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01)화 (336/486)

제101화

“죄, 죄송해요.”

에녹의 격한 반응에 모드는 당황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내가 손까지 잡아 줬는데 싫어하시는 것 같지?’

그러다 열이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에녹의 뺨을 발견한 모드는 후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싱긋 웃었다.

‘아아. 부끄러워하시는 거구나.’

모드의 아빠인 실뱅의 말에 따르면 하차니아 공자들은 ‘검밖에 모르는 멍청이들’이었으니까.

‘가벼운 악수에도 수줍음을 타는 것 정도는 내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야지.’

빠르게 판단한 모드는 자신을 신경질적으로 노려보는 에녹을 향해 후후 웃어 보였다.

“왜 기분 나쁘게 웃고 지랄이야?”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해요.”

‘어머니가 사내아이들은 예쁜 여자아이에게 유독 짖궂게 굴 때가 있다고 하셨어.’

에녹이 살벌하게 모드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혼자 판단을 마친 모드의 눈에는 에녹의 짜증이 보이지도 않았다.

“실베스테르 오라버니도 오랜만이에요.”

“그래.”

에녹과 달리 실베스테르는 사촌 누이인 그녀를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점잖은 실비 오라버니는 나를 반겨주시잖아.’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준 것뿐이지만, 모드는 그의 무심한 태도 속에 가려진 기꺼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부끄러움이 많으신 오라버니들이네.’

시큰둥한 그들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모드는 티 내지 않고 중앙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인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모부!’

현관에 들어서는 가스파르는 그녀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멋있었다.

애가 넷이나 되는 유부남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젊고 휘황한 외모, 떡 벌어진 어깨와 셔츠를 팽팽하게 당길 정도로 발달한 가슴 근육.

‘역시 역대 최고의 쉐도우나이츠라는 평가를 받으시는 고모부다우셔!’

모드는 불룩 튀어나온 배를 혁대로 애써 감추고 있는 실뱅과 척 보기에도 갈라진 복근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가스파르를 번갈아 바라보다 콧잔등을 움찔했다.

‘하아. 저렇게 멋진 고모부가 내 아빠였으면 좋겠다.’

모드는 제 소망이 곧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양손을 맞잡은 채 두 눈을 반짝였다.

‘어차피 레오노라는 고모부의 딸도 아니잖아?’

그럼 가스파르에게는 시커먼 아들만 세 명인 셈이니 자신처럼 깜찍한 소녀를 딸로 삼고 싶어 할 수도 있었다.

‘가여운 고모부…. 레오노라를 볼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쓰라리실까.’

모드는 어느새 실비의 품에 안겨 하품을 하고 있는 뻔뻔한 레오노라를 향해 눈을 흘겼다.

‘고모부는 다정하고 상냥하시니까 불륜으로 태어난 사생아조차 내다 버리지 못하시는 거겠지.’

레오노라는 노엘 이아론의 실수, 즉 이아론 후작가의 흠결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후작 영애인 자신이 처리하는 게 순리일지도 모르겠다.

‘좋아. 내가 고모부와 오라버니들을 위해서 레오노라를 공작가에서 내쫓겠어!’

결심한 모드는 자신과 실뱅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가스파르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제국의 가장 깊은 혼암의 그림자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가스파르.”

자신을 알은체하는 모드와 실뱅을 슥 훑어본 공작이 천천히 손을 움직인다.

“이아론 후작가에서 온 건가.”

실뱅의 칼라에 붙은 후작가의 문양을 흘깃한 그는 재킷 안을 뒤적이더니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보나 마나 또 구걸이나 하러 온 거겠지.”

은화가 찰랑이는 매끄러운 소리가 순간적으로 침묵이 찾아든 현관을 울린다.

“이거나 갖고 꺼져. 귀찮으니까.”

툭.

가스파르의 축객령과 함께 실뱅의 발치에 은화 몇 닢이 든 주머니가 떨어졌다.

“이, 이 무슨…! 지금 나를 뭘로 보고!”

실뱅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든 말든, 실베스테르의 품에 안겨 있던 레오노라를 빼앗아 든 공작은 소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한탄을 시작했다.

“어제는 왜 혼자 잔 거지?”

“연회에서 너무 늦게 돌아와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날 죽일 셈인가.”

“……하루 혼자 잔다고 안 죽어요, 아빠.”

제게 얼굴을 부비는 공작이 귀찮다는 듯 레오노라가 그를 밀어내며 작게 인상을 찡그린다.

‘지, 지금 내 인사를 무시하신 거야?’

자신의 존재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가스파르의 태도에 모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뭔가 잘못됐어. 모드가 바로 잡아야 해!’

* * *

이아론 후작이 내놓은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실뱅을 내쫓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루카스를 설득해 모드가 하차니아의 수도 저택에 머물 수 있도록 했다.

“모드는 반드시 쁘띠 플뢰르로 선발될 거예요! 모드는 카라칼라 추기경의 시동이기도 한걸요!”

모드가 추기경 카라의 시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멜리사를 부추기고 있는 건 분명 카라였어.’

언뜻 상냥하게 상담을 해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절대로 멜리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이 아니었다.

‘황제의 파탄 난 인성을 추기경인 그녀가 모를 리 없을 텐데 그의 자비를 구걸하라고 하는 게 이상하잖아.’

그레고르라면 제게 매달리는 멜리사를 질색하며 떨쳐내면 떨쳐냈지, 절대로 도와줄 만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모드를 통해 카라에게 접근할 계획을 세운 나는 홍차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자르파라가 직접 타국에서 공수해 온 얼그레이를 홀짝이며 건너편에 앉은 아이를 힐긋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 있어도 괜찮아? 추기경 예하의 시동이라면서.”

시동은 늘 신관 곁을 지켜야 하니 카라가 머무는 대신전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시동이라고 꼭 24시간 예하와 붙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야. 기본 상식인데 모르는 모양이네?”

나는 내 무식이 놀랍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드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모드의 비아냥에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지만,

‘교황이 제 시동은 늘 제 곁을 밤낮으로 지켜야 한다고 했었는데!’

발레리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닫고 말았으니까.

‘뭔 놈의 성직자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

“아무튼, 내가 쁘띠 플뢰르로 선발되면 공작가에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야. 감사 인사는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할 생각 없었어!”

“그럴 줄 알았어. 너는 예의가 없으니까.”

“하지만 모드, 아직 쁘띠 플뢰르로 뽑히지도 않았잖아. 리니는 여러모로 모드가 걱정돼.”

나는 모드의 말투를 따라 하며 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어 턱을 얹었다.

“그러다 선발되지 못하면 어떡해? 리니 같으면 창피해서 고개도 못 들고 다닐 거야.”

내 말에 모드는 순간적으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티테이블 근처에서 팔굽혀펴기-내가 시킨 오늘치 훈련의 일부-를 하고 있는 에녹과 실비를 의식한 듯 가련한 표정을 지어냈다.

“……왜 레오노라는 사촌인 모드에게 그렇게 나쁘게 말하는 거야? 흐읍!”

모드가 과장되게 울음을 터뜨린 탓에 땀을 뻘뻘 흘려 가며 훈련에 집중하던 에녹과 실비의 시선이 티테이블에 집중되었다.

얼그레이와 어울리는 고소한 버터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먹는 나를 발견한 형제가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흐윽, 레오노라는 처음부터 모드를 싫어했던 것 같아. 나만 보면 매서운 눈초리를 하잖아!”

에녹과 실비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모드의 울음소리도 커져갔다.

‘나 원래 눈꼬리 올라갔는데.’

변명해줄 수도 있었지만,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촌 언니, 게다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요상한 화법을 자꾸만 시전하는 모드가 울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너무 하수라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도 딱히 호감 가는 애는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모드가 카라를 만나기 전에 도청기 아티팩트를 착용하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추적기와 달리 도청기 아티팩트는 마정석의 크기가 커서 애 몸에 몰래 붙일 수가 없었다.

‘고민이네.’

“끄응.”

작게 신음을 흘리는데 어느새 티테이블 코앞까지 다가온 실비가 번쩍 손을 들어 테이블을 내려친다.

“무슨 일이지.”

차가운 실비의 목소리는 마치 누군가를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

“시, 실비 오라버니….”

그의 손등에 손을 얹은 모드가 울먹이며 입술을 꾹 깨문다.

“모드는, 끄윽, 괜찮아요! 모드 때문에 레오노라에게 화를 내진 말아 주세요!”

“…….”

“모드, 정말 괜찮으니까…! 흐아앙!”

정원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커다란 모드의 울음 섞인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꽃받침을 한 내 얼굴만 꼼꼼히 살핀 실비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인다.

“왜 미간을 3mm 정도 구긴 거지, 레오노라. 걱정이 되어서 훈련에 집중할 수가 없다.”

“맞아. 게다가 꽃받침까지 하니까 너무 귀여워서 자꾸만 보게 되잖아. 집중 안 되니까 그만 귀여워!”

실비의 뒤에서 불쑥 얼굴을 내민 에녹이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내가 귀엽고 예쁜 탓에 훈련에 집중할 수 없다며 인상을 찌푸리는 형제를 번갈아 바라보다 가느스름히 눈을 떴다.

‘이놈들 훈련하기 싫어서 핑계 대는 것 봐.’

어이가 없었지만, 덕분에 나는 도청기 아티팩트를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장착할 수 있을지 떠올릴 수 있었다.

형제의 말에 와락 일그러지는 모드의 얼굴이 힌트가 되어줬으니까.

‘그 방법을 쓰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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