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우리가 향하는 곳은 교황청.
그러니까 원작에서 온갖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전부 다 하는 사특한 집단의 소굴이었다.
‘하지만 이젠 내가 기억하는 원작 자체가 의심스럽단 말이지.’
왜냐하면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에서 아이네스는 분명 주인공다운 인성을 갖춘 천사 같은 황녀님이었으니까.
아이들의 인권을 유린하던 브리넨 구휼원을 박살내고, 어릴 적 어머니와 헤어져 고통 받던 트리스탄을 구원하고, 여러모로 인성이 파탄 나 있던 폭군 그레고르를 교화시킨.
하지만 내가 겪은 아이네스는 천사 같긴커녕 인성이 매우 의심스러운 사이코패스였다.
◈
“뭐? 트리스탄의 엄마가 양육권을 두고 공작에게 소송을 걸었다고?”
아이네스는 또 다른 푸른 독수리, 아멜리아의 보고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심약한 여자가 어떻게 솔로아 공작을 상대로 소송을 걸 생각을 다 한 거지?”
황녀는 신경질적으로 협탁을 두드리다 제 결 좋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어떻게든 둘 사이를 갈라놔야 해. 트리스탄을 고립시켜 놔야 한단 말이야.”
그래야만 자신에게 맹목적인 기사님이 되어 줄 테니까.
아이네스가 몇 번의 삶을 반복한다 해도 트리스탄은 늘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는 기사였다.
트리스탄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이네스, 그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외로움과 고독에 허우적거릴 때쯤 제 생모를 만나게 해 줘야 고마움을 느끼고 나를 은인으로 생각하게 될 텐데!’
아이를 곁에 두기 위해 무려 공작인 전남편에게 소송을 거는 것을 서슴지 않는 어머니를 둔 아이는 딱히 외로울 일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고 보니 옛날에 내가 솔로아에 보낸 세작은 어떻게 됐어? 트리스탄의 초상화를 포함해서 관련 물건들을 전부 빼앗아 아예 아들을 잊고 살게 만들라고 했었잖아!”
황실도 사교계도 제 뜻대로 굴러가는 일이 하나도 없다 보니 정신없이 수도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매진하는 동안 트리스탄 쪽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발작하듯 인상을 찡그리는 아이네스 앞에 무릎을 꿇은 아멜리아가 면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하차나아의 삼남에게 발각돼 팔다리가 부러진 후 도망쳤다고 합니다. 상대가 연약한 여인이라 실패를 예상하지 못해 확인하지 않은 제 탓입니다, 황녀님. 부디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카멜리아와 달리 아멜리아는 영민하고 황가에 대한 외경심이 남다른 충복이었다.
그런 그녀를 짜증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던 아이네스가 예쁘장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차갑게 웃는다.
“당연히 네 탓이지. 그럼 황녀인 내 탓이겠어?”
“송구합니다, 황녀님.”
“손가락 하나 잘라. 손목을 자르고 싶은데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봐주는 거야.”
아멜리아는 아이네스의 잔인한 명령에 반박하지 않고 단검을 치켜들었다.
“짜증 나는 하차니아놈들. 사사건건 방해질이란 말이지.”
제 발치에 튄 검붉은 핏방울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아이네스가 까드득 이를 갈더니 살벌한 목소리로 공작가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내 앞길을 방해해?”
아이네스 드 네아 윌레닌, 이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녀인 자신은 반드시 꽃길만 걸어야 했다.
“가는 길에 잡초가 생겼으면 뽑아야지.”
◈
‘우으. 무서워….’
나는 무섭다 못해 거의 소름이 끼치는 원작을 살포시 덮으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제목은 그대로 <아.황.장>이었지만, 이 세계가 정말로 내가 전생에서 읽은 <아.황.장>의 세계인지 의심스럽다.
‘이 정도면 거의 피폐물 빌런인 거 아니냐고?’
남자주인공인 트리스탄의 마음을 독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생모와의 만남을 방해하다니.
‘소매치기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트리스탄의 어머니를 설득해 양육권 소송을 걸게 만든 게 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이려고 들 수도 있겠어.’
나는 한없이 연약하게만 보이는 아이네스의 순한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단순히 그레고르만 신경 쓸 게 아니야. 아이네스와 대적할 준비도 해야 해.’
그러려면 든든한 아군이 필요했다.
‘적의 적은 친우인 법!’
교황은 특유의 불면증 덕에 아이네스에게 집착하는 캐릭터였지만, 교황청과 대신전 자체는 황실과 대립각을 세우는 집단이었으니까.
다그닥 다그닥.
잘 닦인 황도의 길을 열심히 달려 교황청에 당도한 나는 질겁하는 루카스의 목덜미를 잡아끌고 마차에서 내렸다.
“여긴 왜 온 거지.”
그것도 내 몸까지 싸 들고.
나만큼이나 작은 히스가 짐짝처럼 싸 들고 온 제 육신을 힐끔한 루카스가 잘생긴 미간을 좁힌다.
“설마 교황에게 내 몸을 팔아넘길 생각인가.”
“섭섭해, 루카스. 리니는 루카스를 좋아한다니까?”
부러 귀여운 척 두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며 하는 말에 그가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다.
“아까 왕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루카스의 몸을 검증받을 거야. 여태 루카스의 몸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해 달라고.”
“대신전이 내 마나를 얼마나 탐내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검증이 끝나면 절대로 돌려주려고 하지 않을 거다.”
나는 루카스의 말에 흥흥, 코웃음을 치며 히스가 짊어진 포대기를 두어 번 두드렸다.
“신전이 루카스 몸을 탐낸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어. 설마 내가 그 정도 대비도 안 했을까 봐?”
인양된 함선에서 발굴한 아크레아의 유물은 전부 다 최상품 딱지가 붙을 만한 아티팩트였다.
‘하차니아 공작가의 명성을 위해서 박물관에 기증한 건 전부 쓸데없는 기능을 가진 유물들이었고, 알짜배기는 내가 쓰려고 남겨 뒀지.’
나는 포대기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루카스의 손목에 깨알같이 작은 페리도트로 이루어진 팔찌를 채웠다.
“아크레아의 12사도가 직접 이동진을 새겨 넣은 팔찌야. 신전 결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뚫겠지.”
마도왕국 아크레아는 망국이긴 했지만 윌레닌 제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마법이 발달한 나라였었다.
“팔찌와 짝을 이루는 이 반지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루카스의 육신을 소환할 수 있어.”
나는 내 약지에 곱게 끼워진 페리도트 반지를 팔랑이며 루카스를 안심시켰다.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들어가 보자, 응? 절대로 안 빼앗길게. 약속해.”
아기 달래듯 조심스레 설득하며 새끼손가락까지 내밀자 우뚝 멈춰 섰던 그의 발이 겨우겨우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휴. 진짜 우리 집 애들은 하나같이 다루기 힘들다니까.’
나는 남몰래 한숨을 폭 내쉬며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교황청에 발을 내딛었다.
* * *
“하차니아의 막내 공녀님 아니십니까?”
교황 발레리아누스 3세가 아이네스의 생일 연회에서 나를 시동으로 삼고 싶다고 선포했던 덕분인지 교황청 입성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안 그래도 성하께서 보고 싶어 하셨는데, 잘 오셨습니다.”
신관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나를 반겨 주기까지 했으니까.
‘누가 봐도 수상한 포대기를 짊어진 히스에 루카스까지 왔는데 나만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잖아?’
교황청의 입구부터 성전까지 이어지는 중앙 계단에 깔린 붉은 융단에 올라선 우리는 월계수 잎을 여섯 개나 단 고위신관의 안내를 받고 바로 알현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기다리시면 성하께서 내려오실 겁니다, 하차니아의 막내 공녀님.”
‘…수상하네. 날 왜 저렇게 반기지?’
한 번 교황청에 놀러 오라는 교황의 사적인 편지를 받긴 했지만, 일개 공녀인 내 방문을 대신관이 반겨 주는 건 흔치 않은 일일 터였다.
“공녀! 아기 공녀!”
대신관이 알현실을 나서기 무섭게 발레리가 문까지 직접 열어젖히며 방안에 들어선다.
나는 희번득 빛나는 그녀의 백안에 흠칫 놀라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국의 가장 자애로운 태양을 뵙습니다.”
“인사는 됐다! 이 몸이 오늘 아침에 막 편지를 보냈는데 벌써 오다니 기특한지고!”
드레스를 곱게 접어 든 채 허리를 숙이는 내게 흐뭇한 시선을 보낸 발레리가 저벅저벅 다가와 내 옆에 바싹 붙어 앉는다.
‘편지를 또 보냈다고?’
물론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던 나는 교황이 내게 새로이 보낸 편지가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했다.
“신탁을 듣고 이 몸을 고통 속에서 구제하러 온 게지. 위대한 이 몸을 도우려는 아기 공녀의 마음이 더없이 선하고 아름답구나.”
나는 발레리의 뜬금없는 말에 자그마한 미간을 좁혔다.
‘잠깐만… 발레리와 관련된 신탁이라면 아이네스를 말하는 것이었을 텐데?’
[고매한 소녀가 태양에게 안온한 밤을 되찾아줄 것이다.]
원작에 언급되었던 신탁은 분명 아이네스가 발레리의 불면증을 치료할 수 있으리란 내용이었다.
“성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오호. 아기 공녀야, 이 몸은 벌써 잠이 오는 듯싶구나.”
내 말을 짧게 끊은 발레리가 내 무릎에 발랑 드러누운 채 눈을 감는다.
‘자려고 해도 소용없을 텐데.’
난 아이네스가 아니었으니까.
고로롱. 코로롱.
드르렁, 커억!
“…….”
나는 곧 고즈넉한 알현실에 울려 퍼지는 교황의 코 고는 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불면증이라며…?’
원작 여주 곁에서만 잠들 수 있다면서!
그냥 어린애만 옆에 있으면 잘 수 있는 거였냐고.
“저기요, 성하.”
나는 기가 막혀 교황의 몸을 흔들었지만 깊이 잠든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깐만 자게 냅두자.’
오랜 시간 불면증을 앓았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나는 이 일을 계기로 교황이 집착광공, 아니, 집착광황으로 돌변하리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하고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