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59)화 (294/486)

제59화

“자르파라!!!”

깜짝 놀라 창문으로 달려가긴 했지만, 평화로운 공작성에서 시체를 치울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나는 차마 아래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찔끔 감았다.

“으으.”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싶어 슬그머니 눈을 뜨자, 자루를 벗어던지고 툭툭 팔다리를 털어 내고 있는 장신의 여인이 시야 끝에 걸린다.

‘멀쩡하잖아?’

역시 제국 최강의 용병단 자르사워의 단주였다.

“아효….”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멀뚱멀뚱 나만 바라보고 있는 히스를 향해 새초롬히 눈꼬리를 세웠다.

“히스.”

“네.”

“사람은 창밖으로 집어던지는 거 아냐. 아니, 동물도! 물건도!”

“……화났습니까?”

옆구리를 양손으로 짚은 채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유리 인형처럼 섬세하지만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던 히스가 의아한 고개를 기울인다.

“웅! 당연하지!”

내가 계획하고 있는 사업 확장에 크게 도움이 될 인물이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당연히 화가 났다.

“그럼 나를 버릴 겁니까?”

“…….”

그러나 나는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히스의 물음에 소년을 더 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12사도의 마나는 복구하지 못했지만, 내 본연의 마나는 다시 차오르고 있습니다.”

내 침묵을 무슨 뜻으로 해석했는지 소년이 평소와 달리 말을 우다다 쏟아 낸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나, 마정석 추출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가 허둥지둥 제 바지 주머니를 뒤져 꺼내 든 물건의 정체를 파악하고 조그마한 미간을 모았다.

“히스.”

인상을 잔뜩 굳힌 내가 자신에게 천천히 다가서자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 마정석 추출기를 제 팔뚝에 꽂으려고 들었다.

“그만.”

나는 시퍼런 핏줄이 돋은 히스의 새하얀 손등을 붙잡고 그의 손에서 마정석 추출기를 빼앗았다.

“이런 거 들구 다니지 마. 그러지 말라구 해짜나.”

“하지만-”

히스가 변명을 더 하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나는 그의 예쁜 입술을 검지로 꾹 누른 다음 몸을 움직였다.

“방금 창밖으로 물건 던지는 거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망설임 없이 창밖으로 마정석 추출기를 던져 버리는 나를 지켜보던 히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묻는다.

“공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바싹 메마른 목소리였지만, 나는 지금 그가 매우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공녀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싶습니다.”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소년이 제 붉은 입술을 꾹 깨문다.

나는 피가 고일 정도로 억센 그의 행동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피료하다구 해짜나.”

“아뇨. 공녀는 내게 바라는 게 없습니다.”

히스는 눈치가 빨랐다.

나는 내 속내를 꿰뚫어 보듯 날카롭게 빛나는 청안을 마주한 채 그에게 손을 뻗었다.

흰 뺨.

보송보송하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뺨이 내 작은 손바닥에 와 닿는다.

‘그래. 사실 내가 이 소년에게 바라는 건 없어.’

내 멋대로 구해줘 놓고 마땅히 시킬 일이 생각나지도 않았으니까.

“히스. 왜 니니한테 피료한 사람이구 시퍼?”

“그래야 공녀 곁에 머물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히스를 빤히 바라보다 차분히 입을 열었다.

“피료하지 아나두 대. 쓸모 업서두 대.”

“…….”

“니니는 그래두 너를 사랑할 꼬야.”

사랑해주겠다 약속했고, 또 사랑하겠다고 결심했으니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겠어.’

히스를 데려올 때 사랑하고 아껴주겠다고 마음먹은 건 나의 각오이자 맹세였다.

내 진심이 소년에게 닿았는지 닿지 않았는지, 그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있어서 알 길이 없었지만.

* * *

“본좌와 자르사워 상단이 아기를 위해 일했으면 싶다고?”

“녜.”

룰루를 시켜 정원에 뚝 떨어진 자르파라를 주워 온 나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끄덕이며 브리넨 후작에게서 뜯은 재산 목록과 함께 내 사업 계획서를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자금은 충분하군. 아이디어도 나쁘진 않아.”

서류를 빠르게 살핀 자르파라가 작게 중얼거리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하지만 본좌가 어째서 제국인을 위해 일해야 하지? 아기는 아크레아를 멸망시킨 윌레닌 제국의 공녀라면서.”

나는 자르파라의 건방진 말에 대꾸하는 대신 내 뒤에 시립한 히스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히스가 책상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와 자르파라를 내려다본다.

“왕이시여-! 드디어 아크레아의 마지막 종복인 저를 알아보시는 겁니까?”

히스는 초롱초롱 빛나는 자르파라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일해.”

“네?”

“공녀를 위해 일하라고.”

“네!”

상명하복은 진리였다.

“아기의 사업을 위해 자르사워도 소환하도록 하겠습니다, 왕이시여!”

나는 냉큼 돌변한 태도로 내 사업 계획서를 품에 안은 자르파라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아기야, 본좌가 어떤 사업부터 시작하면 되겠느냐?”

‘그래도 일만 잘해 주면 됐지.’

브리넨 후작에게서 뜯은 재산을 불리려면 여러 투자처에 돈을 뿌리는 것을 포함해서 상단 일에 손을 뻗어야 했다.

그러나 현생에서는 세 살 응애, 전생에서도 기껏해야 총 쏘던 일밖에 해보지 못했던 내게 상업적인 감각이 존재할 리 없다.

‘원작의 정보를 알고 있으니 이점이 있긴 하겠지만, 수완이 뛰어난 상인은 당연히 필요해.’

나는 자르파라를 일꾼으로 확보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사업 계획서의 가장 첫 페이지를 손으로 짚었다.

“요거부터 시작해 주세오.”

내가 짚은 사업은 원작의 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함선을 통한 무역이었다.

대륙을 건너 돌아올 배와 돌아오지 못하고 가라앉을 함선의 이름을 대충이라도 알고 있으니까.

“그럼 니니는 바빠서 이만 가 보께.”

숫자놀이는 군인이었던 내게는 머리만 아픈 일이었다.

내가 작은 손을 팔랑이며 인사하자 시원시원하게 펜을 움직이던 자르파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계획을 얼추 정리하면 본좌가 아기에게 보고하도록 하마.”

“우웅. 힘내, 자르파라!”

물건 잘 팔아서 내 돈을 열심히 불려 오도록!

* * *

“공녀님!”

뽀짝뽀짝 서재를 벗어나 복도를 걷던 나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게 달려오는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녜?”

“공녀님, 각하께서 좀 이상하십니다.”

설마 가스파르의 몸에 루카스가 빙의했다는 걸 헨리가 눈치챈 걸까.

그는 아빠의 곁에 찰싹 붙어 보좌하는 오른팔이었으니 변화를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모가?”

내가 바짝 긴장해 눈을 홉뜨자 헨리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연다.

“일을 안 하십니다.”

“……웅?”

“일을 너무 안 하세요. 도서관에 틀어박혀 쓰지도 못하는 술법서나 마법서만 읽으시고 서류는 들여다보지도 않으신다고요.”

“아아.”

나는 헨리의 설명에 대강 상황을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 윌레닌은 폭군인 그레고르의 이복형.

즉, 폭군의 피가 흐르는 황족이었다.

‘원래 폭군은 일 안 해.’

로판의 폭군들은 보통 손속이 잔인할 뿐 일을 매우 열심히 했지만, <아.황.장>의 폭군 그레고르는 나라 살림을 개떡같이 굴리는 진짜 폭군이었다.

‘그렇지만 루카스가 하차니아의 살림도 개떡같이 굴리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지.’

가스파르가 돌아오기 전에 공작가가 망해 버리면 큰일이지 않은가.

“앞장서, 헨니!”

“네! 각하의 집무실로 가시죠! 제가 잡아 두긴 했으니까요!”

옆구리에 앙당그레 말아 쥔 주먹을 얹은 나는 씩씩한 걸음걸이로 헨리를 따라 나섰다.

“아반니!”

본관의 집무실에 당도한 내가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소파에 누워 빈둥대던 루카스가 느릿느릿 턱을 치켜든다.

“왜.”

“일 안 한다묜서요!”

한량 같은 루카스의 모습에 기가 막힌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그가 뚱한 얼굴로 내 뒤에 선 헨리를 노려본다.

“네가 불러왔나.”

“아, 아뇨? 그냥 지나가다 공녀님과 마주쳤을 뿐입니다만.”

가스파르는 무서워한 적 없으면서, 루카스는 무서운지 헨리가 땀을 삐질 흘리며 뒤로 반보 물러난다.

“아반니, 왜 일 안 해!!”

“귀찮으니까.”

귀찮아서 남의 가문 말아먹을 일 있냐!

루카스의 성의 없는 대답에 잔뜩 열이 오른 나는 쒸익쒸익 콧김까지 뿜어 가며 소파에 드러누운 그의 어깨를 달달 흔들었다.

“일해, 아반니! 게으름장이!”

“귀찮다니까.”

“그럼 니니두 기차느니까 밥 안 머거.”

내 대답에 루카스의 잘생긴 얼굴이 우악스레 찌푸려진다.

‘후후. 역시 이 방법이 먹힐 줄 알았지.’

나는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루카스를 내려다보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내 협박 어떠냐, 이놈아.’

루카스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끼니 거르는 걸 걱정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나가 닳아 없어지는 건 걱정하겠지.’

아기 육체는 너무 연약해서 끼니만 걸러도 마나가 뚝뚝 닳아 버리니까.

“니니 굴므꼬야. 간식도 안 머거.” (리니 굶을 거야. 간식도 안 먹어.)

“……서류 가져와, 헨리.”

“네, 각하!”

루카스가 무서워 벽에 바짝 붙었던 헨리는 느릿느릿 떨어지는 그의 명령에 헐레벌떡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가씨는 어쩜! 각하의 게으름에 서류에 치이는 가신들을 위해 식사까지 거르실 결심을…!”

나는 헨리가 집무실을 벗어나며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대단한 먹보인 우리 막내 아가씨가! 딸기 주스와 쇼콜라 봉봉을 하루라도 안 먹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성질을 내는 우리 아기 돼지 레오노라 아가씨가!”

감동의 방향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은근 기분이 상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