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89)화 (324/486)

제89화

‘훗. 오늘은 공작 각하와 공자들이 전부 수도 저택에 있다지.’

하차니아 공작가에서 날아온 연회 초대장을 품에 안은 멜리사는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콧노래를 흘렸다.

‘어린 계집애 마음을 얻는 건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지만, 사내들의 환심을 사는 건 식은 죽 먹기지.’

멜리사 아스탈리우,

아스탈리우 왕국의 13번째 왕녀이자 가장 아름답기로 손꼽히던 그녀는 빼어난 외모와 화술, 그리고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로 수도 사교계의 꽃 위치를 공고히한 사람이었다.

‘여태껏 수도 저택을 방문해도 늘 레오노라 그 계집애만 얼굴을 보였지만, 오늘은 공작과 공자들도 모습을 보이겠지.’

5년 만에 수도에 올라온 공작가가 정식으로 주최하는 연회였으니 당연히 가주인 공작도 얼굴을 비출 것이다.

“후우. 지난번에는 내가 너무 공작을 만만하게 봤었어.”

대다수 남자들은 멜리사가 미소만 지어 줘도 집안 기둥을 뜯어 바치기 위해 안달을 냈기 때문에 방심하고 말았다.

‘상대는 무려 공작이라고. 그레고르를 꼬실 때만큼은 공을 들였어야 해.’

세간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멜리사는 제국 황제인 그레고르의 애인이었다.

황제도 꾀어낸 자신이 공작 따위를 꼬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자신만만한 멜리사는 진주를 곱게 빻은 파우더를 얼굴 위에 덧바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카리나, 드레스 준비됐니?”

“네, 어머니.”

“응. 나 치장하는 동안 침실 좀 정리해.”

멜리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카리나가 뚜왈렛룸을 빠져나간다.

명색이 왕녀의 저택이었지만, 멜리사는 하녀를 부리지 않았다.

‘카리나가 웬만한 하녀보다 손이 빠르고 꼼꼼한데 뭐 하러 돈 써 가면서 사람을 부려?’

소심한 데다 자신의 미모를 닮지 못해 사교계에서는 영 쓸모가 없었지만, 카리나는 집안 내에서 만큼은 제법 유용했다.

“저 아이도 낳아 준 값은 해야 하니까.”

아직 어린 딸을 죄책감 없이 부려 먹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중얼거린 멜리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난 왕녀야. 왕녀가 집안일 따위를 어떻게 해?”

카리나의 양육비 명목으로 들어오는 돈과 그레고르가 안겨 주는 사치품이 적지는 않았지만, 사교계 유행을 선두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품위 유지비가 들었다.

매주 업데이트되는 신상 드레스와 장신구를 구매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막대한 빚까지 진 멜리사는 하녀를 고용하는 대신 루카리나를 하녀처럼 부려 먹었다.

“…마담 레스티 살롱에 지불할 돈은 하차니아 공작에게 달라고 해야겠어.”

슬슬 돈이 아슬아슬할 정도로 떨어지긴 했지만,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하차니아 공작만 꼬시면 모두 해결될 문제였다.

“오늘 내 아름다움을 목격한다면 공작이고 공자들이고 전부 넋을 놓을 만큼 황홀해하겠지.”

여리여리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 드레스를 품에 안은 멜리사는 후후,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 * *

수도 저택에 올라온 지 어언 한 달.

수도 사교계의 인사들에게 공식적으로 하차니아의 일원들을 소개할 시간이 도래하고 말았다.

“리니, 오늘 진짜 예쁘다! 엄청 귀여워!”

매우 귀찮았지만 공작가의 첫 공식 연회에 대충 하고 나갈 수가 없어 때 빼고 광을 낸 내 모습에 에녹이 헤벌쭉 입을 벌린다.

“오늘도 무척 사랑스럽군. 눈이 멀 것 같다.”

팔까지 붕붕방방 흔들어 대며 에녹이 방정을 떨고 실비까지 차분하게 말을 얹었지만, 나는 후비적후비적 귀만 후빌 뿐이었다.

‘칭찬 기분 좋은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 들으면 지겹다고.’

게다가 에녹과 실비의 칭찬은 늘 민망한 수준으로 과해서 듣고 있기 힘들기까지 했다.

“나 먼저 연회실에 가 있을게. 에녹이랑 실비는 아빠랑 같이 와.”

“응!”

형제의 말을 여상히 무시하는 내 태도에도 그들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공녀님, 오늘 입은 드레스도 저번에 입으신 것만큼 아름답네요!”

“고마워요, 라비나 영애.”

“아직 시중에 풀리지도 않은 마담 아그네스의 최신 작품인 거죠? 너무 부러워요!”

나는 호들갑을 떨며 달려드는 영애들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연회실로 들어오는 귀족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수도 귀족은 대부분 온 것 같으니까 이제 멜리사 왕녀만 오면 되겠네.’

주인공 자리를 독차지하고 싶은 건지 멜리사는 늘 파티에 가장 늦게 등장했다.

‘뭐, 늦게 와도 오기만 하면 되니까.’

수도 사교계에 루카스와 하차니아 일원들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오늘 연회는 멜리사 왕녀를 자극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까지 불러들여서 저택을 삐까번쩍하게 꾸며 놨는걸.’

나는 루비와 사파이어를 줄줄이 엮어 만든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하늘하늘 흔들리는 모습을 흘깃하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다 얼마야….’

저택 장식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무척 아깝게 느껴지는 가격대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오늘 왕녀의 허영심을 자극해야만 했으니까.

‘왕녀는 제집에서 파티를 주최하는 법이 없지.’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제집에 숨겨 놓은 루카스가 노출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자격지심을 건드려서라도 그녀가 자신의 저택에서 연회를 열게 만들어야 했다.

“멜리사 왕녀님, 드디어 오셨네요!”

나는 때마침 연회실에 들어서는 멜리사를 반갑게 맞이하며 활짝 웃었다.

“…네, 공녀.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예상했던 대로 보석 중에서 가장 값비싼 다이아몬드가 자수처럼 수 놓여 별처럼 반짝이는 내 화려한 드레스에 멜리사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드레스 장식이 조금 과한 것 아닌가요? 인간 샹들리에인 줄 알았어요, 공녀.”

“아, 이번 생일에 아버지가 다이아몬드 광산을 선물해 주셨거든요. 저는 손발이 작다 보니 보석이 남아서 쓸 때가 많이 없더라고요.”

내 무심한 대답에 왕녀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조금씩 진해진다.

나는 그녀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양 생긋 웃었다.

“저도 왕녀님처럼 수수한 드레스를 입고 싶었는데, 할머니의 사랑이 과하셨나 봐요!”

멜리사의 검은 드레스는 진주 장식이 알알이 박힌, 결코 수수하지 않은 의상이었다.

“보는 눈도 없는 주제에 지금 뭐라고-!”

“네?”

“후유. 됐어요.”

내 말에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린 왕녀의 입이 연회실에 들어서는 루카스를 발견하고 조개처럼 다물어진다.

“공작 각하!”

나보다도 먼저 루카스에게 다가선 멜리사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어머, 공자님들도 같이 오셨네요.”

루카스의 뒤에 선 실비와 에녹을 발견한 영애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꺄악, 새된 비명을 내지른다.

“저분이 실베스테르 공자님이셔? 소문보다 더 잘생기셨잖아!”

“하아, 어쩜. 눈꽃 같은 미모의 기사님이라더니 정말이네.”

“에녹 공자님도 계시네. 난 공자님의 저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가 너무 좋더라! 최연소로 적랑에 입단한 써머나이츠래!”

아카데미에서 추종자들을 몰고 다닌다더니….

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영애들의 호들갑을 애써 무시하며 루카스와 형제들에게 다가갔다.

“오늘도 어쩜 이리 휘황하신지요. 이 멜리사를 설레게 하는 분은 요즘 각하 한 분뿐이세요.”

멜리사는 내가 다가오든 말든 루카스와 형제들에게 집적대는 중이었다.

“아! 물론 공자님들도 아주 멋지시지만… 도련님들은 아직 너무 어리시잖아요?”

에녹과 실비는 생전 겪어 보지 못한 여성의 노골적인 추파에 잔뜩 얼어붙어 있는 상태였다.

‘음. 저러다 사고 치겠는데?’

에녹의 주먹이 움찔움찔거리는 것을 발견한 나는 민망한 입을 가로로 벌렸지만, 멜리사는 잔뜩 굳은 실비와 에녹이 귀엽다는 듯 그들의 뺨까지 두드릴 뿐이었다.

“긴장 푸세요, 공자님들. 이 멜리사, 공자님들을 잡아먹을 생각은 없답니다.”

은근한 윙크까지 덧붙인 멜리사의 멘트에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후후. 셋 다 내게 빠져 아주 정신을 못 차리네.’

그녀가 아주 단단한 착각에 빠진 듯싶었으니까.

“이 아줌마가 뭐라는 거야?”

이어지는 멜리사의 추파에 결국 에녹이 가장 먼저 그녀를 휙 밀어내며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저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향수 냄새에 멀미가 나서.”

당황으로 얼어붙은 멜리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한 실비마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다음 등을 돌린다.

“어, 어린애들이라 그럴 수 있지! 후후.”

에녹과 실비의 냉담한 반응을 애써 웃어넘긴 멜리사는 루카스에게 팔짱을 끼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공작님, 오늘 제 드레스가 마음에 드시나요?”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진주가 수놓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멜리사는 여인의 곡선이 여실히 드러난 매우 매혹적인 차림이었다.

확실히 웬만한 남성이라면 멜리사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지만 상대가 루카스인걸?’

“레오노라.”

제게 매달린 멜리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루카스가 희게 질린 얼굴로 입을 벌린다.

“빨리 가까이 와.”

“응?”

“네 얼굴을 보고 있어야 겨우 구역질을 참을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인 말이었지만, 멜리사는 확실히 들은 것 같았다.

“뭐, 뭐라고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다 못해 야차처럼 흉흉하게 돌변했으니까.

‘음? 그런데 저 루카리나의 목걸이…. 원작에 나온 아티팩트 같은데?’

루카스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멜리사의 등 뒤에 숨어 있다시피 한 루카리나를 발견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로켓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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