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81)화 (316/486)

제81화

“네가 그 유명한 하차니아의 막내 공녀로구나.”

재빨리 모습을 감췄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내 목덜미를 붙들고 끌어내는 듯한 교황의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에 느릿느릿 루카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예, 성하.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여신 루엘라의 가장 자애로운 따님을 뵙습니다.”

예의를 갖춘 내 인사가 만족스러웠는지 발레리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소문처럼 아주 귀여운 소녀로구나. 네가 공작을 도와 자르파라 상단이 몸집을 불리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지.”

도톰한 입술이 매혹적인 그녀는 상당한 미인이었는데, 매력적인 그녀의 미소에 시녀들이 얼굴을 붉히며 꺄악, 작은 탄성을 내지른다.

“아, 아뇨. 도움은 무슨! 저는 아직 어린애인걸요.”

“보통의 어린애는 자신이 어린애가 아니라고 우길 텐데, 공녀는 좀 남다른 구석이 있군.”

교황은 셉터를 들지 않은 손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붙잡아 올렸다.

나는 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그녀의 백안에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이 샅샅이 벗겨져 살점 하나 남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오호. 이 몸의 눈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는구나.”

‘나 지금 겁 엄청 먹었는데 무슨 소리지.’

“루엘라 님의 은총을 받은 이 몸의 위대한 법왕안(法王眼)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 인간은 성인 중에도 극히 드문데 말이야.”

나는 내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그녀를 마주한 채 떨떠름한 입꼬리를 올렸다.

“흥미로워.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아이를 발견했노라.”

내 얼굴을 뜯어보듯 관찰하던 교황은 루카스가 제 팔을 붙잡아 치울 때까지 내 턱을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내 딸이 성하를 불편해하는 것 같습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감히 교황의 몸에 손을 댄 루카스가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린 채 입을 연다.

“물러서 주십시오.”

루카스의 시건방진 부탁에 교황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감히 공작 따위가 이 몸의 행동을 저지하는 것이냐.”

“어린 딸을 보호하고자 할 뿐입니다. 자애로운 여신께선 이해하실 텐데요.”

교황은 루카스가 제 앞에서 여신을 들먹이자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보호라, 흐음….”

셉터의 끝을 장식한 사파이어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린 그녀가 고민하듯 입을 연다.

“방금 황녀가 공녀를 배동으로 삼고자 한 것 같은데…. 이 몸이 바로 들은 게 맞는가?”

“예, 성하.”

황제면 몰라도 황녀인 아이네스는 확실히 교황의 밑이었다.

발레리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아이네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이 몸이 공녀를 시동으로 삼고자 하니 황녀가 양보하게나.”

교황의 등장에 얌전한 아이 흉내를 내던 아이네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다.

“하, 하지만 공녀는 제가 먼저-!”

“어허! 제국을 비추는 자애로운 태양, 루엘라의 첫 번째 종이자 가장 사랑받는 딸인 이 몸께서 몸소 공녀를 시동 삼고자 하는데 한낱 황녀가 방해코자 하는 건가?!”

교황은 루엘라드 교황의 상징인 사파이어 셉터를 높이 치켜들며 노발대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는 여신 루엘라를 황실이 모욕하고자 함인가! 윌레닌 황가는 지난했던 백합전쟁을 반복하고 싶은 것인가!”

백합전쟁은 수십 년간 대신전과 황실이 벌였던 내전을 뜻했다.

교황의 엄한 목소리에 그레고르의 뒤에 서 있던 황족과 귀족들이 사색이 되어 앞으로 튀어나온다.

“저, 절대 아닙니다! 성하!”

“황녀 전하, 어딜 감히 교황 성하의 말씀에 토를 다십니까!”

나는 자신이 먼저 요구했다며 뚱한 얼굴로 토라진 아이네스와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하는 발레리를 번갈아 바라보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누가 너희 수발 들어준대?’

황녀의 배동도, 교황의 시동도 지금 같아선 절대 사양이었다.

어떻게 거절해야 미움을 받지 않고 무난히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던 나는 왈칵 울음을 터뜨리며 루카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끄읍, 흡!”

“공녀. 갑자기 왜 울음을 터뜨리는 것인가?”

깜짝 놀란 교황이 나를 돌아본다.

“죄, 죄송하지만, 끕! 저는 황녀 전하의 배동도 교황 성하의 시동도 못 할 것 같아요, 흐윽.”

정말 면구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인 나는 내 옆에 선 루카스의 손을 꼭 붙들었다.

“이유가 무엇인고?”

“아빠를 간병해야 하거든요.”

쿨럭.

내가 뇌속성 마나를 이용해 손바닥을 자극하자 루카스가 깜짝 놀라 헛기침을 한다.

“공작에게 병환이 있었던가? 병명을 말해 주면 이 몸이 성력으로 치료해줄 수도 있네.”

“우리 아빠는….”

나는 교황의 물음에 잔머리를 굴리다 느릿느릿 입술을 벌렸다.

“불면증을 앓고 계세요. 의사도 이유를 찾지 못한 불면증이요.”

“…뭐라?”

“성수로도, 약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불면 증세가 있으세요.”

내 말에 교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원작에서 묘사된 교황의 병이 불면증이었지.’

그녀가 괜히 아이네스에게 집착하게 되는 게 아니었다.

‘발레리는 아이네스가 곁에 있어야만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캐릭터였으니까.’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다고 하면 딱하게 여기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잖아!

“아빠는 제가 곁에 있어야 겨우 주무실 수 있거든요. 성하의 시동이 된다는 건 정말 엄청난 영광이라는 건 알지만, 제가 교황청으로 거처를 옮길 수는 없어서요.”

빠른 계산 끝에 덧붙인 거짓말에 발레리가 흐음, 긴 침음을 흘린다.

“그거 안 됐군. 불면증이라…. 정말 괴로운 병일 텐데.”

물론 교황인 그녀가 성력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건 새어 나가서는 안 될 비밀이었다.

“어쩔 수 없군. 자애로운 이 몸께서 공녀를 포기하겠네.”

해서 자신도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걸 티 낼 수 없는 발레리는 딱한 시선으로 루카스를 바라보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배, 배동은 굳이 황성에 살지 않아도 괜찮잖아!”

교황이 연회장을 벗어나는 것을 확인한 아이네스가 버럭 목소리를 높인다.

“가끔만 와, 가끔. 내게는 공녀가 꼭 필요해.”

나는 탐욕스러운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아이네스를 향해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녀 전하. 정식으로 배동은 되지 못하겠지만 가끔이라면 들를게요.”

‘어차피 루카스 몸도 찾아야 하고.’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아이네스가 히죽 웃으며 손뼉을 친다.

“그럼 이제 연회를 즐기도록 해요. 다들 내 생일을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등장 이후 처음으로 온화한 여주다운 미소를 지으며 악단의 연주를 지시했다.

“놀이 친구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서신으로 보내도록 할게. 나중에 봐, 공녀.”

“네, 황녀 전하.”

그레고르에게 안긴 아이네스가 상석으로 멀어지자, 이때껏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서서 그들을 노려보던 루카스가 나를 돌아보며 험악하게 인상을 구긴다.

“위험하게 무슨 짓이야. 황녀의 배동을 네가 왜.”

나는 그의 뚱한 목소리에 당황해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어차피 황성을 자주 드나들 핑계가 필요했는걸. 루카스 몸 찾아야 하잖아.]

듣는 귀가 많은 곳에서 함부로 떠들 수가 없어 공명을 시도하자, 그가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뿌리친다.

[그놈의 몸, 몸. 너는 나를 네 아비의 몸에서 내보내기 위해 정말 지독하게도 노력하는군.]

아니, 제 몸 찾아 준다고 해도 지랄이네.

나는 공명으로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틱틱거리고 있다는 게 그대로 느껴지는 루카스의 싹퉁바가지 없는 말에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내 기분이 상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태도로 나를 노려보던 루카스가 휙, 등을 돌려 연회장을 나가버린다.

‘갑자기 왜 저래?’

기가 막히고 어이도 없었지만, ‘아빠를 무척 위하는 딸’ 맹연기를 펼쳐 놓고 그를 따라 나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여덟 살 작은 여자아이 몸으로 성인 남성, 그것도 엄청난 장신에 속하는 그를 따라잡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달리고 나서야 겨우 그의 손목을 낚아챌 수 있었다.

“왜, 흐억, 왜 갑자기 화를 내?!”

“…됐다. 넌 아무것도 몰라.”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단 말이야! 몸과 영혼이 분리될 수 있는 시간의 한계가 10년이라면서!”

인적이 드문 밤의 정원.

풀벌레 소리만 드문드문 울리는 들판 위에서 나는 지난 5년간 다른 사람처럼 날카로워진 ‘아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에서 가스파르의 흔적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그러다 루카스까지 사라지면 어떡해!”

나는 더는 누구든 잃고 싶지 않았다.

노엘도, 가스파르도.

나를 사랑한 어른들은 결국 내 곁을 떠나 버렸으니까.

“…뭐?”

“내가! 끅! 루카스까지….”

“…….”

“사라져 버릴까 봐! 얼마나, 흑, 무서운지! 하나도! 하나도 모르면서어!”

루카스는 결국 눈물을 찔끔 흘리고만 나를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다 엉성하게 팔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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