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83)화 (318/486)

제83화

빨리 루카스와 왕녀에게 달려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싶었지만,

“공녀님, 혹시 오늘 입으신 드레스도 마담 아그네스가 디자인한 것인가요?”

“마담 아그네스는 아동복은 디자인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역시 손녀인 공녀님의 것은 만들어 주시는 거군요!”

“정말 부러워요. 너무너무 예뻐요, 공녀님! 일간특급에 실렸던 드레스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나는 내게 달려드는 어린 영애 무리에 가로막혀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으응. 고마워요. 마담 아그네스가 디자인한 드레스가 맞아요.”

“마담 아그네스가 황도에서 유명했던 ‘그’ 레이디 티에리시라죠? 공녀님의 가정교사시라는.”

“레이디 티에리는 아무나 가르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역시 레오노라 공녀님이세요!”

나는 일면식도 없었던 내게 환상이라도 있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아동복 라인 홍보는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오늘 입은 의상 역시 티에리의 작품으로 그녀가 한껏 힘을 주어 제작한 드레스였다.

하차니아가 쌓아 올린 부가 결코 하찮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 소매와 네크라인에 하트컷 루비를 깨알같이 작은 멜리다이아와 엮어 자수까지 놓은.

내 예상대로, 귀부인들조차 내 머리색과 대비되는 붉은 드레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하차니아의 아티팩트 사업에도 직접 참여하고 계신다면서요? 저보다 어리신데도 정말 대단하세요!”

“기준이 너무 높아서 수행자를 뽑지 않는다는 얼음 마탑 소속의 유일한 연구자시라고, 일간특급에서 봤어요!”

나는 아이들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게 신기해서 머뭇머뭇 고개만 끄덕였다.

‘일간특급’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인기가 좋은 모양이었다.

‘아이네스의 생일 연회처럼 아무도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나는 문전성시를 이루다 못해 사람이 미어터지고 있는 수도 저택의 연회실을 둘러보았다.

‘초대받은 사람은 전부 참석한데다 파트너를 데려온 사람이 대다수야.’

아이 생일 파티라서 그런지 제 자식을 데려온 사람들도 많아서 넉넉히 준비한다고 준비한 음식이 모자라 출장 요리사까지 섭외해야만 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멜리사 왕녀와 루카스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들어야 해!’

“저, 미안한데 아빠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아아, 하차니아 공작님이요! 저희 아빠랑 춘추가 같으신데 어쩜 저렇게 멋있으실까요?”

내 앞을 가로막은 여자아이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하다는 듯 두 손을 맞잡고 루카스를 힐끔한다.

‘정말 아이돌 팬사인회라도 온 것 같잖아.’

“그을쎄요.”

그녀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한 나는 슬쩍 몸을 돌려 아이들 사이를 빠져나와 루카스에게 접근했다.

“각하, 각하의 사연은 저도 익히 들어왔어요. 얼마나 힘이 드실지….”

피처럼 붉은 와인 잔을 든 멜리사의 목소리가 퍽 고혹적이다.

“같은 상처를 품고 있는 저에게라면 각하께서도 쉬이 아픔을 나누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답니다.”

나는 이어지는 멜리사의 말에 의아한 고개를 기울였다.

‘가스파르의 몸 안에 든 게 루카스의 영혼이라는 걸 눈치채고 다가온 게 아니었나?’

“고독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의 삶이란 건.”

그녀의 눈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촉촉해졌다.

“멜리사 왕녀, 아직까지도 황자 전하를 그토록 그리워하시는 겁니까.”

“정말 대단한 사랑이에요, 멜리사. 가여운 왕녀님!”

구슬픈 그녀의 목소리에 귀부인들 몇몇이 손수건까지 꺼내 들고 눈가를 닦는다.

‘루카스가 그렇게까지 열렬한 사랑을 했었다고?’

내가 아는 루카스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라 나는 등을 돌린 탓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의 손을 뒤에서 덥석 붙들었다.

“아빠.”

“…….”

“아빠?”

멜리사를 바라보는 루카스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표정했지만, 나는 그의 뒷목이 긴장으로 삐죽 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상태가 왜 이래?’

자세히 보니 피부도 평소보다 희멀건 한 것이 창백하게 질려 있다.

“괜찮아요?”

내 물음에 헉, 숨을 몰아내 쉰 루카스가 비틀비틀 뒤로 물러나며 제 이마를 손으로 짚는다.

“저 여자가 어떻게….”

나는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루카스를 이끌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왜 그래? 아는 사람 아니었어?”

“내가 자신의 운명이라며 저주에 걸리기 전날 밤까지 지독하게 따라다닌 여자다.”

“사람들이 멜리사 왕녀가 루카스 황자의 연인이었다던데?”

내 말에 루카스가 이를 부득 갈며 험악하게 인상을 일그러뜨린다.

“나의 사랑을 얻을 것이라며 세작을 부려 내 손톱을 모아 가던 빌어먹을 여자가 연인은 무슨! 한밤중에 벌거벗은 몸으로 찾아온 적이 부지기수다.”

암살자가 마음을 먹어도 황자의 침실 경비를 그렇게나 자주 뚫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루카스가 신경질적으로 말을 덧붙인다.

‘스토커였단 말이네.’

“그럼 혹시 루카스를 알아본 것 같았어?”

“전혀. 사별한 공작을 위로하듯 말하며 눈물만 자아내더군.”

나는 루카스의 대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루카스를 알아본 것도 아니면서 왜 친분도 없는 내 생일 파티에 온 거지?’

“일단 올라가서 쉬고 있어.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

멜리사 왕녀의 스토킹이 무시무시했던 건지, 루카스의 낯이 본 적 없이 희게 질려 있었다.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해 셀리아에게 맡긴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사람들의 중심에 선 멜리사에게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입니다.”

아직 어리긴 해도 나는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었다.

내 등장에 귀부인들이 일제히 흩어지며 길을 터 준다.

짧게 고개를 끄덕여 그들에게 감사를 표한 나는 멜리사 쪽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제 생일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귀한 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이 자리에 와 주신 모든 분들에게요.”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하는 아이를 싫어하는 어른은 없었다.

내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귀부인 한 명이 레이스 장갑까지 벗어 가며 내게 악수를 청한다.

“아무렴 요즘 사교계의 화두 중의 화두라는 하차니아 공녀님의 생일인데요.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네요.”

영지 대신 수도에만 머무르는 귀족 중에서도 가문의 역사가 깊은 카자니아 백작 부인이었다.

‘연회를 대비해 수도 귀족의 얼굴이란 얼굴은 싹 다 외웠지.’

나는 수줍다는 듯 사과 같은 뺨을 붉히며 부인의 손을 맞잡았다.

“레이디 카자니아, 할머니께서 카자니아 부인에 대해 종종 말씀해 주셨어요. 무척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시니 배울 점이 많을 거라고요.”

티에리는 아직까지도 황도에서 명성이 자자한 귀부인인데다 요즘 한창 주가가 오른 마담 아그네스 살롱의 주인이었다.

그런 티에리를 언급하며 카자니아 부인을 한껏 띄우자 그녀가 내가 기특하다는 듯 후후 미소 짓는다.

“어휴, 아직 연치도 어린 공녀님이 어쩜 이리 예의가 바르실까.”

사교계의 어른이나 마찬가지인 카자니아의 말에 주변 귀부인들이 서둘러 맞장구를 치기 시작한다.

“게다가 정말 소문만큼, 아니 소문보다도 더 예쁜 소녀네요, 호호호! 멜리사, 사교계의 꽃 자리가 정말로 위험한 거 아닌가요?”

“일간특급에서도 그러지 않았나요? 사교계의 꽃들, 전부 다 비켜! 라고.”

부인들의 우스갯소리에 멜리사 왕녀는 ‘정말 제 자리를 비켜 드려야겠어요.’ 하며 따라 웃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그녀만 예의주시하고 있던 나는 파들파들 떨리는 그녀의 입꼬리를 발견하고 말았다.

“하아. 사랑스러운 공녀님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 어리기만 한 제 딸이 생각나네요.”

멜리사는 제 옆에 바짝 붙어 있는 딸이 마치 자리에 없는 것처럼 한탄하며 희고 가는 팔을 허공에 뻗었다.

“아아, 그리운 나의 황자님! 황자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공작님이 공녀님을 아끼시는 것만큼 사랑해 주셨을 텐데.”

듣는 사람마저 울컥하게 만드는 절절한 목소리였다.

“사랑하는 남자의 성도 따르지 못한 제가 살아 있을 가치가 있을까요….”

왕녀의 말 한마디에 내게 쏠렸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멜리사에게 쏟아진다.

“어머, 왕녀님! 그런 무서운 말씀 마세요. 가치가 없다뇨?”

“왕녀님처럼 순애보적인 사랑을 하실 수 있는 분이 어디 흔한가요? 죽은 황자 전하 때문에 타국 왕의 청혼까지 거절하신 분인데!”

나는 마치 무대에 오른 것처럼 열연을 펼치는 멜리사와 울먹이는 귀부인들의 모습에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루카스와의 사랑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내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었구나.’

사교계의 사람들은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 이야기가 비극적이라면 더더욱.

“저는, 공작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음이 너무 아파 감히 눈을 감을 수도 없는 밤이 셀 수도 없으셨겠죠.”

“아아, 멜리사 왕녀. 이제 겨우 인사만 나눴을 뿐인 공작님을 이렇게나 위해 주다니요.”

“역시 천사처럼 고운 마음씨를 가진 왕녀님이라니까요.”

‘이것 봐라?’

나는 멜리사를 위로하는 사람들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멜리사는 하차니아 공작가의 비극까지 자신을 위한 무대 장치로 이용할 심산인 듯싶었다.

‘허. 누가 순순히 이용당해 줄 줄 알고?’

눈에 띄지 않게 살짝 인상을 찡그린 나는 혀를 쯧쯧 차며 발목까지 닿는 멜리사의 긴 머리칼을 힐끔했다.

“……엥?”

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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