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태어나서 처음 황도에 발을 들인 나는 절벽 끝과 맞닿아 숲을 두르고 있는 공작성과 달리 번화가 한복판에 위치한 하차니아의 수도 저택을 한눈에 담았다.
‘……소담하다더니 하나도 안 작잖아.’
헨리는 공작성에서 나고 자란 내게 타운하우스가 너무 갑갑하게 느껴질 거라며 걱정했었는데, 막상 마주한 저택은 작기는커녕 돌아다니기 힘들 정도의 규모였다.
검푸른 지붕을 자랑하는 저택은 거무튀튀한 회적색 벽돌로 지어졌음에도 화려함이 느껴질 만큼 값비싸 보이는 타운하우스였다.
“혼암의 그림자를 뵙습니다.”
코제트를 쏙 빼닮은 그녀의 동생, 오데트가 공손하게 읍한다. 그녀를 따라 저택 앞에 도열한 고용인들이 일제히 인사를 올렸다.
“혼암의 그림자를 뵙습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그림자가 쉐도우나이츠인 가스파르를 의미함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루카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래. 오랜만이군.”
루카스가 가스파르의 몸을 완전히 차지한 지 어언 5년.
지난 5년간 갖은 핑계로 황제의 소환을 피했으니 그가 수도 저택의 고용인들을 마주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리라.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지.’
공작성 내 고용인들은 멋지게 속여 넘겼지만 황도에는 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몰랐으니까.
“이분이 막내 공녀님이실까요.”
“아, 응! 안녕.”
“언니에게 많은 말씀을 들은 터라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듣던 대로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시네요.”
오데트가 나를 알은체하며 코제트를 닮은 다정한 눈매를 접어가며 웃는다.
“제가 공녀님께 저택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각하께서는 오랜만이긴 하지만 일전에 자주 오셨던 덕에 저택 구조를 잘 아시니까요.”
아니, 하나도 모를 텐데.
걱정하면서도 나는 오데트를 따라나섰다.
“여기가 메인 응접실입니다. 언제든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저희가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만, 공녀님께서 개인 응접실을 사용하고 싶으시다면 침실에 딸린 소거실을 쓰셔도 무방합니다.”
나는 상아와 진주로 꾸며진 새하얀 응접실이 별거 아닌 양 새초롬히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알았어.”
귀족 영애로 태어난 지 어언 8년 차, ‘내 방 거실’ 쯤에는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난 부자잖아.’
아직 번 돈을 제대로 써 본 적은 없었지만, 자르파라의 보고에 따르면 난 엄청난 부자였다.
‘쪼, 쫄지 말자.’
나는 심플한 공작성과 달리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가구로 꾸며진 저택 내부에 침을 꼴깍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어머! 정말 예쁘게 생긴 아이네. 얘, 너 이름이 뭐니?”
“안나, 이리 좀 와 봐! 영지에서 엄청 예쁜 애가 올라왔어!”
코제트를 따라 메인 응접실과 다이닝룸, 그리고 서재까지 구경한 내가 막 거실에 들어설 무렵이었다.
복도에서 흘러 들어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튼 나는 히스를 붙든 하녀 몇몇이 꺄악거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난 처음에 인형이 걸어 들어오는 줄 알았다니까.”
“너무너무 귀엽다-!”
자라지 않는 히스는 섬세한 도자기 인형처럼 예뻤기 때문에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샀다.
게다가 이제 막 티에리 자작가에 입적한 터라 귀족 영식의 옷에 적응을 하지 못해 히스는 늘 고용인 차림으로 다녔으니까.
‘애가 순해서 다행이지. 성질이 조금만 더러웠어도 사람들과 늘 마찰을 빚었을 거야.’
예쁘다고 너도나도 만지려고 드는데 기분 좋게 대응할 아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내일쯤 오데트를 통해 히스 괴롭히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둬야지.’
나는 히스를 대할 때 늘 조심했던 공작성의 고용인들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따로 주의를 준 적도 없는데 공작성에서는 히스에게 귀찮게 달라붙는 사람이 없었다.
‘코제트가 잘 교육시켜서 그런가?’
좀처럼 자라지 않는 모습이 기괴해서일 수도 있고, 뭐.
‘대충 병 때문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
문득 공작성의 고용인들이 히스를 가만히 내버려 둔 이유가 궁금해졌지만, 오데트가 옥상 정원을 보고 싶지 않냐며 내게 말을 거는 탓에 나는 금세 히스에 대해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으르르.
“…….”
으르르르.
“어, 으음. 얘 우리한테 지금 으르렁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야, 라비?”
“아니, 로제.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어.”
수도 저택의 수석 하녀, 로제와 아라비아타는 입도 벙긋하고 있지 않지만 묘하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년을 앞에 두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우, 우리가 너무 무례했나?”
“그랬나 봐.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너무 예쁘게 생겨서 이성을 잃었나 봐.”
으르르. 크르르르.
하녀들의 사과에도 소년은 대답 없이 그녀들을 직시할 뿐이었다.
“……나 좀 무서워지려고 해, 라비.”
“나, 나도. 얘 그냥 하인이 아니었나 봐. 살기가 느껴지는걸?”
“조, 종기사였나? 하지만 백랑의 기사들은 저택 밖에 짐을 풀지 않았어?”
더듬거리는 하녀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히스가 한쪽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냥 죽여버릴까.’
먹구름 낀 하늘처럼 묘하게 그늘진 그의 회청색 눈에 으스스한 살기가 그득 차오르고 있었다.
물론 히스는 레오노라를 따라 공작성에 발을 들인 이후로 단 한 번도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공작성 사람들이 눈앞의 하녀들처럼 자신을 귀찮게 한 적이 없어서?
아니, 전혀 아니었다.
히스가 고용인 노릇을 하며 레오노라의 시중을 들 때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인형처럼 예쁘다며 만져 보려고 들었다.
병기로 길러져 살인에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이 제 귀찮음을 감수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공작성에 개미처럼 들끓는 수많은 사람들을 레오노라가 제법 아끼는 듯 보였으니까.
‘종속된 노예로서 어찌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겠나.’
그런 마음으로 공작성의 고용인들을 인내한-죽이지 않고 넘어간- 히스는 곧 레오노라와 저택의 하녀들은 딱히 친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이번에는 경고로 끝내지 않아도 되겠군.’
짧게 판단한 소년이 왼손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히스.”
중앙 계단을 오도도 타고 내려온 레오노라가 소년에게 달려와 그의 등을 툭 하고 내려친다.
“여기서 뭐 해? 짐은 다 풀었어?”
“고, 공녀님!”
“이 소년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시면-!”
철없는 막내 공녀의 행동에 경악한 하녀들이 순진한 그녀를 위험한 소년에게서 지키기 위해 팔을 뻗었다.
“위험해요!!!”
“응? 뭐가?”
히스의 어깨에 처억 하고 팔을 올린 공녀가 도무지 하녀들이 왜 놀라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휘둥그레 눈을 뜬다.
“위험하긴 뭐가 위험하다는 거야?”
“…위, 위험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하녀들은 삐질 흘렸던 식은땀을 닦으며 공녀에게 찰싹 달라붙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 떨리게 자신들을 노려보던 소년은 진즉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순한 양처럼 커다란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는 소년의 모습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삼켰다.
“설마 히스 말하는 거야?”
레오노라는 무표정하긴 했지만, 맹하고 착하게만 보이는 히스의 예쁜 얼굴을 힐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표정 없다고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마. 히스는 착한 애야.”
“아, 이 소년의 이름이 히스였나요?”
“응. 레이디 티에리의 양자니까 다들 앞으로는 언행에 주의하도록 해.”
“아! 말씀으로만 전해 듣던 티에리 도련님이셨군요!”
“안녕하세요, 도련님!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하차니아 수도 저택의 수석 하녀 로제와 아라비아타라고 해요.”
레오노라의 설명에 깜짝 놀란 하녀들이 그제야 히스에게 고개를 숙인다.
“그래.”
“…….”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한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갈색 정수리들 위로 소년의 무감한 시선이 내리꽂힌다.
하녀들은 제 머리를 반으로 뚝 갈라놓을 것만 같은 날카로운 시선에 등 뒤로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무, 무서워….’
‘고용인 아이로 오해했다고 죽이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어. 저 눈빛은 우리를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이라고!’
오랜 세월 함께 일한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죽음을 예감한 하녀들의 다리가 벌벌 떨려온다.
레오노라는 치마폭에 숨은 그들의 다리가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우리 히스, 여기 있는 동안 잘 부탁해. 너무 착해서 걱정되는 애거든.”
“앗, 예….”
“방금 실수한 건 너무 걱정하지 말고. 화 같은 거 낼 줄 모르는 애니까.”
“아, 예….”
막내 공녀의 말에 감히 반기를 들지 못한 로제와 라비는 떨떠름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화 안 내고 그냥 저희를 죽여 버릴 것 같은데요, 공녀님.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하고.
* * *
드디어 아이네스의 생일 연회 날이 밝았다.
‘오늘의 아이네스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움후후 웃으며 원작을 펼쳐 든 나는 기대감에 반짝이던 눈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게 미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