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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05)화 (340/486)

제105화

회귀해 같은 삶을 반복한다지만, 반복하는 모든 날이 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는 건 처음이야.’

이번에야말로 제 인생의 목표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아이네스는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초조하게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상황은 알아 왔어, 카라?”

추기경조차 제 발아래 둔 듯이 거만한 황녀의 태도에 카라는 몸을 움찔했지만, 티 내지 않고 목을 가다듬었다.

“크흠, 루카스의 영혼이 깃든 몸이 가스파르 공작일 수도 있으리란 황녀 전하의 추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카라는 아이네스의 눈치를 보며 모드의 말을 떠올렸다.

“모드 말로는 전에 만난 제 외숙부와는 영 다른 사람처럼 군다고 해요. 하차니아 영지로 보낸 신관들의 보고도 비슷했고요.”

“그럴 줄 알았어. 하차니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니까.”

카라의 말에 이를 까득 깨문 아이네스는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여태 날 방해한 게 루카스 그 자식이었던 거야!”

“…저주를 건 육체라 제 힘으로도 파괴할 수가 없어서 그의 얼굴에 집착하는 멜리사 왕녀에게 던져 준 게 실수였던 걸까요.”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아이네스의 얼굴을 힐끔한 카라는 난감한 입을 벌렸다.

“혹시라도 교황이 육체를 정화하는 데 성공하면 정말 큰일인데요.”

“절대 안 돼. 아빠가 황위에 오르기 전에는 루카스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꽤 많았단 말이야. 의식을 찾기 전에 없애 버려야 해.”

제국 최강의 흑주술사라고 자부하는 카라가 직접 건 저주였지만, 교황 발레리는 역대 교황 중 가장 강대한 성력을 자랑하는 교황이었다.

‘정신력이라도 무너뜨리기 위해 쉬이 잠에 들지 못하게 하는 저주를 걸었지만, 저주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요즘 점점 생기를 되찾아 가는 듯 보이는 발레리의 얼굴을 떠올린 카라는 고운 미간을 좁혔다.

“교황이 보관하고 있는 루카스 황자의 몸을 빼 오는 게 관건입니다. 하지만 발레리가 그리 허술한 사람이 아닌데 어쩌지요.”

“…쁘띠 플뢰르에 선발된 소녀에게 축배를 내리는 게 교황의 일이었지?”

고민하듯 말을 머뭇거리는 카라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이네스가 입꼬리를 들어 올려 천진한 미소를 만들어냈다.

“모드를 어떻게든 쁘띠 플뢰르로 만들어. 축배를 내리는 순간에는 성력으로 제 몸을 보호할 수 없을 테니까 그때 모드가 교황을 공격하면 되겠네.”

죽이진 못해도 적어도 다치게는 만들 수 있겠지.

피를 잔뜩 흘리며 쓰러지는 발레리를 상상한 아이네스는 신이 나서 발을 굴렀다.

‘감히 날 배신하고 레오노라에게 붙어? 나도 너 같은 교황 필요 없어.’

전에 한 번 죽게 내버려 두긴 했지만, 이번 생에는 불면증까지 치료해 주기로 마음을 넓게 먹었었는데!

아이네스는 자신을 찾지 않는 이번 생의 발레리가 너무 괘씸했다.

“하지만 모드는 소심한 구석이 있는 아이라 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교황을 공격할 결심을 하지는 못할 텐데요.”

“저주를 걸든 아티팩트를 쓰든 어떻게 해서든 조종해. 흑주술사인 네겐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제 또래 아이에게 저주를 걸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은 아이네스는 찡그린 얼굴 그대로 카라를 향해 턱을 들었다.

“너, 지금 내 말에 반박한 거야?”

“아,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황녀 전하.”

“네가 다음 대 교황이 되고 말고는 내 손에 달려 있다는 걸 명심해. 추기경인 네가 흑주술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너를 신관 취급이나 해 줄 것 같아?”

“황녀 전하의 뜻대로 모드를 흑주술로 조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멍청해서 마음에 차지 않는 시동이긴 했다.

예쁘장한 얼굴 말고는 쓸모가 없는 모드를 떠올린 카라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네스가 뚱한 입을 다시금 벌린다.

“루카스의 육체는 파괴할 수 없다면 다시 멜리사 왕녀에게 던져 줘. 그만한 집착이면 다시는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겠지.”

멜리사가 루카스의 육체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난 건 아이네스가 무수히 회귀하는 삶 속에서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한 광기였으니까.

‘루카스 황자에게 단단히 미친 여자니까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강구해 낼 거야.’

저주를 풀어 줄 수도 없고 완전히 숨통을 끊을 수도 없는 루카스의 육체는 여러모로 아이네스의 골치를 아프게 했다.

“이제 멜리사 왕녀는 완전히 몰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황자 전하의 몸을 숨길 수 있을까요?”

추기경인 카라가 네르바와 마크를 설득해 파티나 대신전에서 멜리사 왕녀와 어울려 주고 있긴 했지만, 한 번 망가진 왕녀의 평판은 쉬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다시 사교계의 꽃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될 거 아냐?”

카라의 말에 인상을 찡그린 아이네스는 테이블 옆 서랍을 뒤적여 벨벳 끈으로 묶인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퍽!

추기경의 얼굴을 후려치고 떨어진 묵직한 주머니에서 번쩍번쩍 빛을 내는 금화가 흘러나온다.

“일간특급을 발행하는 발렌타인사의 사장에게 뇌물을 잔뜩 먹이면 될 일이라고.”

일곱 살 아이 머릿속에서 나올 만한 계획은 도저히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라는 붉게 물든 제 뺨을 쓸며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주워들 뿐이었다.

“아, 여론을 바꿀 만한 먹잇감으로 레오노라를 던져 주면 되겠네.”

알렉 발렌타인은 싸구려 타블로이드지나 발행하는 신문사의 주인답게 돈과 가십을 좋아했다.

“잘하면 공녀가 사생아라는 소문을 기정사실화할 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제 기분 나쁘다고 사람에게 음식을 집어 던질 만큼 난폭한 애야. 가십거리는 많을 거라고.”

레오노라가 카멜리아의 뺨을 스파게티로 후려갈겼던 일화를 떠올린 아이네스는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악명을 퍼뜨리면 돼.”

“아직 어린 소녀이긴 하지만 다른 영애들의 선망을 받는 것 같던데 그 방법이 먹힐까요?”

카라의 말에 아이네스는 혀를 끌끌 찼다.

‘이래서 사교계를 모르는 애들은 부리기가 성가시다니까.’

“선망과 질투는 종이 한 장 차이야. 팬이 많으면 적도 많은 법이지.”

쁘띠 플뢰르부터 사교계의 꽃 자리까지.

가장 치열한 수도 사교계의 정점에 몇 번이고 올랐었던 아이네스는 사교계 인간들의 시기심이 얼마나 지독한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레오노라를 사교계에서 무너뜨리려면 일단 마담 아그네스의 살롱부터 망가뜨려야 할 거야.”

안 그래도 자신이 펼칠 의류 사업을 먼저 선점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그네스 살롱이 마음에 들지 않는 차였다.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손뼉을 맞부딪히는 아이네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카라가 의아한 고개를 기울인다.

“지금 제국에서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살롱인데 어떻게 무너뜨리시게요?”

“아그네스 티에리는 디자인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아마추어 디자이너야. 그런 사람이 혼자 모든 드레스를 디자인할 수 있었을 리 없잖아?”

아카데미에서도, 학술원에서도 레이디 티에리는 예법이나 역사를 전공했지 의복을 전공한 적이 없었다.

‘분명 표절을 했을 거야. 내가 전생에 코코를 시켜서 신인 디자이너들의 디자인을 빼앗았던 것처럼.’

만약 아그네스 티에리의 디자인이 전부 오리지널이라면 그녀가 천재라는 소리였는데, 아그네스 티에리는 아이네스의 눈에 한 번도 띈 적이 없는 범재에 불과했다.

“아그네스 살롱의 피해자를 찾아봐.”

“네. 하지만 만약 없으면 어떡하죠?”

“그럼 디자인을 카피당한 불쌍한 신인 디자이너를 만들면 될 거 아냐?”

카라의 질문이 쓸모 없다는 듯 피식 웃은 아이네스는 아직 닫히지 않은 서랍에서 다시금 금화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마침 쓸 만한 애가 있어. 코코라고.”

카라는 아이네스가 건네주는 금화 주머니를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정말 죄송해요. 저는 정말 사장님을 뜯어말리고 싶었는데….”

나는 면구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일간특급의 기자, 써머 소르베가 내민 신문의 헤드라인을 흘깃했다.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사교계에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소녀의 진실?!]

두둥!

북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굵은 글씨체에 헛웃음이 나온다.

멜리사 다음 타깃이 나인 걸까.

‘하지만 이상하네. 나는 사교계의 가십거리가 되기엔 너무 어린데.’

게다가 이제 막 황도에 올라온 데다 쁘띠 플뢰르로 선발된 소녀도 아니었으니 유명세가 남다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누군가 사장님께 뇌물을 먹이고 공녀님을 공격하라고 사주라도 한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확신을 담은 써머의 눈빛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 여태껏 공녀님을 찬양하는 기사만 냈었는데, 갑자기 공격하는 기사가 뜨면 아무리 저희 ‘일간특급’이 가십지라도 수상하게 여길 구독자들이 생길 테니까요.”

신문은 기본적으로 구독자들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써머의 설명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원작은 들여다보지 않았지만, 아이네스겠지.’

이제 네 수는 뻔하단다, 여주야.

“쁘띠 플뢰르 선발전에 참가하겠다고 막 결정을 내리셨다고 들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제가 너무 죄송하네요…. 어떡하죠?”

나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인 써머를 달래며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아니, 오히려 잘됐어.”

내 이름을 가십지 특집까지 제작해 널리 널리 퍼뜨려 주다니 아이네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이건 완전히 내 계획을 도와주고 있는 수준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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