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90)화 (325/486)

제90화

루카리나의 폴링 칼라(Falling Collar) 밖에 삐죽 튀어나온 로켓은 모서리가 뾰족한 눈꽃 모양이었는데, 가운데 저만큼 커다란 라피스라줄리가 박힌 목걸이는 결코 흔하지 않았다.

‘분명 아티팩트로 기억하는데….’

그것도 아이네스의 최측근 조력자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청금의 기사 카렌의 아티팩트.

카렌은 남자주인공인 트리스탄이나 서브남주 자카리와 비견될 만큼 강한 검사였는데, 아이네스의 호위대 단장이자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캐릭터였다.

‘악녀로 등장했던 벨루치가 카렌에게 퇴치당했었지.’

나는 다섯 살이나 어린 나와 키가 엇비슷한 데다 잔뜩 주눅이 들어 어깨까지 굽어 있는 카리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카리나의 로켓이 모종의 이유로 카렌에게 전달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마….

‘에이, 아니겠지.’

그녀가 카렌이었다면 내가 늘 드레스 안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원작 책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카렌은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였으니 분명 외전이 수록될 거야.’

짧게 판단한 나는 루카스의 무시에 모멸감이 들었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멜리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왕녀님, 몸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소응접실로 모실까요?”

“각하께선 어디에 계실 생각이신가요? 소응접실?”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양 휙 고개를 튼 멜리사가 나만 간절히 바라보고 있는 루카스의 단단한 팔뚝에 손을 얹는다.

[조금만 참아 줘. 미안해.]

나는 멜리사의 스킨십에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루카스를 향해 안쓰러운 눈빛을 보낸 다음 그를 매달리듯 붙잡고 있는 멜리사의 팔을 쳐냈다.

“아빠도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서 인사만 하고 소응접실로 오실 거예요.”

“아하! 그렇다면 먼저 가 있을게요, 각하!”

내 설명에 멜리사는 그제야 생긋 웃으며 나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후. 각하께선 참 부끄러움이 많으신 것 같아요.”

“……네?”

“나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말을 직접 하지 못해서 공녀에게 대신 말해 달라 부탁하신 거 아닌가요? 보통 객들은 소응접실까지 드나들지 못하니까요.”

나는 멜리사의 말에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착각도 이만하면 병증에 가까웠다.

‘하긴, 시체처럼 누워만 있는 사람을 십 년이나 제 침대에서 보관 중인 사람인데 미친x인 건 게 맞긴 하지.’

“음, 뭐, 그것보다는 저희 하차니아는 소응접실까지 손님들에게 개방할 수 있을 정도로 저택 인테리어에 공을 들였으니까요.”

연회실이나 거실과 달리 소응접실은 침실이 위치한 2층 중앙에 마련되어 있었다.

연회실만큼, 아니, 멜리사를 자극하기 위해 연회실보다도 화려하게 꾸며진 소응접실의 모습에 왕녀의 턱이 떡 벌어진다.

“…아름답긴 하네요. 세공사를 불러서 기둥을 새로 조각했나 봐요?”

“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광산에서 나오는 보석이 좀 많이 남아서요.”

문스톤으로 둥그렇게 감싼 화려한 기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콧대를 치켜세운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덧붙였다.

“아, 왕녀님께는 조금 과하게 장식한 것처럼 보이긴 하겠네요. 인테리어에는 관심이 없으신 데다 워낙 검소하신 분이니까요.”

“검소? 누가 그래요? 내가 검소하다고?!”

“네? 하지만 늘 수수하게 하고 다니시잖아요. 오늘 하고 오신 반지도 곤충이 없는 호박반지이길래….”

나는 수생 생물과 곤충을 포함한 부유물이 들어 있어 멜리사의 반지보다 열 배는 비쌀 커다란 호박 목걸이를 내보이며 난감하다는 양 고개를 기울였다.

“제 할머니, 그러니까 레이디 티에리께서 곤충도 없는 호박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다고 하셨었거든요. 그래서 보석에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어요.”

“…….”

“앗, 설마 보석에 관심이 있으신 데도 제대로 된 호박을 구하지 못하신 건가요…?”

나는 두 손으로 벌어진 입을 가리며 촉촉하게 눈가를 적셨다.

“할머니가 구하기 어려운 보석이라고 말씀해 주시긴 했어요. 저 몇 개 더 있는데 드릴까요?”

내 물음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멜리사가 날카로운 목소리를 높인다.

“공녀, 다른 사람이 없는 자리니까 내 친히 충고해 주는데 좀 더 말조심을 하는 게 좋겠어요. 어미 없이 자란 계집이라 예의가 없는 거라고 욕먹기 십상일 테니.”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긴 레이스 장갑을 벗은 멜리사가 내 쪽을 향해 장갑을 휙 집어던진다.

“그리고 공녀가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는 모양인데, 그레고르 폐하의 여동생인 젠나일 선황녀 전하께서도 이 멜리사 아스텔리우에게 선황녀궁을 어찌 꾸밀지 의견을 여쭙기도 하신답니다.”

‘저게 지금 일부러 장갑을 내 쪽으로 던졌어?’

나는 내 뺨을 스치며 바닥에 툭 떨어진 장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빙그레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와아! 그러시군요. 어쩐지 멜리사 왕녀님의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늘 아름답게 가꿔져 있다는 느낌을 받긴 했어요.”

“흥, 그래요. 공녀도 내 저택에 왔었으니 기억하겠죠. 우리 집 거실 샹들리에가 베른 산 다이아로 만들어진 에스페란토 장인의 작품이라는 거.”

“네! 저만 보기 아까울 만큼 아름다운 샹들리에였어요.”

나는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 비하면 작은 편인 왕녀의 저택 거실을 가득 메우다시피 한 화려한 샹들리에를 떠올리며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저택에서 연회를 열지 않으시는 건가요? 제가 왕녀님이라면 사람들을 잔뜩 초대해 왕녀님의 감각을 자랑할 텐데요.”

“그, 그건…….”

순진한 척 크게 눈을 뜨며 내가 묻는 말에 당황한 멜리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는다.

“네, 왕녀님! 생각해 보니 저희는 왕녀님 저택에는 초대받아 본 적이 없네요?”

“공녀님은 몇 번인가 가 보셨다면서요?”

때마침 멜리사를 찾아 소응접실에 들어선 귀부인 몇몇이 양손을 맞잡은 채 눈을 빛낸다.

“저희도 초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왕녀와 나의 대화를 은밀한 초대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연회를 준비하기엔 제가 공사가 너무 다망해서….”

답지 않게 말을 더듬는 멜리사의 대답에 제 딸처럼 크루아상을 양쪽에 매단 카이젠 백작 부인이 호호호 웃으며 쥘부채를 흔든다.

“에이, 작은 파티라도 열어 주세요. 설마 뭐 숨겨 놓은 남자라도 있으신 거 아니죠?”

그녀의 주책맞은 농담에 귀부인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자 멜리사는 얼어붙은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아요. 연회를 열겠어요.”

“꺄악! 신난다! 저도 초대해 주시는 거죠?”

“그럼요, 다음 주쯤 열 테니까 공녀도 와요.”

나는 멜리사의 말에 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두 눈을 곱게 휘었다.

‘그날이 네 제삿날이야, 이 여자야.’

* * *

이튿날 밤, 에녹과 실비 몰래 수도 저택을 빠져나온 나는 루카스와 함께 브리넨 후작저로 워프를 시도했다.

다 무너진 브리넨 후작저는 겉보기엔 흉가와 다름없었지만, 지하실 창고에는 값비싼 아티팩트가 가득했다.

‘분명 후작저 지하실에 아티팩트 창고가 있다는 걸 알고 요구하는 거야.’

아직 황실에서 제대로 된 공문이 내려오진 않았지만, 원작 책을 통해 아이네스와 그레고르의 대화를 읽은 나는 황실의 요구를 미리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레고르는 하차니아에게 벌금형 대신 불법으로 점거한 후작저를 통째로 돌려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여태 제작한 아티팩트 전부를 고스란히 바치라는 뜻이겠지!’

나는 아티팩트 공방 운영에 도움은커녕 사사건건 세금으로 트집을 잡던 황실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후작저 땅이 황실의 것이니 지하실에 보관된 물건들도 황실 거라는 게 말이야, 방구야?!”

나는 고개를 들어 내가 그간 공을 들여 가꿔 온 공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미리 아티팩트를 옮겨 놓은 덕에 적갈색 선반은 전부 텅텅 비어 있었다.

‘아이네스가 날 협박한답시고 그레고르의 흉계를 미리 알려 줘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꼼짝없이 비싼 아티팩트를 전부 빼앗길 뻔했다.

“준비됐어?”

“어.”

루카스의 품에 찰싹 안긴 나는 이제 얼추 내 몸에 맞는 우윳빛 바주카포를 왼쪽 어깨에 얹어 놓았다.

“이제 결계 쳐.”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의 손끝에서 얇은 실처럼 마나가 뻗어 나간다.

민가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그가 후작저를 결계로 감싼 것을 확인한 나는 망설임 없이 바주카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쾅!!!

콰쾅, 쾅!!!

콰르르르.

바주카포에서 발사된 붉은 오러가 낡아빠진 후작저를 두 방 만에 폭삭 무너뜨린다.

‘흥. 남 줄 바엔 날려 버리는 게 낫지.’

내가 어디 그레고르나 아이네스 좋은 일 해 줄 줄 알고?

“가자, 루카스.”

무너져 내린 후작저를 확인한 나는 바주카포를 어깨에 얹은 채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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