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오늘도 형편없군! 하차니아의 실력이라는 거 말이야~!”
나는 혀를 샐쭉 내밀며 실베스테르의 약을 올리는 프란츠 황자의 작태에 기가 막혀 옆구리에 손을 올렸다.
‘실비보다 두 살이나 많지 않나, 저 자식?’
겨우 두 살이라지만, 저 나이 때 소년들에게 두 살이라는 나이 차이는 꽤 컸다.
나는 실비보다 한 뼘 정도 큰 프란츠의 우람한 덩치를 힐끗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치사한 자식 같으니.’
“그, 그렇죠. 물론 우리 실비 도련님이 훠얼씬 잘생기셨죠!”
내가 기분이 상한 듯 보이자 당황한 룰루가 나를 어르며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련님! 실비 도련님!”
그녀의 외침에 이제 막 대련이 끝난 듯 목검을 내려놓던 실비가 고개를 돌린다.
“리니.”
소년은 나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연무장에는 무슨 일이지.”
“시삐 보구 시퍼서.”
내 대답에 실비가 보일 듯 말듯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래. 나도 이제 막 훈련이 끝났으니 잘 왔다.”
나는 새하얀 눈꽃 같은 그 미소에 흡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암. 당연히 실비가 이길 거야.’
얼굴로는 이미 압승이었다.
“흠. 하차니아의 공녀인가?”
연무장 반대편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한 프란츠 황자가 건들거리며 다가온다.
나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그의 이마와 보송보송 산뜻해 보이는 실비의 이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역시 실비가 봐준 게 맞네.’
왜 일부러 프란츠 황자에게 져 주고 있는 걸까?
실비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가늘이는데 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던 프란츠가 흥, 콧방귀를 뀌며 턱을 치켜든다.
“뭐야. 소문만큼 귀엽진 않네.”
정적.
나에 대한 프란츠의 짧은 평가에 서늘한 적막이 가라앉는다.
“트리스탄 그 자식이 별 헛소리를 다 하길래 나는 뭐 얼마나 대단한 아기인가 했더니만.”
프란츠는 룰루와 랄라, 그리고 셀리아가 지금 자신을 얼마나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나불나불 입을 놀렸다.
“그냥 평범한 아기잖아. 오히려 좀 못생긴 편 아닌가?”
프란츠의 말에 부득 이를 간 룰루가 소매를 걷어 올린다.
“저 자식이 지금 뭐라고 한 거죠?”
“어디서 밟혀 온 것처럼 생긴 게!”
“대장장이가 두들기다 만 것처럼 생긴 놈이!”
프란츠의 호칭은 어느새 황자님에서 저 자식이 되어 있었다.
“아, 앙대!”
나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무려 황자에게 항의하기 위해 콧김을 쒸익쒸익 뿜어 대는 룰루랄라, 그리고 셀리아의 치맛자락을 한꺼번에 붙들었다.
“히유.”
다혈질인 그들을 간신히 뜯어말린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그 말 취소하십시오.”
실비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목검을 집어 들었다.
“시, 시삐-!”
깜짝 놀란 내가 그를 말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프란츠의 반응이 먼저였다.
“뭐? 지금 내게 한 말인가?”
“네. 방금 한 말 취소해 주십시오, 전하.”
“허! 언제부터 네가 이렇게 건방져진 거지? 내가 요즘 대련에서 너무 봐준 모양이야.”
실비의 정중한-목검을 겨누고 있긴 했지만- 요구를 묵살한 프란츠는 제 호위 기사의 진검을 빼앗아 높이 치켜들었다.
“와라.”
그러더니 자신이 무협지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오긴 뭘 와, 이 치사한 놈!’
실비는 훈련용 목검을 들고 있는데 저는 비겁하게 철로 만든 진검을 사용할 작정인 모양이었다.
“진검을 들어서 무서운 거라면 너도 들어도 좋다. 겁쟁이.”
나는 프란츠의 이죽이는 말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됐어. 우리 실비는 저런 도발에 넘어갈 애가 아니야.’
프란츠가 유치하게 나와 다행이다 싶었는데,
파르륵-!
실비의 목검이 새하얗게 얼어붙는다.
나는 내 뺨에 서늘한 바람이 닿을 정도로 퍼지는 그의 오러를 느끼고 작달만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젠장.
잊고 있었다.
‘우리 둘째, 가스파르 닮고 싶어서 차분한 척하는 거지 사실 다혈질이었어.’
* * *
겨울바람처럼 서늘한 오러로 목검을 감싼 실비는 여태 쌓인 것을 푸는 양 프란츠를 흠씬 두들겨 팼다.
“취, 취소하면 되잖아! 취소! 아악! 악!”
결국 검까지 놓친 프란츠가 바닥에 답싹 엎드려 제 얼굴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며 항복했지만, 실비는 멈추지 않고 황자를 공격했다.
“제 동생은 귀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
“어, 그래! 귀엽다니까! 귀여워!”
실비의 검이 무섭긴 무서운지 프란츠가 후덜덜 떨면서 목청을 높인다.
“제 동생은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아, 알았다고, 이 자식아!!!”
실비는 프란츠가 내가 귀엽다는 말을 세 번쯤 복창하고 나서야 목검을 내려놓았다.
‘이 자식이 여태 잘 져 주다가 갑자기 무슨 짓이람.’
분명 프란츠에게 계속 져 주던 이유가 있었을 텐데.
나는 눈이 돌아 황자를 패 버린 우리 집 둘째를 힐긋한 뒤 지끈지끈한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그, 그런데 너 원래 이렇게 강했었나?”
프란츠도 갑작스레 상승한 실비의 실력에 놀란 듯 말까지 더듬거린다.
“아뇨. 제 실력 알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날 이긴 거지?”
“제가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서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실비의 대답에 콧방귀를 뀌었다.
황자가 바보냐, 그 변명을 믿게.
“그렇군. 그거 말이 되네.”
으응. 바보인가 보다.
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제 호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프란츠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실비에게 다가섰다.
“시삐.”
“응.”
“할 말 이쓰니까 니니 따라올래?”
“그래.”
훈련이 막 끝났을 때와 달리 땀으로 흠뻑 젖은 실비가 찝찝할 텐데도 나를 졸졸 따라 걸음을 옮긴다.
나는 인적이 드문 저택의 후원에 당도하고 나서야 면구한 듯 할 말을 잃은 둘째를 돌아보았다.
“여태 왜 프란쯔한테 져 준 고야?”
“져 준 적 없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는 실비를 새초롬히 노려보며 쿵 발을 굴렀다.
“져 줘쓰면서. 자꾸 거진말하면 시삐 미오.”
“거짓말 아니라니까.”
“지굼부터 미오한다.”
“……!”
내 으름장에 에녹의 것보다 조금 더 투명한 빛을 띠는 루비 같은 눈동자가 놀라 커다래진다.
“셋 셀 꼬야. 하나아. 두우울. 세에에-!”
“자카리가 강하니까.”
결국 실비는 내가 셋을 다 세기 전에 진실을 털어놓았다.
“자카리가 전쟁에 차출당한 이유는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웅?”
우리 집 첫째-만나 본 적 없는-가 뛰어난 기사인 게 어째서 실비가 실력을 숨길 이유가 되는 걸까.
실비는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다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은 소울나이츠를 배출한 가문은 황제 폐하의 경계를 필연적으로 받게 된다. 하차니아는 이미 세 명의 기사를 배출했으니, 더 눈에 띄면 위험할 거다.”
나는 실비의 속 깊은 말에 나보다는 몇 배나 커다랬지만, 아직은 작기만 한 그의 손을 꼬옥 끌어안았다.
‘결국 가문을 위해서 제 자존심까지 버려 가며 힘을 숨기고 있었다는 거잖아.’
나는 프란츠를 잠깐 마주친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그와 늘 훈련을 해야만 했던 실비는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그치만 시삐, 그건 잘몬댄 생각이야.” (그렇지만 실비,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뭐?”
“그로케 실력을 감추몬 시삐 기사 단장 몬 하자나.”
실베스테르는 훗날 백랑과 하차니아 기사단을 이끌어야만 했다.
‘차분한 리더쉽으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실비가 기사 단장직을 맡아 줘야 해.’
그래야 내가 마음놓고 제국을 휘저으며 공국을 세울 기반을 다질 수 있을 테니까.
“니니는 시삐가 기사 단장 해쓰면 조케쩌.”
자신을 혹독하게 써먹을 내 계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비가 특유의 실낱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아든다.
“나를 좋게 봐주는 건 고맙지만, 난 그런 욕심은 없다.”
우리 집 놈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욕심이 쥐뿔도 없을까.
한숨을 포옥 내쉰 나는 그의 소매를 살살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치마안, 시삐가 니니 기산니 하 꺼잔아.” (그치만, 실비가 리니 기사님 할 거잖아.)
필살 방긋방긋 순한 아기 미소까지 지어 가면서.
‘내가 이렇게 웃으면 룰루와 랄라는 코피까지 쏟을 때가 있었지.’
“니니 기산니 기사 단장이어쓰면 조케쩌.”
내 단호한 발언에 실비가 고민하듯 침음을 흘린 순간이었다.
“그렇군.”
나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실비의 품에 안긴 채 빼꼼 고개를 들었다.
“기사단을 통솔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만 너의 기사로 삼아 주는 건가.”
“……트리쯔딴?”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하차니아에 머물고 있는 트리스탄이었다.
완쾌한 듯 보이는 그가 무언가를 이해했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좋긴 뭐가 좋단 걸까.
내가 묻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온 소년은 내 발등에 짧게 입을 맞춘 다음 반보 물러났다.
“적랑, 아니, 솔로아의 기사들 전부를 통솔하게 되면 나를 받아주겠다는 뜻이겠지.”
아뇨, 나는 그런 말한 적 없는데요?
너 받아주기 싫다니까?
그러나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 트리스탄의 등은 멀어져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