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60)화 (295/486)

제60화

루카스가 가스파르의 몸을 차지하게 된 이후로 나는 원로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하게 되었다.

원로들이 나를 무슨 행운의 토템처럼 여기게 되었으니까.

‘내가 원작을 통해 황실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기 때문이겠지.’

아이네스는 여전히 제 몸 편하자고 내 마나를 탐냈고, 그레고르를 통해 하차니아를 압박하려고 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루카스를 움직여 황실의 수를 막아 냈다.

‘히히. 내가 네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지롱.’

나는 열이 바짝 올랐을 아이네스의 모습을 상상하며 혀를 빼쭉 내밀었다.

“허허, 이렇게 귀여운 주군의 사랑도 받고 저희는 매우 운이 좋은 가신들이질 않습니까.”

그런 나를 안고 둥가둥가 어르던 가르덴이 원로들을 돌아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우리 아가씨가 참으로 복덩이시지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가씨가 참석한 회의에서 내린 결정은 늘 공작가의 큰 수확으로 돌아오니.”

“또 저희들을 엄청 좋아하시고.”

“그럼요, 그럼요. 지금도 이렇게 백작님의 품에 순하게 안겨 계시네요. 사랑스러우십니다.”

루카스가 원로회를 해산시키려는 것을 막아내느라 내가 아양을 잔뜩 떨었기 때문인지, 가르덴을 포함한 원로들은 내가 자신들을 무지막지하게 좋아한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다.

딱히 원로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들의 착각을 정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내게 해로운 착각은 아니니까, 뭐.’

그리고 그들이 내게 호감을 품는 편이 공작가를 뒤에서 조종하기 수월했다.

‘그럼 원로들의 지지를 얻은 김에 고용인들 물갈이나 진행해 볼까?’

나는 가스파르가 쓰러진 날 내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의료원장 아이반을 떠올리며 조그마한 턱을 쓰다듬었다.

“백잔니.”

“네, 공녀님.”

가르덴 백작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린 나는 아쉬움 그득한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손가락을 옴질했다.

“니니, 하차니아 명부 보고시퍼요.”

내 물음에 가르덴 백작의 노회한 눈이 가느다래진다.

“명부라 하면 고용인 명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웅. 이름 외우고 시퍼. 그래야 불러 줄 수 이써요.”

방금 생각해낸 적당한 핑계에 가르덴이 감동받았다는 듯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로막는다.

“상냥하기도 하시지. 서재로 가져다 드릴까요.”

“녜.”

헨리가 가져다 준 재정 서류와 함께 샅샅이 털면 분명 아이반을 내쫓을 빌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사람 없다, 이거야.’

게다가 아이반처럼 밉상인데다 게으르기까지 한 인간은 더더욱.

움후후.

서재로 아장아장 걸음을 옮기며 나는 악당 같은 미소를 입에 걸었다.

* * *

‘이럴 줄 알았어. 뭐가 구리긴 구려.’

나는 의료원에만 잔뜩 배속된 예산과 몰린 인력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자르파라, 이거 좀 하긴해 조요.” (자르파라, 이것 좀 확인해 줘요.)

정확히 어떤 게 구린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자르파라는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데다 천부적인 일머리의 소유자였으니까.

준비한 서류 목록만 보고 내 의도를 파악한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 후다닥 서류를 훑은 다음 사람들 이름에 죽죽 밑줄을 친다.

“얘네들이 뒤가 구려 보이네.”

말콤, 로날드, 줄리아나, 필립 등.

나는 열 손가락이 넘어가는 사람의 수에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가스파르가 물렁물렁한 주인이기로소니 공작가 예산을 야금야금 빼먹는 고용인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인사 발령권이 의료원장에게 가 있다니 내부가 참 희한하게 돌아가는군.”

“웅? 그게 무슨 소리에오?”

“자, 보거라. 이 사람들은 공작가에 고용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원장이 뒷돈을 먹고 받아준 거지.”

그녀의 말대로 매달 인력 충원을 요청한 사람은 아이반 혼자였다.

“공작가의 일원 중에 병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의료원에서 일한다는 건 의료원 보직이 꿀이라는 소리거늘.”

“자르파라, 대다내!”

이어지는 자르파라의 설명에 나는 붉은 명주실처럼 흘러내리는 그녀의 적발을 쓰다듬으며 와아 감탄을 터뜨렸다.

“훗. 본좌에게 이런 비리 파악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본좌는 천재니까.”

“그로몬~ 자르파라가 나뿐 사라믈 색쭐해 줄 수 이써오? 자르파라 또또카니까~!” (그러면~ 자르파라가 나쁜 사람들 색출해줄 수 있어요? 자르파라 똑똑하니까~!)

“본좌는 당연히 할 수 있지!”

내 칭찬에 코를 쓱 쓰다듬은 그녀가 신이 나서 나머지 서류를 파헤친다.

‘다루기 쉬운 편이라 다행이야.’

제국인에 대한 악감정이 상당한 사람이라 걱정했는데 그녀는 예상보다 단순한 면모가 있었다.

‘움후후. 그럼 고용인 물갈이는 자르파라에게 맡기고 나는 애들 훈련이나 시키러 가야지.’

역시 내게는 머리보다 몸 쓰는 일이 입맛에 맞았다.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에녹과 실비를 떠올리며 히죽 웃은 나는 서재를 벗어나 빠르게 복도를 내달렸다.

쿵!

“아야!”

아이들의 훈련 코스를 짜면서 달리느라 미처 앞을 보지 못한 나는 코너를 돌다 어린아이와 부딪히고 말았다.

“으으.”

바닥에 쓸려 까진 무릎이 벌겋게 달아올라 욱신거린다.

‘미친개였던 내가 고작 넘어져서 입은 부상으로 울 수는 없지.’

어린아이의 몸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애써 고통을 참은 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고개를 높이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미안-”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요!”

나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어린애가 나 때문에 넘어진 게 마음에 걸려 사과하려던 나는 내게 악을 지르는 상대의 행동에 휘둥그레 눈을 떴다.

‘이게 지금 누구한테 소리를 질러?’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는 이름이 좀 우습긴 했지만 5대 귀족에 속한 공작가의 고명딸이었다.

게다가 지금 내가 발라당 넘어진 곳은 하차니아 공작성의 별채 복도였고.

“사과 안 해요?!”

‘공대를 쓰는 걸 보면 내가 공녀라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인데.’

나는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여자아이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웅. 안해.”

“하! 사생아라더니 제대로 된 예절도 못 배워먹었나.”

“……머?”

“아, 짜증 나! 됐어요, 그냥 가세요.”

내게 들릴 듯 말듯 싹퉁바가지 없는 말을 작게 웅얼거린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은 내 어깨를 툭 치며 나를 스쳐 지나간다.

“멈처.”

“네?”

“멈추라고.”

“하?”

내 뾰족한 목소리에 자리에 우뚝 선 아이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요?”

“너, 이름이 모야.”

“에스티요.”

“성이 모냐구.”

“서, 성은 왜요!”

저보다 어리다고 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던 아이는 내가 제 성을 캐묻자 그제야 찔끔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봉신 가문의 아이인가?’

“아이고, 에스티! 괜찮으냐!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내가 아이의 출신 성분을 더 캐물을 필요도 없이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한달음에 복도를 달려온다.

“손바닥이 까졌네! 어서 가서 치료하자꾸나.”

호들갑을 떠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기가 막혀 흥,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아이바.” (아이반.)

“엥? 제 딸을 넘어뜨린 분이 공녀님이셨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넘어뜨린 게 아니라 같이 부딪혀서 둘 다 넘어진 거였다.

그러나 내가 제 목을 치겠다 협박을 한 전적이 있기 때문인지,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린 아이반이 사납게 목소리를 높인다.

“복도에서 달리지 말라고 가정교사가 가르치지 않았던 겁니까? 공녀님 때문에 괜히 제 딸아이의 고운 손등이 까지질 않았습니까?!”

의사인 주제에 넘어져서 무릎이 다친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그는 혀를 끌끌 차며 제 딸만 안아들고 등을 돌렸다.

“어휴, 여자애가 저리 버릇이 없어서야! 이래서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공작부인을 맞으시라 원로들이 목소리를 높였던 건데!”

아니, 이 새끼가?

나는 제 딸과 똑같이 혼잣말을 하듯 내 흉을 보는 아이반의 작태에 사납게 눈꼬리를 올렸다.

‘그냥 곱게 옷만 벗겨서 내쫓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나는 마침 반대편 복도로 걸어 나오는 루카스를 발견하고 눈물을 뽑을 준비를 끝마쳤다.

“후-”

“후어엉!”

그러나 내가 내지 않은 울음소리가 먼저 복도에 울려 퍼진다.

“가, 각하아! 각하, 에스티 아파요!!!”

나보다도 빨리 눈물을 뽑아낸 에스티가 마치 루카스의 등장을 기다렸다는 듯 그를 불러 댄다.

각하는 나를 아끼셔. 멍청아.

나는 에스티가 입을 벙긋하는 모양을 읽고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에스티는 내가 사생아라 가스파르의 미움을 받는다는 소문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빠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었지.’

그래서 봉신 가문의 아이들과 고용인의 아이들도 상당히 챙겨 줬었다.

그런데 어쩌나.

우리를 발견하고 저벅저벅 다가오는 루카스를 향해 기대에 찬 눈을 빛내는 에스티를 보고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 입 닥쳐. 귀 찢어지겠군.”

얘 가스파르 아니지롱.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