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92)화 (327/486)

제92화

“누구야!”

나는 왕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며 지하실 문 바로 옆에 있던 벽장으로 몸을 숨겼다.

또각. 또각.

몸을 돌려 다가오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쥐죽은 듯 조용한 지하실에 울려 퍼진다.

나는 혹시라도 내 숨소리가 벽장 밖으로 새어 나갈까 양손으로 입을 막은 채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뭐지? 쥐새끼였나?”

벽장 코앞까지 다가온 멜리사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작게 중얼거린다.

“이상하네. 벽장 문은 아까 내가 활짝 열어 놨던 것 같은데.”

벽장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를 따라 멜리사가 천천히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왕녀가 문을 열면 발차기라도 해야 하나 싶어 내가 오러로 발등을 감싸려는 순간이었다.

“어머니.”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온 카리나가 조심스레 멜리사를 찾는다.

“카이젠 백작 부인이 어머니를 찾고 계세요. 호스트가 이리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예의가 아니라면서요.”

“흥. 영지도 보잘것없어 수도에 머무르는 백작 부인 주제에 예의는 극심하게도 찾는군.”

벽장문을 열기 일보 직전이었던 멜리사는 신경질적으로 등을 휙 돌리며 지하실을 벗어났다.

“…….”

멜리사가 지하실을 빠져나가는 소리는 들렸지만, 카리나가 움직이는 소리는 아무리 기다려도 들려오지 않는다.

입을 작게 벌린 채 호흡을 가다듬던 나는 벽장문이 삐끄덕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는 모습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리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갑작스레 시야를 가득 메운 등불의 노란빛에 카리나의 옅은 은발 머리가 물들어 암갈색으로 짙게 빛난다.

나는 따뜻한 고목 같은 그 빛깔이 다정한 그녀에게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소중한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

“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에요, 카리나.”

카리나는 내가 말하는 사람이 시체처럼 누워 있는 루카스 황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작은 입술만 달싹이며 침묵을 지키던 그녀가 비스듬히 몸을 틀어 내가 벽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준다.

무언가를 망설이듯 머뭇거리는 카리나의 손을 잡은 나는 생화로 가득 메워진 유리관에 다가섰다.

‘루카스가 이렇게 생겼었구나.’

콩깍지를 조금 빼놓고 평가하자면 루카스는 공자들 중 가장 반짝이는 미모를 자랑하는 에녹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적어도 히스만큼은 예쁜 것 같은데.’

히스가 아이치고도 선이 날카롭고 소년다운 점을 감안하면, 루카스가 더 고울지도 모르겠다.

십여 년 전 육체를 잃은 이후로 나이를 먹지 않은 건지 그는 지금의 가스파르보다는 조금 젊어 보였는데 가스파르만큼 듬직한 체격만 아니었으면 여자라고 오인할 정도로 반반했다.

하늘하늘하게 늘어진 긴 은발, 평온하게 감긴 두 눈이 꼭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 같은 모습이었다.

‘사진기 아티팩트 가져올걸. 꽤 오래 놀려 먹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연하늘색, 분홍색, 흰 장미와 검은 장미에 둘러싸인 루카스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카리나를 돌아보았다.

“…리니에게 소중한 사람이 루카스 황자인가요?”

“그렇다고 하면 도와줄 수 있어요?”

내 물음에 옅은 주홍빛으로 물든 카리나의 입술이 작게 벌어진다.

고민하는 그녀에게 저벅저벅 다가간 나는 칼라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라피스라줄리를 손에 거머쥐었다.

“만약 나를 도와준다면, 나도 카리나가 카리나의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요.”

그녀에게 암갈색 머리가 무척 잘 어울린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나는 카리나가 카렌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자유분방한, 검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멋진 사람.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소중하게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아직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우웅.

드레스 안주머니에 숨겨 놓은 원작이 드디어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챘냐는 양 진동하기 시작했다.

“카리나, 사실은 ‘루카리나’로 살고 싶지 않잖아요.”

나는 멜리사가 사람들 앞에서 카리나를 루카리나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딸아이가 루카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루카스 황자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뜨리기 위해서.

“사교계는 쥐뿔도 관심 없고 사실 검을 잡고 싶잖아요. 저택에 놀러 올 때마다 늘 백랑의 기사들을 훔쳐보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내 말에 휘둥그레진 눈을 한 카리나가 헤 입을 벌린다.

“어머니조차 제가 검을 배우고 싶어 한다는 건 모르시는데요.”

“나는 카리나가 어떤 사람인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궁금해하니까요.”

자신의 영달, 아니, 루카스에게만 집착하는 멜리사가 카리나가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할 리 없지 않은가.

“카리나, 내가 저번에 말했죠. 하나뿐인 엄마인 멜리사 왕녀도 당신에겐 소중하겠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

“나는 카리나가 카리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고, 그걸 도와주고 싶어요.”

로켓을 장식한 라피스라줄리에서 새어 나오는 은은한 푸른빛이 이내 원작에 흡수되기 시작한다.

나는 오망성의 꼭짓점 하나가 채워졌다는 감각에 굳은 얼굴의 카리나를 마주 보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를 도와줘요, 카리나.”

“…카렌.”

언젠가 기사가 될 수 있다면, 카렌 경이라고 불리고 싶었어요.

나는 카리나가 작게 덧붙이는 말에 빙그레 웃음 지었다.

* * *

“저, 정말 이래도 되는 거 맞아요?”

청금의 기사 ‘카렌’으로 막 자각하긴 했지만, 여전히 소심하기 짝이 없는 카렌은 나보다 배는 큰 루카스를 짊어진 채 저택 정원을 빠져나가려는 나를 따르면서도 경악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들키면 어쩌려고요? 어머니가 난리를 치실 거예요. 어머니는 루카스 황자 전하의 몸을 마치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분이세요.”

“걱정 말아요. 목격자는 없을 테니까.”

오러로 단단히 어깨를 감싸 완력을 키웠지만 그래도 짊어진 루카스는 너무 무거워서 신경질이 날 정도였다.

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왼손으로 쓱 닦으며 안주머니에 숨겨놨던 리볼버를 꺼내 들었다.

“카렌, 목격자만 없으면 완전 범죄라는 걸 기억해요.”

“아, 아, 안 들키겠다는 게 아니라, 목격자를 없애겠다는 뜻이었어요?!”

내 손안에서 차그락차그락 움직이는 작은 총을 발견한 카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완전 범죄의 원래 뜻이 그런 거라니까요?”

물론 뻥이지만, 나는 덜덜 떠는 카렌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게 개소리를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이 담벼락만 넘으면 돼요.”

정보 길드에 뒷돈을 왕창 주고 사들인 저택 설계도에 따르면 왕녀의 정원은 로열스퀘어의 붉은 광장과 맞닿아 있었다.

“하, 하지만 가시덤불이 담벼락을 덮고 있는데요? 게다가 높아서 리니가 넘을 수 있을까 싶은데요.”

“우리가 담을 넘을 필요는 없어요. 몸을 던지면 받아 줄 사람을 대기시켜 놨거든요.”

내 의도를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내 뜻을 순종적으로 따라 주기만 할 사람.

[히스.]

담벼락 너머로 히스의 인기척을 느낀 나는 작게 헛기침을 하는 척 그에게 공명을 시도했다.

[네, 공녀.]

[지금 던질 테니까 잘 받아.]

“자, 카렌. 하나 둘 셋 하면 던지는 거예요.”

“화, 황자 전하를요?”

내 말에 화들짝 놀란 카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가시덤불에 걸려서 다치실 텐데요?”

“어차피 의식도 없는데 살갗 좀 까지면 어때서요.”

뾰족뾰족한 장미 가시에 찔리면 살갗이 까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겠지만, 지금 나는 루카스의 몸을 곱게 모셔 줄 여유까지는 없었다.

‘마법사니까 몸 찾고 자가 치유하라고 해!’

이렇게 찾아 주는 게 어디인가.

나는 나보다 배는 큰 루카스의 몸을 낑낑거리며 높이 든 다음 담벼락 밖으로 던져 버렸다.

[잘 받아, 히스!]

그러나 힘에 부친 탓에 루카스의 몸이 휙 틀어져 방향이 바뀌고 말았다.

쿵.

나는 고즈넉한 정원을 울리는 타격음에 멋쩍은 뺨을 긁었다.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공녀.]

[으응. 괜찮아.]

내 몸도 아닌걸, 뭘.

나는 히스의 사과에 어깨를 으쓱하며 등을 돌렸다.

“도둑이야!!! 도둑이 들었어!!!”

그 순간, 멜리사 왕녀의 발악하는 목소리가 저택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내 가장 소중한 보물이 없어졌다고!!!”

어찌나 쩌렁쩌렁 목소리가 큰지, 정원에서도 그녀의 비명이 들릴 정도였다.

나와 카렌은 화장실에 다녀온 척 자연스레 사람들 틈 사이에 합류했다.

“도, 도대체 뭐가 없어졌는데요, 왕녀님?!”

당황한 사람들이 왕녀에게 다가가 물었지만, 멜리사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너! 루카리나!”

대신 입술을 질끈 깨문 왕녀는 내 옆에서 사색이 된 채 손가락만 옴질거리는 제 딸의 어깨를 우악스레 붙들었다.

“당장 따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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