. 이 목걸이만 해도 100골드가 넘는 가치를 지녔을 텐데요?”
나는 멜리사 왕녀의 말에 활짝 웃으며 마침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답례품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로 만든 이 목걸이 말씀하시는 거죠? 역시 왕녀님이세요. 보석에 조예가 깊으신가 봐요.”
“당연하죠. 나는 보석 감정사 자격증도 있으니까요.”
사교계의 꽃 자리를 유지하려면 유행을 선도해야 했다.
“대단하세요, 왕녀님! 그럼 감정사 자격증도 가지고 계시는 왕녀님이 보시기에 이 목걸이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가요?”
나는 멜리사 왕녀가 보석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게스트들이 목걸이를 볼 수 있도록 왕녀 근처 선상에 올라섰다.
“컷팅의 질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지만, 원석 본연의 광채가 뛰어나서 적어도 700골드 이하로는 값을 매길 수 없을 것 같네요.”
세공사에게 맡긴 게 아니라 공방에서 제작한 목걸이였으니 컷팅이 완벽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그런데도 700골드나 쳐 준다고?’
내 답례품 목걸이의 가격을 부러 높이 불러서 내가 얼마나 크게 규정을 어겼는지 사람들에게 알릴 심산인 듯싶었다.
나는 멜리사의 뻔한 술수에 눈을 가늘게 뜨며 어깨를 으쓱했다.
“천연 다이아몬드라면 그 정도 가격이 나오겠죠. 하지만 제가 여러분들에게 선물한 목걸이는 인공 다이아몬드랍니다!”
“…인공 다이아몬드? 그런 게 존재했나요?”
“하차니아 공작가에서 운영하는 제랄드 아티팩트 공방에서 이번에 개발한 신제품이에요!”
나는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천연덕스럽게 활짝 웃으며 멜리사 왕녀에게 빼앗은 목걸이를 이리저리 휘둘러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았다.
“천연 다이아몬드와 광채와 강도, 열전도율까지 흡사한 인조 보석이랍니다.”
“세상에! 이 보석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니 믿기지 않아요.”
내 설명에 각자 손에 든 목걸이를 내려다본 귀부인들이 제각기 감탄을 터뜨린다.
“잠깐만. 그, 그럼 결국 가짜라는 말이잖아요? 레이디 티에리에게 사사받았다더니 못된 것만 배웠군요, 공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에 당황한 멜리사가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앞으로 나선다.
“마담 아그네스도 신인 디자이너의 디자인을 빼앗아서 살롱을 오픈했다더니, 가짜가 가짜를 키운 셈이네요!”
“왕녀님, 혹시 그 불쌍한 신인 디자이너의 이름을 아시나요?”
“일간특급에서 매일 떠드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나요? 코코 리베라잖아요!”
나는 멜리사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 방긋 웃으며 뒤를 돌았다.
“코코, 이제 앞으로 나올래?”
내 말에 지휘실 뒤에 숨어 있던 코코 리베라, <아.황.장>에서는 아이네스를 위해 살롱을 운영했던 천재 디자이너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티에리와 코코의 합작인 인공 다이아몬드로 자수를 놓은 눈부신 드레스를 품에 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