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88)화 (323/486)

제88화

내 말에 바싹 얼어붙은 카이젠 백작가의 여식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 뿐이었다.

‘루카리나를 지적하면서 내게도 으스댈 생각이었겠지.’

확실히 루카리나는 귀족 영애답지 못한 태도로 차를 마셨고,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나는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레이디 티에리를 가정교사로 두었다고 해도 수도에서 나고 자라 세련된 품위를 지닌 자신과는 다르지 않겠냐며, 나를 시골 뜨내기 취급할 작정이었으리라.

“커어억. 와, 이렇게 마시니까 확실히 시원하네요!”

“네! 찻잎의 풍미도 더 느껴지고요!”

제 속내를 들킨 카이젠의 여식이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데, 눈치 빠른 아이들 몇몇이 나를 따라 제 앞에 찻주전자를 집어 들고 벌컥벌컥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역시 레오노라 공녀님이 뭘 좀 아시는군요!”

역시 아기 때부터 수도 사교계를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던 아이들다운 처세술이었다.

나는 티파티의 주최자이자 공작가의 고명딸인 나를 따라 마치 이 방식이 원래 유행이었다는 양 주전자를 덥석 집어 드는 아이들의 모습을 훑어보다 루카리나를 돌아봤다.

“루카리나. 내 서재를 구경하지 않을래요?”

“네, 좋아요!”

내 물음에 뺨에 발그스레 홍조를 띄운 루카리나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에녹이랑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훨씬 어려 보이네.’

자리에서 일어난 루카리나는 티파티에 초대받은 또래 영애들에 비해 확연히 작았다.

‘…전생의 나도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작았었는데.’

나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면서 키는 아주 조금 클 뿐인 루카리나의 모습에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멜리사가 끼니를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아서겠지.’

탐색기로 멜리사 모녀를 지켜본 시간이 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꼬박 이틀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멜리사가 루카리나의 식사를 챙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늘 치장을 하고 파티에 쏘다니기 바쁜 것 같았어.’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성장한 멜리사를 배웅하는 루카리나의 쓸쓸한 얼굴을 떠올리며 내 옆에 선 아이의 손을 답삭 잡았다.

“서재에 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을 나눠 줄게요! 같이 먹어요!”

“저, 정말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루카리나의 손을 잡고 서재에 당도한 나는 보라색 벨벳 소파에 몸을 누인 채 그녀를 향해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루카리나만 주는 거니까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에요.”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라비가 슈가 파우더가 잔뜩 묻은 버터피칸쿠키를 가득 쌓아올린 그릇을 들고 들어온다.

“이, 이런 과자는 처음 먹어 봐요!”

설탕도 꽤 비쌌지만, 슈가 파우더는 설탕보다도 고급품인지라 이렇게 과자 위에 범벅을 하듯 사용하는 파티쉐가 드물었다.

‘하지만 우리 집은 이제 엄청난 부자니까.’

게다가 공작가의 주방장 롬베르디는 단 것에 환장하는 나를 무척 귀여워했다.

‘내 사랑을 얻기 위해 이제 디저트 장인으로서 제국에서도 손꼽힐 만한 솜씨를 갖추게 되었지.’

“입에 맞나요?”

“네, 네에…. 너무 맛있어요.”

공작 성에서 공수해 온 롬베르디의 특제 쿠키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루카리나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쿠키를 우적우적 씹어먹는다.

‘원래 입에 단 걸 넣어 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생기는 법이지.’

“나, 루카리나랑 친구가 되고 싶어요.”

나는 루카리나가 삼키고 있는 달큰한 과자보다도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등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공녀님 같은 분이 저, 저 같은 거랑 왜….”

내 행동에 움찔 몸을 떤 루카리나의 동공이 잘게 흔들린다.

“그냥요. 루카리나가 마음에 들어서요.”

내 심플한 대답에 꿀꺽 침을 삼킨 루카리나 우물쭈물 말문을 연다.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공녀님…. 저 같은 애랑 친구 하시면 공녀님께 좋을 게 하나도 없으실 거예요.”

“왜 그런 말을 해요?”

“저랑 가까이 지내시면 재수가 옴 붙으실 테니까요.”

누가 들어도 루카리나 스스로 생각해 낸 말 같지 않은 대답이었다.

“이번 진급에서도 내가 누락됐어! 널 데려온 이후로 번번이 누락되고 있다고!”

“재수 없는 년. 이게 다 네가 악운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군부 소속 과학자였던 주제에 점쟁이의 말을 꽤나 믿었던 양부는, 나를 가리켜 ‘집안에 액화를 불러들일 계집’이라고 했던 옆집 할머니의 말을 곧잘 들먹이곤 했었다.

‘국가가 비밀리에 만든 특수부대에 내가 선출된 덕에 한 번에 몇 계급을 승진한 주제에 여태 진급하지 못했던 건 전부 내 탓이라고 여기던 놈이었지.’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어른들은 제게 벌어진 모든 나쁜 일에 남 탓을 하곤 했다.

제 주변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약자의 탓을 말이다.

나는 왕녀의 딸이라면서 잔뜩 주눅이 들어 있는 루카리나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다 곧 얼룩덜룩한 아이의 손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짜 몹쓸 인간이네.’

루카리나가 눈치채지 못하게 한숨을 삼킨 나는 자꾸만 굳어지는 입꼬리를 애써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루카리나랑 친해지고 싶은데요.”

내 말에 나와 쉬이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던 루카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나, 꽤 운이 좋은 편이라 괜찮을 것 같은데. 우리 한번 시험해 보지 않을래요?”

내가 씨익 웃으며 내미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리나가 머뭇머뭇 팔을 움직인다.

“고, 공녀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카리나라고 불러 주세요…. 제 애칭이에요.”

“그래요, 카리나! 카리나는 날 리니라고 불러도 좋아요.”

“…저, 공녀님처럼 멋진 소녀는 처음 봤어요. 그래서 사실 처음부터 친해지고 싶었어요.”

홍당무처럼 뺨을 붉힌 루카리나의 수줍은 고백에 덩달아 나까지 부끄러워진다.

“으응, 고마워요.”

“공녀님은 정말 멋지세요. 어디서든 당당하시고, 활기차시고! 또 상냥하기까지 하시잖아요!”

나는 점점 룰루랄라의 팔불출 멘트에 가까워지는 카리나의 발언에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아, 하차니아 공작가가 움베르토 제약을 소유한 건 알고 있죠?”

“아, 네에! 정말 대단하세요. 무역 사업에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갤러리 운영, 거기다가 제약 회사까지 운영하시다니요!”

나는 어느새 두 손을 맞잡은 채 별처럼 눈을 빛내는 루카리나의 시선을 피하며 멋쩍은 뺨을 긁었다.

“내가 운영하는 것도 아닌데요, 뭘.”

사실 반쯤 내가 운영하고 있는 게 맞았지만, 여덟 살짜리 아이가 제약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제품의 신뢰도가 떨어져 버릴 테니까 입을 함부로 놀릴 수는 없었다.

“아무튼 움베르토 제약에서 나온 신제품들인데 루카리나도 한 번 써 볼래요?”

주섬주섬 테이블 근처 박스를 뒤적인 나는 멍을 없애 주는 연고를 잔뜩 담은 약상자를 루카리나에게 내밀었다.

“…타박상에 쓰일 법한 약들이네요.”

덩치는 여덟 살인 나만큼이나 작았지만, 에녹 또래의 루카리나는 눈치가 영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감사해요, 공녀님.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다 떨어지면 또 줄 수 있으니까 간직만 하지 말고 필요하면 써요.”

내 말에 카리나가 제 드러난 손목을 서둘러 소매 아래로 감춘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뜻이에요.”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직시한 채 입을 벌렸다.

“친해지고 싶다고 해도 아직 날 믿지 못하겠지만, 난 정말 카리나를 돕고 싶으니까.”

“…공녀님.”

내 말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의 카리나가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인다.

“공녀님은 공작 각하를 사랑하시죠? 각하는 공녀님의 하나뿐인 아버지니까요.”

나는 그녀의 말에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난 분명 가스파르를 사랑했지만, 그 이유가 그가 꼭 나의 아버지여서는 아니었으니까.

“저도 멜리사 왕녀님을 사랑해요. 왕녀님은 제 하나뿐인 어머니시니까요.”

제 무릎에 얌전히 올린 두 손으로 주먹을 쥔 카리나의 말은 담담한 얼굴과 달리 절박하게 들렸다.

마치, 사랑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하나뿐인 어머니라 멜리사 왕녀님을 사랑한다고요.”

왕녀는 어린 당신을 방치하고, 걸핏하면 학대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이용만 하는데도?

소리 없는 질문을 내포한 내 눈빛을 카리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 피해 버렸다.

‘…그래. 부모를 버린다는 건, 포기한다는 건 대단한 용기와 뼈아픈 각오가 필요한 일이지.’

어린아이에게는 부모가 세상에 전부일 수밖에 없으니까.

하물며 성인에 가까웠던 전생의 나조차도 양부를 포기하지 못하질 않았나.

“카리나, 당신 말대로 멜리사 왕녀는 분명 카리나의 하나뿐인 어머니겠죠.”

“…….”

“하지만 당신도 이 세상에 하나뿐인 카리나예요.”

세상에 카리나, 그러니까 슈가 파우더를 잔뜩 바른 쿠키를 좋아하고 소심하지만 눈치가 빠른 카리나는 내 눈앞에 있는 그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그런 카리나를 아껴 줄 의무가 있어요.”

학대받고 방치당하는 스스로를 구원할 의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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