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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80)화 (315/486)

제80화

하늘하늘한 브루넷의 녹안,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것처럼 연약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그레고르의 품에 안겨 등장했다.

나는 순한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는 아이네스를 발견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드디어 너를 만나는구나.’

눈을 마주친 아이네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발견한 아이네스의 새파란 녹안이 휘둥그레 커진다.

‘원작 안 읽어도 알겠어. 또 ‘마나통!!!’하고 외치고 있겠지.’

아이네스와 내가 앓게 될 병은 분명 같은 병이었지만, 그녀는 체질적으로 발병이 되기도 전에 몸이 아픈 것처럼 보였다.

‘마나가 모자라서 활동하는 게 불편하다고 했던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네스의 몸과 가장 잘 ‘맞는’ 마나가 나의 것이라서 그녀는 아직까지도 내 마나를 탐내고 있었다.

마나 추출이 인체에 해롭다는 걸 알면서도 나를 ‘마나통’ 따위로 부르는 인성부터가 원작 여주로서는 실격 아닌가 싶었지만.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 드십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연회홀을 누비던 몇몇 귀족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다.

“천복을 누리소서!”

“만복을 누리소서!”

나는 무릎을 꿇기는커녕 살벌한 얼굴로 그레고르를 노려보고 있는 루카스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허리를 숙였다.

“그래. 황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리 많은….”

사람들을 굽어 살핀 그레고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사람이 왜 이렇게 적은 거지? 5대 귀족가를 포함한 중앙 귀족과 수도 귀족 전원을 초대하라 말했을 텐데.”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귀족원에서 남부는 해적들과 씨름하고 있고 서부는 내란, 동부는 연합국과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지라 황도까지 올라오기는 힘들다는 말을 전해 왔습니다.”

시종의 대답에 그레고르는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자신들의 옹색한 영지를 지키느라 하나뿐인 황녀의 생일에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는 건가?”

“예, 폐하.”

“고작 내전 따위 때문에? 짐을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고작?’

나는 그레고르의 단어 선택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짓고 싶었지만, 티 내지 않기 위해 볼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초대를 받고도 오지 않은 귀족들의 이름을 추려 올려라. 내 친히 황명으로 다스릴 것이다.”

“하, 하오나 폐하! 황녀 전하의 생일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건 엄밀히 따지자면 제국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옵니다.”

나는 벌벌 떨면서도 그레고르에게 충언을 올리는 시종의 얼굴을 힐끔했다.

‘오래 못 살겠네.’

관상은 볼 줄 모르지만 느낌이 그랬다.

“지금 감히 짐의 말에 반기를 드는 건가! 건방진 놈!”

내 예상대로 시종의 말에 울컥 목소리를 높인 그레고르가 칼을 뽑아 든다.

썩둑.

그레고르는 아이네스를 품에 안은 채 시종에게 검을 휘둘렀다.

“허억.”

허공에 검붉은 궤적을 그리며 시종이 쓰러진다.

안 그래도 적막이 감돌았던 연회장에 살벌한 침묵이 깔렸다.

‘…미친놈 아냐, 저거?’

거의 폭군을 넘어선 광인 수준 아닌지.

“쯧. 아이네스, 괜찮으냐?”

순식간에 팔을 잃은 시종이 거품을 물고 쓰러지든 말든, 그레고르는 제 품에 안긴 아이네스만 어화둥둥 달랬다.

“피가 묻었군.”

“괜찮아요, 아빠.”

핏방울이 튄 뺨을 태연한 얼굴로 닦아 낸 아이네스는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하는 시종을 가리키며 예쁜 입술을 움직였다.

“저 쓰레기, 치우지 않고 뭐하는 거야?”

“네, 네! 황녀 전하!”

아이의 말 한마디에 새하얗게 질린 시녀들이 시종을 부축해 홀을 빠져나간다.

눈앞에 펼쳐진 살풍경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나, 황성 괜히 온 거 아냐?’

차라리 아티팩트로 몸을 감추고 몰래 올걸.

‘원작으로 속내를 파악할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완전한 폭군 부녀로 각성한 듯한 그레고르와 아이네스의 모습에 기겁하며 숨을 삼키는데 커다란 손이 내 작은 주먹을 감싸 쥔다.

“괜찮다. 내가 있으니까.”

루카스였다.

아까부터 그레고르를 빤히 노려보던 그가 언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는지 검붉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빠처럼 자상한 눈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는 다감한 눈빛이었다.

“겁먹을 필요 없다. 그레고르 저놈은 검사인 주제에 마법사인 내게 검술로도 밀렸던 너절한 놈이니까.”

“으응.”

나는 루카스의 말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리 폭군 부녀래도 5대 귀족에 속하는 공작가의 가주와 공녀에게까지 막무가내로 굴지는 못하겠지.’

게다가 하차니아 공작가는 더는 옛날의 하차니아가 아니었다.

‘우리가 북부 귀족의 중심을 꽉 잡고 있는 데다 자르파라 상단이 제국의 무역까지 틀어쥐고 있어.’

하차니아의 자르파라를 거치지 않으면 타국과의 거래가 불가능한 것이 작금의 상황이었다.

‘그러니 설마 지금의 하차니아를 다짜고짜 공격하겠어?’

그러나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아빠.”

그레고르의 품안에 인형처럼 안겨 눈만 깜빡이던 아이네스가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킨다.

“나 쟤 갖고 싶어. 나 줘.”

“…….”

아이네스에게 콕 점 찍힌 나는 눈만 데구르르 굴리다 루카스 뒤로 숨어 버렸다.

“흠. 하차니아의 공녀를 말하는 것이로구나.”

루카스의 등 뒤에 숨어 발만 삐죽 튀어나온 내 얼굴을 굳이 굳이 따라와 확인한 그레고르가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루카스의 어깨를 내려친다.

“공. 내 딸이 이 아이를 달라는데, 주는 게 어떠한가?”

“싫습니다.”

“어차피 자네 딸도 아니지 않은가? 신탁에 의하면 사생아, 그것도 배덕한 여자의 사생아라던데. 일찌감치 버려버리는 게 공의 신상에 좋을 것이야.”

그레고르의 말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제각기 놀란 숨을 들이켠다.

‘이건 면전에다 대놓고 네 부인이 바람피워서 낳은 자식이라고 흉을 보는 거잖아?’

루카스가 가스파르가 아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크게 화가 났을-

“누가 그딴 개소리를 했답니까.”

으드득.

나는 바로 위에서 들려오는 이빨 갈리는 소리에 휘둥그레 눈을 떴다.

“레오노라 공녀는 내 딸이 맞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씹어 뱉듯 잔뜩 힘을 주며 발음한 루카스가 제 어깨를 붙든 그레고르의 손을 탁 소리가 나게 떨쳐 낸다.

“황녀 전하의 장난감으로 드릴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허. 그간 공의 성정이 많이 날카로워졌군.”

루카스의 단호한 거절에 그레고르가 민망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다.

‘시종의 팔은 썩둑 잘라 버리는 폭군이지만, 아무래도 공작은 함부로 건들기 힘든 모양이지.’

실없는 웃음을 흘리면서도 살기를 담아 루카스를 노려보는 그레고르의 얼굴을 힐끔하는데,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네스가 차분히 입을 연다.

“장난감으로 달라는 말 아니었어요, 공작님. 저는 공녀를 제 배동(陪童)으로 삼고 싶어요.”

“…놀이 친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제가 장난으로 공녀를 달라고 했더니 놀라셨나 봐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아이네스가 순한 눈매를 접으며 배시시 웃는다.

순간적으로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나는 흠칫 놀라 루카스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실베스테르도 프란츠의 배동이었으니 딱히 특이한 요청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아이네스가 나를 배동으로 삼고 싶어 하는 이유가 너무 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배동이 되면 황궁을 드나들 수 있으니 루카스의 몸을 찾는 게 조금 더 수월해지긴 할 거야.’

[고민해 본다고 해.]

공명으로 루카스에게 내 뜻을 전하는데,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뚜하니 그레고르와 아이네스를 노려보던 그가 잘생긴 눈썹을 쓱 들어올린다.

“싫,”

[아니, 고민해 본다고 하라니까!]

거절의 의사를 표하려는 루카스에 놀라 내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긴 순간이었다.

“교황 성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의 외침에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삐걱 움직이며 사람들의 고개가 휙휙 돌아가기 시작했다.

“성하께서 황녀 전하의 생일 연회에는 무슨 일이신 거지?”

“황실과 대신전은 사이가 안 좋지 않았나?”

쑥덕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헌칠한 키를 자랑하는 교황 발레리아누스 3세였다.

탁. 탁. 탁.

교황의 셉터로 바닥을 일정하게 내려치며 연회장에 들어서는 그녀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교황 발레리라면 원작의 메인 빌런이잖아?’

포악한 권력자의 눈에는 아예 안 띄는 게 신상에 이로웠다.

‘어차피 아이네스에게만 관심을 가지겠지만.’

그녀는 아이네스를 너무 귀여워한 나머지 집착 스토커로 변질해서 그레고르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이었으니까.

‘히스, 너도 이리와. 나 무서워!’

내가 입모양을 벙긋하며 하는 말에 히스가 재빨리 곁으로 다가와 내 손을 붙잡는다.

히스와 함께 루카스의 드넓은 등 뒤로 몸을 쏘옥 숨긴 나는 조용한 연회장을 울리는 교황의 구두 굽 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누가 빌런 아니랄까 봐 발소리도 무섭네.’

또각. 또각. 타악.

귀를 찌를 듯 날카롭던 그녀의 발소리가 드디어 잦아들었다.

‘무섭긴 하지만, 원작 여주와 빌런이 처음 마주치는 장면을 놓칠 수는 없지.’

그녀와 아이네스의 조우를 구경하기 위해 루카스의 로브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나는 기겁하며 다시 루카스의 등에 답삭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왜, 왜 나를 보고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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