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신관들이 하차니아에는 무슨 일인데?”
“내 마나를 이어받은 자를 찾기 위해서겠지. 마지막 단서가 북부에서 뚝 끊겼으니까.”
내 날카로운 목소리에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루카스가 뚜하니 대답한다.
‘아니, 아직도 포기를 못 했다고?’
그의 대답에 와락 인상을 구긴 나는 신경질적으로 마법진이 그려진 바닥을 발끝으로 두드렸다.
‘누가 마나 거지 아니랄까 봐! 추접스럽긴.’
대신전은 루카스가 사라진 직후부터 그의 소실된 마나를 추적 중이었다.
대마법사가 죽으면 마나가 대지에 스며드는데 그걸 노리는 것이다.
‘마력과 신력은 통로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 동일한 힘이니까.’
“내가 죽었다고 믿고, 줍는 놈이 임자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작게 중얼거린 루카스는 잔뜩 성질을 부리는 나를 달랑 안아 올린 채 바닥의 마법진과는 조금 다른 진을 허공에 새겨 넣었다.
‘오늘 배울 마법은 뇌속성이라고 했지?’
루카스는 현존하는 대마법사들 중 가장 ‘소울마스터’에 가까운 존재였다. 나는 그가 다루는 다양한 속성의 마법들과 방대한 양의 지식을 날마다 쏙쏙 흡수하는 중이었다.
‘이거 응용하면 주방에서 쓸 만한 아티팩트 만들 수 있겠는걸?’
냉동식품을 곧잘 에어프라이어로 튀겨 먹었던 나는 전생에 즐겨 먹던 군만두를 떠올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집중해라. 오늘 수업에서 마나를 전부 소진해야 감추기 수월할 테니까.”
음식 생각하느라 제 마법진에 집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한 루카스가 잘생긴 눈썹을 꿈틀거린다.
“내 마나를 이어받았다고 믿었던 네게는 마나가 쥐뿔도 발견되지 않았으니 혹여나 나의 마나가 공중 분해된 걸까 봐 신전에서 애가 닳았을 거다.”
나는 루카스의 말에 귀족들의 만류에도 득달같이 공작성에 쳐들어와 나의 마나를 확인하려고 들던 신관들의 탐욕스러운 눈빛을 떠올렸다.
“정말 공녀의 마나 그릇이 텅텅 빈 겁니까? 원래 아기 때만 마력을 부릴 수 있는 케이스가 종종 나온다지만, 원래는 오러까지 부릴 수 있었다면서요?”
“아니, 이 정도면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거 아닙니까? 이거 완전 꽝이로군요!”
“믿을 수 없어요. 우리, 다시 확인해 봅시다.”
그들은 내 그릇이 비었다는 사실을 쉽사리 믿지 못하고 몇 번이고 같은 테스트를 진행했었다.
‘으으. 아주 지긋지긋했지.’
미리 루카스에게 마나를 감쪽같이 감추는 법을 배워 놔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 마나가 루카스의 것과 흡사하다는 걸 단박에 들켰으리라.
“흥! 누가 나눠 줄 줄 알고. 절대 안 줘!”
아이네스도 그렇고 신관들도 그렇고, 자기네들이 능력 개발해 마나통을 넓힐 생각은 안 하고 남의 것만 탐하려고 드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열심히 수련해서 복수하고 말거야!”
황실이든 신전이든 아주 개박살을 내 줄 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루카스의 수업에 집중했다.
* * *
마치 나들이를 갔다 온 척, 공작성 근처로 워프한 루카스와 나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으으, 피곤해.”
너무 수업에 열정적으로 임했더니 감출 마나가 남지 않을 만큼 체력을 소모해 버렸다.
집무실로 향하는 루카스에게 설레설레 손을 흔들어 준 나는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네가 그 사생아구나?”
여덟 살 생일을 맞이해 내가 쓰는 공작성의 별채는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갔다.
해서 내 임시 처소는 손님들에게 내어 주는 서쪽 날개였는데, 신전에서 온 사절단이 마침 짐을 푼 모양이었다.
“맞지? 루카스 황자의 사생아.”
나는 내 앞을 가로막은 소년의 무례한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비켜요.”
“사생아라는 호칭에 기분 상해할 필요 없어. 자애로운 여신 루엘라 님은 더러운 피든 천박한 피든 사랑하시니까.”
결국 난 더럽고 천박한 피라는 말이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은 나는 복도를 점령하듯 양팔을 뻗고 내 앞에 선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월계수 이파리가 네 개. 꽤 급이 높은 신관이긴 하네.’
실베스테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소년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왼쪽 어깨에 월계수 잎을 단 고위급 신관이었다.
‘연차가 쌓여서 승진한 케이스는 아닐 테니 신력이 막강하단 뜻이겠지.’
그러니 제 주제를 모르고 내 앞에서 이렇게 까부는 거고.
“비키라고 했을 텐데.”
“까탈스러운 얼굴이 제법 내 취향이야, 너. 마나가 텅텅 빈 ‘빈 그릇’ 치곤 아주 예뻐.”
“…….”
“그 고약한 황자의 피가 섞였다길래 기대도 안 했는데 말이야. 너, 지금처럼만 크면 내가 나중에 애인 삼아 줄 수도 있어.”
미친놈인가?
신관은 어차피 결혼도 못 하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내게 집적거리다니.
‘그냥 내가 돌아가자.’
신관은 귀족과는 별개의 계급인지라 얽히면 나만 피곤해졌다.
‘가뜩이나 요즘 황실이 하차니아를 견제하는데, 괜히 눈 밖에 날 필요 없지.’
소년과 더는 말 섞을 필요조차 없다는 판단을 내린 나는 그를 무시하며 스윽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작위 없는 귀족은 잎사귀를 피워 낸 신관 아래라는 거 몰라? 어딜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자리를 피해!”
나는 내 어깨를 우악스레 붙든 소년을 노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놔.”
“이거 놔? 나한테 반말하는 거야?”
“어. 놓으라니까 왜 못 알아들어? 귓구멍이 막힌 거야?”
내 날카로운 목소리에 소년은 공녀인 나를 차마 때릴 수는 없다는 듯 주먹을 치켜든 채 부들부들 떨어 댔다.
“이게 마력도 신력도 없는 빈 그릇 주제에 까불어, 확!”
그러나 소매 끝에 숨긴 내 주먹만큼 떨리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아오. 마나를 일으켜 한 대 시원하게 후드려 팰 수도 없고 어떻게 해결하지?’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때마침 반대편 복도에 익숙한 인영 둘이 나란히 들어선다.
“리니.”
“레오노라.”
동시에 나를 발견하고 크게 눈을 뜨는 소년들의 정체는 에녹과 실베스테르였다.
‘자식들이 언제 봐도 참 잘 컸단 말이야.’
나는 이제 하녀들의 눈에 뿅뿅 하트가 박히게 할 만큼 무르익은 형제의 미모에 상황도 잊고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었다.
‘누가 키웠는지 아주 잘 컸어.’
그간의 특훈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며 코끝을 찡하게 한다.
‘물론 피부 관리는 자기들이 알아서 한 거지만.’
내가 외모지상주의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형제는 미모를 강박적으로 가꿨으니까.
나는 은은한 진주처럼 빛이 나는 실비와 태양처럼 화려한 에녹을 힐끔하며 입을 열었다.
“실비, 에녹! 이리 좀 와 봐! 얘가 나 괴롭혀!”
“뭐라고?!”
“신관 따위가 공작성에는 무슨 일이지?”
내 부름에 빠르게 다가온 에녹과 실비는 나와 신관 소년 사이에 끼어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 잎사귀가 보이지 않는 건가?”
그러자 소년 신관이 거들먹거리며 제 어깨를 내보인다.
“나는 여신 루엘라 님께 잎사귀를 하사받은 신관이다. 조금 더 공손한 태도를 보이라고.”
아직 작위를 받지 않은 공자들은 날개를 단 고위 신관 아래 계급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지.’
그건 일반적인 사회의 규범을 따르는 귀족들에게나 통용되는 룰이었으니까.
“뭐래, 이 새끼가.”
“수도원에 틀어박혀 기도만 하느라 정신이 나간 건가.”
화르륵-
새빨간 불의 오러가 에녹의 손바닥 위에서 타닥타닥 타오른다.
“손 빼고 얼리는 거 잊지마, 형. 레오노라 만진 손 지져 버리게.”
“알겠다.”
콰쾅, 콰콰쾅-!!!
에녹의 말에 소년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복도를 꽝꽝 얼린 실베스테르는 다른 신관들이 소년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복도 양날개에 빙벽을 세워 버렸다.
“적당히 패 줘.”
나는 신관의 지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을 압박하려 드는 형제의 안하무인 태도에 생긋 웃었다.
‘하차니아 삼남매는 사회 규범 따위 지키지 않지.’
그건 미친개의 이름값이 아까운 짓이었다.
“죽이면 안 되는 거 잊지 말고.”
나는 빙벽 때문에 어두워진 사위에 적응하기 위해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며 소년이 서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다시는 저 못생긴 얼굴 들고 내 눈앞에 얼쩡거리지 못하게 해. 알았지?”
“응, 리니!”
“알겠다.”
내 명령에 씩씩하게 대답한 형제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빙벽으로 만든 동굴에 넓게 울려 퍼진다.
퍼억, 퍽!
“아악, 아아악!!!”
퍽퍽퍽-!
“내, 내 손! 내 소온!!! 악, 거기만은! 내 후계가!”
“신관 주제에 후계는 무슨 놈의 후계야, 이 새끼야! 시끄러우니까 입도 얼려 버려, 형!!”
“좋다.”
‘아, 시원해.’
여름에는 역시 실비가 만든 얼음 동굴이 최고였다.
나는 서늘한 냉기를 뿜는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후후 웃었다.
‘그나저나 이제 곧 아이네스의 생일 연회가 열리니까 대비해야겠어.’
나는 우리 아빠를 돌려받을 준비를 거의 끝마쳐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