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86)화 (321/486)

제86화

“엄마! 나 다음에 엄마 집 놀러 가도 돼?”

“네?”

“나 엄마 딸이잖아. 딸이 엄마 집에 놀러 가는 것도 못 해?”

“아, 으응. 그럼요. 언제든 오세요.”

친딸보다도 더 ‘딸’ 같은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멜리사는 루카스가 회의를 끝내고 돌아오기도 전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돌아가 버렸다.

‘그러게 누가 까불래?’

지금은 얌전한-정말 사람들이 나를 얌전하게 볼지는 모르겠지만- 귀족 영애 행세를 하고 있지만, 내가 한때는 ‘미친개’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야~!

루카스의 몸이 숨겨져 있는 그녀의 저택에 방문해도 괜찮다는 허락도 받았겠다, 나는 부리나케 달아나는 멜리사를 미련 없이 배웅했다.

어깨를 으쓱하며 응접실로 돌아온 내게 오데트가 황성에서 보내온 서신을 건네준다.

“아이네스 황녀 전하가 보내신 티파티 초대장이에요.”

‘기어코 황성으로 나를 불러들이긴 하는구나.’

루카스의 몸이 황성에 없다는 걸 이미 알아낸 터라 딱히 달가운 초대는 아니었지만, 황녀의 초대를 명분도 없이 거절할 수는 없는 지라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이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외출 준비를 해 줘, 오데트.”

마침 그레고르도 루카스를 호출한 참이었으니 같이 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차분하게 눈을 빛냈다.

* * *

하차니아 공작가의 흑단목 마차는 가문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전혀 하찮지 않은 육두마차였다.

‘부를 과시하기 위해 금장식을 덧붙였는데 생각보다 흑단목이랑 잘 어울리네.’

제랄드는 황족도 이 정도로 화려한 마차는 타지 않는다며 제작을 망설였지만, 자르파라가 ‘아크레아를 빛내는 태양’이 타는 마차는 이 정도는 돼야 한다며 다이아몬드가 박힌 편자까지 가져다 주었다.

로얄스퀘어의 잘 닦인 도로를 힘차게 달려 나가는 마차 소파에 기댄 나는 창문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선망 어린 시선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하차니아는 더는 하찮지 않다, 이거야.’

루카스가 아닌 보수적인 가스파르가 가주였더라면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가문을 이렇게나 급속도로 발전시키기 꽤 힘들었으리라.

‘루카스가 아빠의 몸을 차지한 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

이제 루카스의 몸을 되찾고 아빠를 다시 만날 일만 남았다는 생각에 마음에 여유가 생긴 나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있는 루카스의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고마워, 루카스.”

“…뭐가 말이지?”

“그냥 전부 다. 내 아빠 노릇하는 거 힘들잖아.”

내 말에 꾹 닫혀 있던 루카스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올라간다.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하려는 듯 살짝 찡그린 검붉은 눈은 가스파라의 것처럼 자상하진 않았어도 묘한 따스함이 담겨있었다.

“딱히.”

“응?”

“별로 힘들지 않다.”

나는 무뚝뚝한 루카스의 대답에 흐흐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힘들지 않으면 다행이고.”

그에게 이런 말을 해 본 적은 처음인 탓에 사과같이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누르는 순간, 마침내 황성에 도착한 마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선다.

“각하, 아가씨. 황성에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에 먼저 마차에서 내린 루카스가 익숙한 듯 내게 손을 내민다.

‘원래 어린아이 에스코트하는 법 따위는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나를 마차에 혼자 두고 홀랑 내려 버려서 늘 나를 곤란하게 했던 과거의 루카스를 떠올리며 그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공작 각하와 공녀님을 뵙습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대응접실에 들어서자, 황제의 비서관인 듯 보이는 남자와 급이 높은 시녀 차림의 여자가 달려 나와 우리를 맞이한다.

“폐하의 수석 비서관 자우버라고 합니다. 각하를 알현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황녀님의 수석 시녀인 한나라고 합니다. 공녀님께서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루카스와 나를 따로 안내할 셈인 모양이었다.

[조심해, 루카스. 네가 루카스라는 걸 들켜서는 안 돼.]

[내가 바보인 줄 아는 건가. 너나 조심해라.]

공명으로 루카스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나는 내게 공손하게 읍하는 시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황녀궁이구나.’

아이네스가 기거하는 황녀궁은 원작의 묘사대로 따사한 햇빛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상아색 궁전이었다.

수도이자 황도인 바하무스 중앙에 위치한 윌레닌 궁전의 또 다른 이름은 ‘영원히 더럽혀지지 않는 순백의 성’이었는데, 말 그대로 고대 마법사들의 결계로 인해 절대로 더러워지지 않아서 붙은 이름이었다.

“어서 와, 공녀.”

정원에 준비된 티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이네스가 발딱 일어나 내게 인사한다.

“나, 공녀를 정말 오랜 시간 기다려 왔어.”

“……아, 네에. 안녕하세요, 황녀 전하.”

안 그래도 아침에 원작을 확인하고 온 참이었다.

‘드디어 내 마나통이 황성에 온다!’ 따위의 속마음만 가득 적혀 있던 페이지를 떠올린 나는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찡그렸다.

“수도 생활은 어때? 맞는 것 같아?”

“아뇨. 딱히 잘 맞는 것 같지는 않아요.”

나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친근한 척 내게 달라붙는 아이네스를 내려다보며 느릿느릿 입술을 움직였다.

“저는 조용한 하차니아의 영지가 좋아서요. 아마 곧 내려갈 것 같아요.”

“뭐! 벌써?!”

내 말에 아이네스가 질색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나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뾰족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는 그녀를 향해 떨떠름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저희가 꼭 수도에 머물러야만 하는 가문은 아니니까요.”

하차니아 공작가는 5대 귀족에 속한 명문가이긴 했지만, 황도의 정치에 깊은 관여를 하는 가문은 아니었다.

“그, 그렇지만 나는 공녀가 황도에 조금 더 오래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 팔뚝을 우악스레 움켜잡은 아이네스가 아이처럼 칭얼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민다.

‘너야 당연히 그렇겠지, 이 흡혈귀 같은 여주야.’

나는 지금도 내 마나를 쏙쏙 빼먹고 있는 아이네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원작에서 레오노라의 마나를 어떻게 빼먹었나 싶었는데, 아이네스의 이능이었나 보네.’

아이네스에게는 마나 추출기 없이 다른 사람의 마나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루카스에게 마법을 배우면서 마나의 기척을 느끼는 방법을 같이 배우지 않았더라면 당사자인 나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은밀하게 마나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난 공녀랑 친해지고 싶어. 나랑 친해지는 건 공녀에게도 나쁘지 않을 거야.”

나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아이네스의 말에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황녀님과 친해지면 제게 무슨 이점이 있나요?”

“공작님이 아빠에게 꽤 큰 실수를 한 모양이던데, 내가 아빠에게 잘 말해 줄 수도 있어. 공녀가 내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만 해 준다면 말이야.”

나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아이네스의 시선을 피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실수요? 무슨 실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공작가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건 나였으니 루카스의 실수라면 곧 나의 실수나 마찬가지였다.

“공작님이 황실 소유 영지에 불법 건축물을 올렸다던데? 아빠가 꽤 많이 화나신 것 같았어.”

나는 아이네스의 설명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실 소유 영지에 건물을 세웠다고? 우리가 언제?’

설마….

“브리넨 후작가의 흉가 말이야. 후작이 후대도 남기지 않고 죽어 버렸으니 그의 영지와 재산은 모두 황실에 인계된 것인데, 공작님이 그 안에 멋대로 건물을 지으셨다면서?”

아티팩트 공방.

지금 아이네스가 말하는 건물은 내가 운영하는 제랄드 아티팩트 공방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 저택이 전부 무너진 데다 작물도 기를 수 없어서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

브리넨 후작의 흉가는 구휼원의 비밀이 세상에 밝혀진 탓에 사람들의 뭇매를 사는 것이 두려워 황실에서는 손도 대지 않고 있던 곳이었다.

‘게다가 내 공방은 지하에 있어서 사람을 써서 미행한 게 아니라면 흉가 내에 있는 것도 알아내기 힘들었을 텐데?’

그러니 공방을 걸고 넘어진다는 건 그레고르가 하차니아를 견제하기 위해 면밀히 조사를 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그 건물에서 물건까지 제작해서 판매했다나 봐. 남의 땅을 불법 점거해 얻어 낸 소득이니, 모두 몰수하는 게 맞지 않겠냐고 하셨어.”

나는 아이네스가 덧붙인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건물만 옮기면 되지, 여태 번 돈을 모두 토해 내게 할 거라고?’

“……어른들이 알아서 하시겠죠.”

정확히는 내가 수습할 문제였지만, 나는 아이네스에게 복잡해진 내 심정을 티내지 않고 생긋 웃었다.

“죄송하지만 전 전하께서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알아듣지도 못하겠어요, 황녀 전하. 너무 어려운 대화 주제네요.”

“아! 나도! 나도 어린이라 그런 거 잘 몰라.”

‘방금까지는 불법 점거니 뭐니 어린아이가 알기 어려운 말까지 써 가면서 나를 협박해 놓고?’

나는 아이네스의 뒤늦은 변명에 드레스자락에 숨긴 주먹을 세게 쥐었다.

“으음, 이제 다 찬 거 같아. 일주일은 가겠는걸.”

내게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리는 아이네스의 혼잣말에 주먹 쥔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간다.

‘내 마나를 일주일 치나 뽑아 먹었다는 소리잖아.’

어쩐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데다 어깨까지 처지고 있었다.

“오늘 재미있었어, 공녀! 이만 가 봐!”

아이네스는 제 볼일을 끝마쳤다는 양 개운한 얼굴로 마나를 쪼옥 빨아 먹혀 낡고 지친 나를 주저 없이 황녀궁 밖으로 내쫓았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꼴로 새파랗게 질린 나와 달리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황녀의 얼굴은 깐 달걀 같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아, 이거 큰일인데.’

아이네스에게 마나를 생각보다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정신력이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흐엉….”

서럽다.

열심히 가꿔 온 공방을 자기들이 뭐라고 빼앗아 간단 말인가!

‘나라가 나한테 해 준 것도 없으면서! 세금도 꼬박꼬박 냈는데-!’

억울한 마음이 그득 차오른 나는 본궁에서 나오는 루카스를 발견하자마자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루카쯔으….”

물론 내 눈물 한 방울에 그가 설마 황성 건물, 그러니까 절대 더러워지지 않는 순백의 성이라고 불리는 세계 문화 유산을 무너뜨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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