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아티팩트 두 개를 합쳐서 더 강한 아티팩트를 만들 수 있는 기능이 있다고?”
“예, 빛이시여. 하지만 이 셉터는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되는 종류의 아티팩트일 겁니다.”
정원에 떨어진 자르파라를 주워 셉터의 기능을 다시 한번 확인한 나는 흐응, 작은 신음을 흘렸다.
‘제랄드에게 넘겨서 아티팩트 제작에 쓰려고 했는데 그건 안 되겠네.’
내가 가진 아티팩트 중 가장 쓸모있는 것을 골라 강화시키는 게 제일 유용하겠다는 생각에 나는 느릿느릿 턱을 쓸었다.
‘공격용이라면 내 방대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바주카포가 제일일 거고….’
현재 가장 활용도가 높은 아티팩트라면, 아티팩트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원작책이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선지 더는 아이네스의 상황을 내게 알려 주지 않고 있는 원작책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리다 자르파라를 돌아봤다.
“알려 줘서 고마워. 이제 나가 봐, 자르파라.”
“제가 혹시 침실 바로 앞 복도에 서 있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태양이시여?”
“응? 왜?”
“왕께서 제게 해코지를 하실까 염려되어서….”
나는 말끝을 흐리는 자르파라의 말에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바람으로 날린 건 실수였대. 히스가 자르파라를 일부러 공격했을 리가 없잖아.”
히스는 마도 왕국 아크레아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법사였지만, 마법을 사용한 지가 너무 오래되어 컨트롤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했다.
“히스 착한 거, 아크레아인인 자르파라가 제일 잘 알면서.”
“…아, 예. 알겠습니다, 빛이시여. 그래도 전 복도가 좋아서 밖에 서 있겠습니다. 무슨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나와 주시길.”
나는 자르파라의 간곡한 부탁에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인 후 머뭇머뭇 방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힐끔했다.
‘거상(巨商) 소리를 들으면서 자르파라도 은근 겁이 많다니까. 히스만큼 순한 애가 어디 있다고.’
그녀가 완전히 방을 나서고 나서야 원작을 펼쳐 든 나는,
◈
“레오노라, 레오노라 하차니아라….”
반드시 xxx해 버리겠어.
◈
라며 아이네스가 이를 부득 가는 장면을 셉터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표지의 오망성을 장식하는 꼭짓점 중 비어 있던 부분이 은은한 보라색으로 발광하는 것이 아닌가.
‘강화하는 데 두 개의 아티팩트가 필요하다고 해서 딱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는 허공에 떠올라 혼자서 호로록 넘겨지는 원작의 종잇장을 올려다보다 헤 입을 벌렸다.
‘트리스탄이나 벨루치의 외전이 생성되었을 때랑 비슷하네.’
강화된 원작에는 어떤 캐릭터의 외전이 추가되는 걸까.
호기심에 눈을 빛낸 나는 이내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원작을 재빨리 받아 들었다.
‘어디 보자.’
연보라색으로 물든 외전 부록의 이름은…….
“레오노라?”
나는 어디선가 많이 본, 익숙하다 못해 귀에 붙은 이름 넉 자에 인상을 찡그렸다.
◈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이름만큼이나 하찮은 소녀의 별명은 아이네스의 마나통이었다.
“레오노라, 오늘도 나랑 같이 잘 거지?”
“네, 전하.”
소녀는 아이네스와 붙어 있는 동안 제 마나가 그녀에게 흡수되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노라는 내 유일한 친구야. 넌 나를 절대 배신하면 안 돼.”
“제가 어떻게 황녀 전하를 배신할 수 있겠어요. 별궁에 유폐된 제게 다가와 주신 유일한 분이신데.”
아이네스의 명령 비슷한 말에 레오노라가 우물쭈물 입을 연다.
자신에게 완전히 길들여진 소녀를 흐뭇한 시선으로 내려다본 아이네스는 히죽 웃으며 레오노라의 결 좋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래, 너한테는 나밖에 없어.”
“네, 전하.”
“그 사실을 언제든 잊으면 안 돼, 레오노라.”
다음 생에도.
또 그 다음 생에도 말이야.
아이네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말을 레오노라는 이해하지 못했다.
◈
‘다른 외전처럼 현재나 미래의 내 상황이 전개되는 건 아닌 모양이네.’
한 장을 겨우 채울 정도로 짧은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의 외전을 읽어 내린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책을 덮었다.
‘이건 과거일 거야. 레오노라의 전생 같은 거겠지.’
주인공인 아이네스가 회귀자였으니 ‘내’ 영혼이 깃들지 않은 레오노라의 전생이 존재하는 건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다.
“…이렇게까지 이용당했을 줄은 몰랐지만.”
레오노라의 비참한 과거를 알게 된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보라색으로 물든 오망성의 꼭짓점을 노려보았다.
‘엑스트라라는 이유로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도 되는 거야?’
레오노라라는 캐릭터는 아이네스의 꽃길을 위해 존재하는 부속품처럼 다뤄지고 있지 않은가.
“이번 생은 절대 그렇게 되게 만들지 않을 거야.”
나의 안위를 위해서도 위해서였지만, 일전에 존재했던 레오노라를 위해서라도 더는 주인공에게 억울하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트리스탄의 루비, 벨루치의 시트린, 카렌의 페리도트, 그리고 레오노라의 자수정으로 채워진 원작의 표지를 손끝으로 훑어내렸다.
‘이제 하나 남았어.’
꼭짓점을 하나씩 채워 나갈 때마다 외전에 수록된 캐릭터가 늘어나고 있었다.
‘마지막 꼭짓점을 채울 인물이 누구인지는 대충 알 것 같기도 하지만….’
그전에 강화를 시작해 볼까.
‘히스만큼은 아니더라도 강력한 힘을 손에 넣고 싶어.’
재력은 어느 정도 준비했으니까 주인공에게 대적하기 위해 내게 필요한 건 이제 무력뿐이었다.
힘없는 엑스트라에서 원작 최강의 빌런으로 탈바꿈하겠다는 결심은 이미 오래전에 끝냈다.
‘아빠도 오빠들도 내가 지키고 말 거야.’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나는 침대 밑에 숨겨 놨던 바주카포를 꺼내 원작 옆에 내려놓았다.
한 번 사용하면 소멸된다고 했는데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레오노라의 외전을 여는 것은 셉터의 기능을 완전히 사용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백금으로 만들어진 셉터의 기둥을 단단하게 붙잡은 나는 루카스에게 배운 대로 아티팩트에 마나를 조금씩 흘려 넣었다.
우우웅-!
그러자 셉터가 옅게 진동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바주카포와 원작을 향해 희붐한 빛을 내뿜기 시작한다.
곧 원작 표지를 장식하는 오망성의 빛이 민트색 바주카포에 스며들었다.
‘응? 이게 끝이야?’
나는 제 할 일을 끝마쳤다는 듯 공중에 부스스 흩어지는 셉터를 노려보다 허망한 목소리를 높였다.
“장식 좀 달린 게 다잖아!”
아티팩트를 강화시켜 준다더니 원작과 바주카포가 합쳐지긴커녕 표지를 장식하던 보석이 반으로 쪼개져 바주카포 주둥이에 옮겨 붙었을 뿐이었다.
나는 전보다 조금 더 예뻐진 바주카포의 모습을 살펴보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무기가 예뻐서 뭐하냐고….”
물론 아크레아의 바주카포는 사용자의 마나로 마탄을 형성해 쏠 수 있는 아티팩트라 원래도 강력한 무기였지만, 내게 필요한 건 제국의 황녀, 아니 이 세계 최강자인 듯 보이는 회귀자와 대적할 만큼 강력한 무기였다.
‘그래도 마탄 자체가 강력해졌을지 모르니까 한번 쏴 보기는 해 볼까.’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나는 바주카포를 어깨에 얹은 채 황도 근처 숲으로 워프했다.
‘보석을 만지면 빛이 나는 거 보니까 기능이 추가된 것 같기는 한데.’
시험 삼아 트리스탄의 붉은 보석을 꾹 누르자 주둥이에 달린 루비가 새빨갛게 발광하기 시작한다.
나는 번쩍번쩍 붉게 빛나는 바주카포의 주둥이를 공터를 향해 돌린 채 방아쇠를 잡아당겼다.
쿵-!!!
아주 소량의 마나를 주입했기에 마탄 자체의 크기는 작았지만, 전과 달라진 점이 분명하게 눈에 띈다.
‘방금 날아간 거 분명 써머나이츠의 오러였어.’
내 마나로 만든 마탄은 특성이 없는 술자의 것이라 투명한 빛에 가까운 흰색이었다.
“설마 트리스탄의 능력을 내가 쓸 수 있게 된 건가?”
‘하지만 벨루치나 카렌은 소울나이츠가 아니었는데?’
그럼 다른 보석들은 무슨 마탄을 생성해 내는 걸까.
벨루치의 노란 보석, 시트린을 꾹 누른 나는 다시금 공터를 향해 마탄을 발사했다.
푸쉬쉭-
트리스탄의 마탄과 달리 벨루치의 마탄은 공격력이 전혀 없어 보였다.
대신 바주카포 입구에서 어디선가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가 올라온다.
‘웬 향기…? 향수로 쓰라는 거야, 뭐야.’
향기와 함께 곧 내 주위로 샛노란 연기가 퍼지더니 숲속 동물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끼잉, 낑.”
“짹짹, 짹!”
다가온 동물들은 사슴이든 참새든 종족 상관없이 전부 눈에 하트가 뿅뿅 차올라 있었다.
‘……페로몬? 이거 페로몬 아니야?!’
여덟 살 응애에게 이런 능력은 필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