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79)화 (314/486)

제79화

쯧쯧.

시종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찬 나는 히스와 루카스를 이끌고 홀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판촉물로 쓰려고 때 빼고 광 내서 데려온 건데 쓸모가 없어졌잖아.’

실망한 내가 뚱한 얼굴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자, 커다란 수정구가 가운데 박힌 네모난 아티팩트를 손에 든 여자가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호, 혹시 하차니아 공작님과 공녀님 아니신가요?”

“맞는데.”

“꺄아악~! 세상에!!”

찰칵-! 찰칵-!

내 대답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감탄을 내지른 여자는 아티팩트에 달린 볼록한 주머니를 눌러 대기 시작했다.

요란한 셔터 소리와 함께 내 찡그린 얼굴이 수정구 속에 고스란히 옮겨진다.

‘이 세계에도 초상권이라는 게 있었나?’

사업한다고 세법은 꽤 꼼꼼히 공부했지만-탈세하려고- 다른 쪽 법률은 쳐다보지도 않아서 모르겠다.

“북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그’ 공녀님을 실제로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저는 제국 제일의 타블로이드지, ‘일간특급’의 기자 써머 소르베라고 합니다!”

아, 그 쓰레기 가십지.

한숨을 푹 내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자의 시선을 피했다.

‘일간특급’은 <아.황.장>에도 언급될 만큼 제법 덩치가 큰 신문사 발렌타인의 메인 타블로이드지였다.

적랑의 단주인 트리스탄과 흑랑의 단주인 자카리를 양손의 꽃처럼 끼고 다니던 아이네스가 일약 스타덤에 올라 1면을 장식했던 장면이 기억이 난다.

‘얽히면 꽤나 피곤해질 거야.’

나는 아이네스가 너무 유명해진 탓에 더는 길거리 음식을 사 먹을 수 없게 되었다는 원작의 묘사를 떠올리며 무심하게 턱을 괴었다.

“중앙 귀족 거스러미나 줍고 다니는 사람이 내게는 무슨 볼일이지?”

부러 차갑게 대꾸해 내쫓을 심산이었는데, 딱히 효과는 없어 보였다.

내 싹퉁바가지 없는 말에 아까처럼 탄성을 내지른 여자는 ‘이렇게나 어리신데도 벌써부터 카리스마가!’라며 발을 동동 구르더니 내게 명함 하나를 불쑥 들이밀었다.

[써머 소르베 (Summer Sorbet) / 연예부장 ]

“무슨 볼일이냐고.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발렌타인 사의 마크가 찍힌 명함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나는 이어질 여자의 말을 기다렸다.

“혹시 방금 찍은 사진을 ‘일간특급’에 실어도 괜찮을까요?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으신 분이지만, 공녀님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거든요.”

“나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왜?”

설마 브리넨 구휼원을 박살 낸 사람이 나라는 소문이라도 퍼진 건가.

‘트리스탄 그놈 입을 더 확실히 단속했어야 하는데!’

“어휴, 당연하잖아요! 무려 ‘그’ 하차니아 공작가의 막내 공녀님이신데요. 유서 깊은 명문가이면서도 틀에 박히지 않은 행보를 걷는 공작가 말이에요!”

나는 하차니아 공작가를 장식하는 수식어가 생소해 인상을 찡그렸다.

‘그’ 하차니아 공작가라니?

“공녀님은 손을 대는 족족 사업을 성공시킨다는 신의 손 가스파르 공작님의 따님이신데다 황자조차 발닦개처럼 부린다는 실베스테르 공자님과 최연소로 적랑에 입단한 천재 소울나이츠 에녹 공자님의 여동생이시잖아요?!”

“뭐, 내가 실비와 에녹의 여동생이긴 한데….”

아빠 딸인 것도 맞고.

나는 칭찬 일색인 기자의 말이 영 낯설어 떨떠름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써머라는 여자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혹독한 특훈과 무명(無名) 기사의 지도 아래 빠르게 성장한 에녹은 트리스탄보다도 먼저 적랑에 입단했고,

더는 제 능력과 힘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실베스테르가 선보이는 거침없는 실력에 매료된 황자가 실비의 발닦개를 자처하는 중이긴 했으니까.

‘하차니아가 투자하는 사업 번성이야 뭐, 나와 자르파라의 합작이지만.’

대외적으로 공작가의 자본을 움직인 사람은 가스파르-그러니까 루카스-였으니 하차니아 공작의 선구안이 매우 뛰어나 보이긴 할 터였다.

‘하지만 일간지 기자가 눈을 빛낼 정도로 유명해진 줄은 몰랐는데.’

내가 수도에서 홍보하고 싶었던 건 자르파라 상단이 유통하는 제품이었지, 하차니아 공작가가 아니었는데.

‘유명해질 줄 알았으면 진즉 이름부터 바꿔 놓을걸!’

안타까움에 주먹을 앙당그레 말아 쥔 나를 바라보며 침을 주르륵 흘린 여자가 내 의아한 시선에 느릿느릿 입을 벌린다.

“아아, 마담 아그네스의 유일한 뮤즈라시길래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너무 궁금했는데 이 정도이실 줄이야!”

내 얼굴이 먹음직스러운 딸기 케이크라도 되는 양 두 손을 맞잡은 채 황홀한 눈으로 구경하던 써머는 사진을 더 남겨야겠다며 연신 셔터를 눌러 댔다.

“곧 공녀님께서 경국지색 소리를 듣는 대배우 벨루치 양과 함께 스타덤에 오르실 모습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네요. 하아앙.”

아니, 그런 거에 오르고 싶지 않다니까.

인상을 찡그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써머의 아티팩트를 빼앗아 들었다.

“사진을 찍어도 된다고 허락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불쾌해.”

“그렇지만 오늘 입으신 의상, 마담 아그네스의 드레스 아닌가요?”

자신의 말에 내가 움찔하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써머가 내 뒤에 시립한 히스와 루카스를 번갈아 바라본다.

“공작님과 저 도련님이 입으신 의상도 마담 아그네스의 작품 같은데요. 하차니아가 막대한 거금을 들여 이제 막 문을 연 마담 아그네스의 살롱에 투자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답니다.”

나는 일간지 기자의 남다른 정보력에 내심 놀랐지만, 티내지 않고 무심한 척 입을 열었다.

“내가 마치 마담 아그네스의 드레스를 홍보하려고 연회에 왔다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니셨나요? 하지만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신 아이네스 황녀님과 레오노라 공녀님은 친분이 전혀 없으실 텐데요.”

친분은 없었지만, 내적 친밀도는 높다 못해 아예 맥스(max)를 찍는 중이었다.

내가 아이네스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꿈에도 모를 써머가 속삭이듯 얇은 입술을 움직인다.

“저희 일간지 홍보비가 꽤 비싼데, 이번만큼은 무료로 해 드릴게요. 광고라는 게 티 나지 않게 문구도 아주 은근하게 뽑아드릴 거고요.”

‘이, 이게 바로 뒷광고인가?’

나는 은밀한 써머의 목소리에 침을 꼴깍 삼키며 히스와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루카스가 자꾸 공짜 밝히면 머리 벗겨질 거라고 경고하긴 했었는데….’

돈을 엄청나게 벌었어도 여전히 공짜에 혹하는 건 인간 본능이라 어쩔 수 없었다.

“돈을 전혀 안 받을 거라고? 대가는?”

“공녀님과의 친분이요. 저, 알아 두시면 꽤 유용할 거예요. 이래 봬도 아는 게 많거든요.”

말마따나 그녀의 정보력은 일간지 기자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래? 그럼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네! 뭐든지요!”

나는 그녀의 말에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여전히 한산한 연회장을 둘러보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래도 황녀 전하의 생일을 기념하는 연회인데, 어떻게 이 정도까지 사람이 없는 거지?”

“어머! 북부에서 오신 분이라 역시 수도 사교계의 사정에는 귀가 어두우신 모양이군요.”

써머 소르베, 공녀님의 발과 귀가 되어 드릴 자신이 있답니다.

작게 말을 덧붙이며 씨익 웃은 여자는 사진기 아티팩트를 주섬주섬 챙겨 넣으며 아직 빈 상석을 힐끔했다.

“지금 황제 폐하에 대한 수도 귀족들의 반감이 상당해요. 게다가 황녀님도 민심을 꽤나 잃으셨고요. 그러니 이 와중에 황녀 전하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은 귀족은 손에 꼽을 정도일 거예요.”

나는 써머의 말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무리 원작 초반이라지만, 아이네스가 그레고르를 제법 꼬셔 놓은 상태였다.

‘그럼 이제 제대로 된 황제 노릇을 시작할 시점 아닌가?’

게다가 아이네스가 민심을 잃었다니.

그녀는 원작에서 분명 ‘모두에게 사랑받는 황녀님’이었다.

그러니까 제국민을 포함한 모두에게.

“왜 민심을 잃은 건데?”

“폐하께서 황녀님의 놀이터를 만든다고 황성 인근 민가를 싹 밀어 버리셨거든요.”

“……뭐?”

“바하무스 5구역 바깥까지 거주지를 전부 밀어 버리신 탓에 갑자기 집을 잃은 사람들 수만 수백 명이 넘어요.”

5구역이라면 귀족들이 거주하는 로열스퀘어를 넘어선, 평민들의 집터였다.

나는 그레고르의 횡포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아무리 딸바보 폭군이라지만 황제가 수백 명의 백성을 노숙자로 만들었다고?’

이상했다.

원작의 아이네스라면 분명 그레고르의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막았을 텐데.

“황녀 전하는? 아이네스 황녀 전하가 반대하진 않으셨대?”

“반대는 무슨! 민가를 밀고 지은 놀이동산에서 좋다고 까르르 돌아다니시는 거, 제가 사진까지 찍었는데요.”

“…….”

“울타리 너머에서 집을 잃고 울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같이 찍혀서 그날 일간지는 정말 불티나게 팔렸었죠. 후훗.”

나는 뿌듯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는 써머를 바라보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이네스의 성격이 바뀐 건가? 왜?’

원작 내용에서 변한 점이라곤 내가 황궁에 유폐되지 않은 것뿐이었는데.

‘설마 나를 마나통으로 쓰지 못해서 애가 포악해졌나?!’

경악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순간, 드디어 연회의 주인공인 아이네스가 들어올 중앙 문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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