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가, 각하…?”
당황한 에스티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루카스의 무뚝뚝한 얼굴을 올려다봤지만, 그는 그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나를 달랑 안아 올렸다.
“다쳤군.”
“우웅. 니니 무릅도 아프구 머리두 아파요, 아반니.”
무릎은 진짜 아팠지만, 머리가 아픈 건 물론 뻥이었다. 내 그릇에 깃든 제 마나를 매우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루카스가 신경 쓸 게 뻔했으니까.
“공녀의 몸을 살펴라.”
예상대로 내 말을 홀랑 믿어 버린 루카스가 아이반의 뒷덜미를 콱 붙든 채 이를 부득 간다.
“어서.”
“하, 하지만 제 딸아이도 다쳐서 살펴봐야 합니다. 게다가 단순히 넘어지셨을 뿐인데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는 걸 보니 공녀님은 꾀병을 부리시는 것 같습니다만.”
아이반은 울먹이는 에스티가 신경 쓰이는지 루카스의 명을 거역하며 나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꾀병이면 네가 뭐 어쩔 건데!’
그런 그를 향해 혀를 낼름한 나는 루카스의 품을 파고들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서둘러 진료를 보래도.”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루카스가 내 등을 토닥이며 사납게 입을 연다.
“제 딸아이를 먼저 살피고 보겠습니다. 각하께서도 아버지로서 제 마음을 이해하시겠지요.”
제 눈앞에 서 있는 이가 가스파르인 줄로만 아는 아이반이 양해를 구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가주의 말에 반기를 드는 가신이라, 죽음에 대한 갈망이 대단하군.”
차갑게 읊조린 루카스가 검은 오러를 일으켜 바닥에 새까만 파도를 생성해 냈다.
“지, 진찰하지요! 진찰하겠습니다!”
결국 죽고 싶지 않았던 아이반은 그 자리에서 청진기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 * *
“두통의 원인을 찾아라. 찾지 못하면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
“네, 넵!”
“알겠습니다, 각하!”
루카스의 살벌한 말에 잔뜩 기합이 든 의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몸을 살피기 시작한다.
머리가 아픈 건 꾀병이 맞았기 때문에 아이반은 내가 아픈 원인을 알아내지 못했고, 결국 루카스의 닦달에 의료원에 속한 모든 의사들이 소집되었다.
‘윽! 머리 아파.’
나는 침실에 밀려드는 인파에 한숨을 포옥 내쉬며 지끈지끈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가, 각하. 공녀님이 두통을 앓으시는 이유를 제가 알 것 같습니다.”
무능력한 의사들이 내 동그란 이마며 짜리몽땅한 팔다리며 눌러 대는 통에 진짜로 몸이 아파 오려던 나를 구해준 건 청아한 힐다의 목소리였다.
“발언을 허한다.”
발치에서 내 표정을 신중히 살피던 그녀가 루카스의 허락에 공손히 읍한 후 말문을 연다.
“아가씨께서는 아직 연치가 어려 시각적인 자극에도 많은 에너지를 쓰실 텐데, 지금 침실에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루카스가 무서운지 목소리가 잘게 떨려 오는데도 힐다는 말을 더듬는 법이 없었다.
‘역시 내가 찜한 새 의료원장.’
나는 그녀의 강단이 흡족해 고개를 끄덕였다.
“우웅. 힝다 마리 맞는 고 가태요.” (으응. 힐다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듯 턱을 쓸어내린 루카스가 저마다 청진기를 들고 멀뚱멀뚱 서 있는 의사들을 돌아본다.
“이 의사를 제외하고 전부 꺼지도록.”
“넵, 각하!”
루카스의 명령에 그제야 내 작은 침실이 한산해진다.
“아효.”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걱정 어린 눈길로 나를 살피는 힐다의 손등을 토닥였다.
“고마어, 힝다.”
“공녀님의 건강을 지키는 게 제 의무인 걸요.”
내게 다정한 웃음을 내보인 힐다가 긴장한 얼굴로 루카스를 돌아본다.
“가주님, 마침 제가 가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가주님?”
“아, 나를 말하는 거였나. 말해.”
그 와중에도 내 마나에 이상이 없는지 오러를 움직여 내 몸을 샅샅이 살피던 루카스가 힐다의 재촉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반 원장님이 상당한 비리를 저지르고 계세요. 돈을 받고 공작가 의료원의 의사와 약사직을 팔고 계시거든요. 심지어 연구원 자리도 내주고 계세요.”
‘힐다는 알고 있었구나!’
나는 힐다의 내부 고발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하긴, 의료원에 속한 고용인들이 아이반이 뇌물을 받고 사람들을 받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여태 아무도 신고를 하지 않은 거지?’
“아이반 원장님이 작고하신 마님의 친정인 이아론 후작가와 연이 깊으시다는 건 익히 들어 압니다만, 막내 아가씨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이어지는 힐다의 말에 아하,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반이 이아론 후작 측 사람이었어?’
그렇다면 사람들이 그의 비리에 입을 다문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스파르와 노엘은 잉꼬부부였으니까.
이아론 후작가의 손실까지 전부 떠맡을 만큼 가스파르가 사라진 부인을 아꼈다는 소문이 영지 내에 파다하게 퍼진 와중에 노엘의 친정 쪽 사람인 아이반의 비리를 고발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들 가스파르가 아이반의 역성을 들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럴 수 있지.’
“부디 몸이 약한 아가씨를 위해서라도 자격이 없는 자들은 내쫓아 주세요. 저도 여태 원장님의 비리에 눈을 감은 사람이니 공작가를 나가겠습니다.”
“앙대!”
나는 말을 마친 힐다가 공손하게 내민 사직서를 휙 낚아채 북북 찢어 버렸다.
‘이만한 인재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양심 있지, 실력 있지, 게다가 그녀는 젊기까지 했다.
‘공작가를 위해 오래 봉사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놀라 휘둥그레 커진 힐다의 눈을 힐끔하며 붕붕방방 팔을 흔들었다.
“앙대, 아반니! 힝다 자르지 마!”
“자를 생각 없었는데.”
나는 루카스의 심드렁한 대답에 멋쩍은 어깨를 으쓱했다.
‘참, 얘 공작가 내부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
하긴 제 가문도 아닌데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아, 아가씨…. 저를 위해 나서 주실 필요 없어요. 저는 비겁자인걸요.”
“아냐, 힝다. 지굼 말해 준 걸로도 충부니 욘가매.” (아냐, 힐다. 지금 말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감해.)
내 말에 감동이라도 받은 듯 힐다의 눈이 울망울망해진다.
“아가씨…. 이 힐다 움베르토, 제 조부의 이름을 걸고 아가씨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응? 움베르토?’
나는 뒤늦게 알게 된 힐다의 성에 가물가물한 원작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아이네스가 투자한 요나스 움베르토 제약의 사장이 여자였던 것 같은데?’
물론 그녀는 주인공인 아이네스의 기연인 만큼 매우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명의 중의 명의이자 명약 제조사였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너무 기대하지 말자 싶었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힐다의 말에 나는 결국 희망을 품고 말았다.
“원래는 공작가를 나가 자그마한 약국이라도 차릴 생각이었는데, 그냥 아가씨를 위해 일할래요!”
“야, 야꾹?”(야, 약국?)
“네! 원래는 제 조부의 이름을 딴 자그마한 약국을 차릴 생각이었거든요.”
“힝다 하라버지 이르미 몬데?” (힐다 할아버지 이름이 뭔데?)
“요나스 움베르토세요. 조부께서 저를 키워 주셨거든요.”
나는 수줍은 힐다의 대답에 쩍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완전 땡 잡았다.
* * *
훗날 황실이 운영하는 윌레닌 제약을 따라잡을 정도로 성장하는 제약사, 요나스 움베르토의 사장이 될 힐다를 공작가 의료원장직에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공작가 내부 청소가 진행되었다.
“아이고, 아이고오! 저는 그저 공작가의 예산을 조금 해먹었을 뿐입니다! 아이반 원장과는 상관이 없어요!”
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행정관들이 내쫓기고,
“가주님, 이렇게 냉정한 분 아니셨잖아요! 저희 사정을 봐주시던 다정한 분이시잖아요!”
가주의 인정에만 호소하며 일하지 않던 게으름뱅이들은 옷이 벗겨졌다.
‘사람들은 아이반의 딸인 에스티가 날 다치게 한 게 계기라고 오해하는 것 같지만….’
딸바보를 넘어선 딸등신.
내 뜻에 따라 고용인 절반을 해고하고 원로회를 정리한 루카스의 새로운 별명이었다.
‘루카스는 그냥 공작가 일에 관심이 없을 뿐인데.’
그러니 내가 해 달라는 대로 움직여 주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마나를 닳게 하겠다고 협박하는 게 잘 먹혀들기도 했고.’
몸이 아프면 그릇이 상하고, 그릇이 상하면 마나가 닳는다.
그래서 그런지 루카스는 내가 기침이라도 한다 싶으면 살벌하게 눈을 빛내며 힐다를 닥달했다.
“각하께서 아가씨를 정말 귀애하시는 것 같아요.”
내 몸을 살피던 힐다가 후후 웃으며 건넨 말을 떠올린 나는 질색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루카스가? 나를?’
전혀 아니었다. 우리는 심플한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니까.
나는 지금도 나를 뚱하니 노려보고 있는 루카스를 힐끔하며 힐다의 말을 속으로 부정했다.
“루카쯔.”
“왜.”
“니니, 새로 산 섬에 가따 오 꺼야.”
이제 슬슬 인양 작업이 마무리될 시점이었다.
“아크레아의 보물이 묻혀 있다는 섬 말인가.”
“웅!”
아크레아의 보물을 떠올리며 움후후 웃는데 루카스가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연다.
“나도 가겠다.”
“웅? 왜?”
루카스의 발언에 내가 의아한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답지 않게 대답을 머뭇거렸다.
“유물에 무슨 저주가 걸려 있을 줄 알고.”
“아아~ 니니 마나 그릇 다칠까 바 그러는구나?”
“…….”
내 물음에 루카스의 입이 조개처럼 딱 다물어졌다 느릿느릿 벌어진다.
“…넌 꼭 말을 해도.”
“웅?”
“됐다.”
‘표정이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