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요 근래 기분이 퍽 저조해 보이던-가스파르보다 루카스가 열 배는 더 성격이 나빴으니까- 가주가 미소를 보이자 헨리를 위시한 가신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말을 얹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아가씨가 각하께 말도 잘 걸지 않으셨죠!”
그야 나는 말을 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족제비 같은 수염을 매만지는 가신의 말에 내 기가 막히든 말든, 루카스는 흡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랬던가?”
그랬긴 뭐가 그래, 이 자식아!
“예, 예! 각하의 집무실에 이렇게 자주 찾아오지도 않으셨고요.”
세 살배기 아기 체력으로 매일 집무실을 찾았다간 지쳐 쓰러졌을 터였다.
나는 연이은 가신들의 주장에 눈썹을 꼼톨 움직이다 아효,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좀 위험한데.’
루카스의 입꼬리가 씰룩쌜룩 춤을 추고 있었다.
“아반니.”
“어.”
“아조씨들 좀 내보내조.”
제 소맷부리를 붙잡아 흔드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루카스가 오른손을 치켜든다.
“다들 꺼지도록.”
“넵.”
싹퉁바가지가 없어진 가주의 말투에 재빠르게 적응한 헨리가 행정관들을 이끌고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아효효.”
겨우 한산해진 집무실을 둘러본 나는 책상에 밟고 선 채 내게 무슨 용건이냐는 듯 짙은 눈썹을 들어 올린 루카스와 눈을 마주했다.
“루카쯔, 니니 할 말 이떠.”
내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의심이 확신이 되어버리기 전에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너는 사람들 앞이 아니면 나를 절대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군.”
나는 루카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말에 ‘역시….’하며 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루카쯔, 니니 넘 조아하지 마.” (루카스, 리니 너무 좋아하지 마.)
“…뭐?”
내 말에 루카스의 잘생긴 미간이 와락 일그러진다.
‘앗. 우리 아빠 얼굴에 주름 생긴다.’
나는 가스파르의 미모가 조금이라도 상할까 염려하며 그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피며 말을 덧붙였다.
“니니 넘 조아하지 말라구. 니니는 이미 압빠가 이써. 임쟈가 잇눈 모미야.” (리니 넘 좋아하지 말라고. 리니는 이미 아빠가 있어. 임자가 있는 몸이야.)
애는 하나인데 아빠가 두 명인 건 그림이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신전은 내가 루카스의 마나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황실의 핏줄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결국 나를 키워 준 건 가스파르인걸.’
게다가 루카스가 나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 버리면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내가 너무 좋아져서 가스파르 몸에서 안 나가고 싶어지면 어떡해?’
나도 이런 도끼병 같은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룰루와 랄라를 위시한 고용인들, 헨리를 포함한 가신들, 그리고 가르덴같은 원로들까지 나만 보면 사랑스럽고 귀엽다며 침을 질질 흘리는 통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아라찌, 루카쯔? 우리는 구냥 요만-끔만 치나게 지내는 고야.” (알았지, 루카스? 우리는 그냥 이만큼만 친하게 지내는 거야.)
우리는 비즈니스 관계니까.
“이케 찌끔.” (이렇게 찔끔.)
엄지와 검지 사이를 벌려 작은 틈을 만들었던 나는 딱딱하게 굳은 루카스의 표정에 슬그머니 손가락을 움직였다.
“요, 요만끔만 더 치내질까?”
“됐다.”
인심 쓰듯 틈을 더 벌리는 나를 뚱한 얼굴로 노려보던 루카스가 성가시다는 듯 나를 바닥에 내려놓는다.
“나는 너 하나도 좋아하지 않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
“그, 그래떠?!”
“그래. 너같이 못생긴 아기를 내가 왜.”
“아효, 니니가 또 갠히 걱정핸네!”
나는 내 도끼병을 치료해 주는 살벌한 루카스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뼉까지 쳤다.
‘그래, 그럼 그렇지!’
역시 황위에 오르지 못했다 뿐이지, 폭군의 피가 흐르다 못해 폭군 그 자체인 루카스가 남의 집 아기인 내게 빠져들 리 없었다.
‘루카스가 요즘 날 귀여워하는 것처럼 느낀 건 내 착각이었어!’
아빠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잔뜩 오므렸던 발끝을 펴낸 나는 서류를 살피기 시작한 루카스의 허벅지를 톡톡 두드리며 그를 불렀다.
“루카쯔.”
“…….”
‘서류에 푹 빠졌나? 왜 내 말을 무시하지.’
“루카쯔, 루카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나 싶어 말꼬리를 늘이자 루카스가 휙 매섭게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나를 돌아본다.
“왜. 뭐.”
“니니가 루카쯔 몬 꼬 차자주께!” (리니가 루카스 몸 꼭 찾아줄게!)
“알았다.”
“야쏘하께! 개핵두 이써!” (약속할게! 계획도 있어!)
“알았다고.”
왠지 기분이 저조해 보여서 힘내라고 한 말인데, 그는 내 말에 기분이 더 상한 것처럼 보였다.
‘흥. 계획 있는 거 진짠데!’
하여간 성질머리하곤.
‘서류 처리하는 게 너무너무 싫은 모양이지?’
나는 스트레스를 받는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는 루카스를 뒤로한 채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루카스의 몸을 찾으려면 역시 황궁으로 가야겠지.’
크게 진척은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자라고 있는 아이네스를 묘사하는 원작을 꼼꼼히 살핀 나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언제가 좋을까.’
세월이 흐를수록 아이네스는 황제인 그레고르와 친해질 터였다.
‘그럼 제 삼촌인 루카스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될지도 몰라.’
“움후후.”
양 뺨을 감싸며 사악한 웃음을 흘린 나는 원작이 기특해서 오망성이 그려진 표지를 쓰담쓰담 예뻐해 주었다.
처음에는 백지에 가까워 그냥 쓰레기처럼 보였는데, 정보가 켜켜이 쌓인 지금은 보물 상자나 다름없이 느껴진다.
‘아이네스가 알게 되는 모든 정보가 내 손에 들어오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나는 이제 막 현자 할아버지를 만나 마나 운용법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네스의 이야기를 찬찬히 훑은 다음 어깨를 으쓱했다.
더 효과적인 마나 운용법을 이미 루카스에게 배웠기 때문에 따라 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아이네스가 본궁으로 처소를 옮긴 후에 황성을 방문할 수 있게 된다면 좋을 텐데.’
아직은 그레고르와 데면데면한 아이네스의 현황을 수첩에 정리하던 나는 창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작성 정원이 매우 훌륭하네요. 아름다워요.”
“당신은 이 우아한 성에 어울리는 우아한 공작 부인이 되실 겁니다.”
에엑.
남자의 느끼한 목소리에 내가 헛구역질을 하자, 깜짝 놀란 룰루가 서둘러 창문을 닫는다.
“아가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모리츠 백작님이 하도 닦달해서 어쩔 수 없이 보는 맞선일 뿐이에요.”
“…마썬?”
도대체 우리 집에 맞선을 볼 사람이 누가 있다는 말인가.
‘실비는 고작 열한 살인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랄라가 룰루의 등짝을 화끈하게 내려친다.
“룰루! 아가씨께 말조심하라고 했지!”
“헉! 미안!”
나는 룰루랄라의 대화에 상황을 어림짐작하고 눈을 가늘였다.
‘정례회의 때 공작가 안주인 자리가 공석이라고 그렇게 쪼아 대더니.’
모리츠 백작은 원로회 수장인 가르덴 백작 다음으로 드넓은 봉토를 가진 원로였는데, 그를 위시한 몇몇의 원로들은 행방불명된 노엘이 죽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부관인 헨리가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공작 부인은 꼭 필요하다나 뭐라나.
‘흥. 내가 노엘 꼭 찾을 거거든?’
모리츠 백작을 떠올리며 혀를 낼름한 나는 나를 걱정스레 살피는 룰루랄라에게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웅!”
걱정 안 해도 된다.
어차피 가스파르는 원작에서도 재혼 생각이 전혀-
“움….”
“아가씨?”
“니니, 나가따 오께.”
하지만 지금의 가스파르는 ‘가스파르’가 아니잖아!
가스파르는 노엘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재혼하지 않았지만, 루카스는 또 모를 일이었다.
‘보통 목소리가 예쁘면 얼굴도 예쁘던데!’
나는 창밖에서 들려오던 여자의 목소리가 고왔다는 생각에 빠르게 복도를 내달렸다.
쿵-!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중정에 당도하자마자 이제 막 현관에 발을 디딘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지만.
“아코!”
“괜찮으냐?”
엉덩방아를 찧은 나는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여자! 아까 그 여자인가 봐.’
목소리는 조금 다른 것 같았지만, 아까는 내숭 떠느라 꾀꼬리 흉내를 냈던 모양이다.
“다행이댜!”
“흠? 뭐가 말이지?”
“당신, 하나두 안 예뿌녜!”
너무 안도한 나머지 툭 튀어나간 내 속마음에 딱딱하게 굳은 여자의 얼굴에 실금이 지직 간다.
“헙. 데둉해오!” (헙. 죄송해요!)
나는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니니가 실수해떠. 우리 언마보다 안 예뿌다는 말이어써요!” (리니가 실수했어. 우리 엄마보다 안 예쁘다는 말이었어요!)
허둥지둥 내놓는 변명에 여자가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이 쥐방울만 한 것이.”
“……우웅?”
“역시 이래서 엄마 손길이 필요하다고 한 건데. 못 배워먹어서 예의를 모르는구나.”
신데렐라 그 계집애도 예의라곤 몰랐는데 말이야.
나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이는 여자의 말에 몸을 움찔했다.
‘계, 계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