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56)화 (291/486)

제56화

“……공녀님.”

이유는 모르겠지만 몸을 수그린 채 한참을 웃던 가르덴이 조심스레 나를 부른다.

“녜.”

나는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듯한 주변 공기를 호다닥 손으로 휘저으며 고개를 들었다.

“희망을 안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노회한 눈에 깃든 따사한 햇볕에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이런 걸로 넘어올까 싶었는데, 정말 속은 건가?!’

“저 같은 노인네를 위해 왜 이 같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어지는 가르덴의 말에 잔뜩 긴장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역시, 눈치챘구나. 벨루치가 가짜 요정님이라는 거.’

“백잔니, 미아-”

내가 그를 속인 것을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꾸벅 숙인 순간이었다.

“아주 상냥한 꿈이었습니다.”

내 말을 끊은 백작이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가를 접으며 웃는다.

“정말 다정한 마음씨를 지닌 분이시군요, 제가 모시는 공작가의 막내 아가씨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춘 가르덴이 내 손등에 정중하게 입을 맞춘다.

“그간 진실을 외면해 온 것을 반성하며 공녀님이 제게 부탁하고 싶어 하시는 일을 기꺼이 들어드리겠습니다.”

“그, 그런 거 업눈데!”

나는 내 새까만 속내를 들킨 것에 당황하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내가 양손을 세차게 젓는 것을 흘깃한 가르덴이 쿠쿡 웃는다.

“이런 상냥한 꿈을 준비하실 때는 제게 바라는 게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나는 예리하게 빛나는 가르덴의 눈동자에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그의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반니에게 언로회의 지지가 피료해요.” (아버님에게 원로회의 지지가 필요해요.)

“황실 소유 섬을 사는 문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최근 원로회와 루카스가 갈등을 빚었던 문제라면 그것밖에 없었지만, 나는 부러 확실한 대답을 회피하며 말을 이었다.

“다움 회의 때, 무조껀 아반니 편을 들어주세오.”

“…네, 알겠습니다.”

두 손을 맞잡은 채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르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뭐, 원로회가 그간 가주님 의사를 너무 무시하긴 했지요. 저도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후회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나는 가르덴의 말에 배꼽에 손까지 올려 가며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함미다.”

“뭘요. 제가 가주님 성격을 잘 알지요.”

그러자 내 인사가 과하다는 듯 가르덴이 서둘러 고개를 내젓는다.

“사려깊은 각하께서 주장을 펼치시면 뭐 얼마나 대단한 주장을 펼치시겠습니까.”

합리적인데다 늘 봉신 가문의 입장을 생각해 주는 가주였던 가스파르를 떠올리는 듯, 가르덴이 여유롭게 웃으며 입을 연다.

“이 가르덴, 은혜든 빚이든 원한이든 반드시 갚는 사람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공녀님. 가문의 이름을 걸고 각하를 무조건 지지하겠다 약조드리겠습니다.”

으응, 지금은 그렇게 쉽게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의 약조만 받으면 그만이었던 나는 생긋 웃으며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지, 지금 뭘 인양하자고 하셨습니까?”

루카스의 말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린 로만 자작이 덜덜 떨며 입을 연다.

“배.”

새하얗게 질린 원로들의 얼굴을 시큰둥하게 훑은 루카스는 여상히 대꾸했다.

“귓구멍이 다들 막힌 건가. 뚫어 주는 건 내 딸이 아주 잘할 텐데.”

바주카포로.

제 무릎에 앉은 내 머리를 건성으로 쓰다듬는 루카스를 황망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로만 자작이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각하, 가라앉은 함선을 인양하는 데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는 아시는 겁니까?”

“모른다.”

“남은 공작가의 예산을 다 털어도 모자라서 원로회의 예산까지 추징해야 할 금액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루카스의 시큰둥한 대답에 로만 자작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팡팡 내려쳤다.

“저희 돈 없습니다, 각하! 각하께서 원하시는 섬을 소유하겠다고 폐하께 프리미에 평야까지 갖다 바치지 않으셨습니까!”

공작가의 영지와 재산을 수탈하려는 그레고르의 행포에 루카스는 대신 북부인 하차니아에서 제일 비옥한 평야인 프리미에를 주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대신 황실에서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는 무인도 세 개를 요구했고.’

그게 훨씬 이득인 줄 알았을 그레고르는 루카스의-그러니까 나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아마 우리가 자신의 엄포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목을 조아린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어차피 프리미에는 올해 기근이 들어 마물이 들끓는 불모지가 되어 버리지롱.’

<아.황.장>에서 5대 귀족에 속했던 하차니아가 점점 더 하찮아지는 과정에는 연속해서 찾아오는 흉년도 단단히 한몫했었다.

‘마물 단속에 영지민 구휼에 돈만 잔뜩 나갈 지역이었는데, 이참에 속 시원하게 처리했지.’

이제 프리미에를 먹여 살리는 데 돈을 탈탈 쓰는 건 하차니아가 아니라 황실이 될 것이다.

“움후후.”

원로들 눈에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악당처럼 웃는 내 뒤통수를 툭 건드린 루카스가 나를 안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들 내 말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 보겠다.”

“가시긴 어딜 가십니까?!!”

자신들이 기겁하는데도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심드렁한 루카스의 태도에 가르덴 백작을 제외한 원로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각하,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재고하여 주세요!”

후비적후비적.

하나 루카스는 원로들의 만류에 따갑다는 듯 귀를 팔 뿐이다.

“백작님, 가만히 계시지 말고 각하께 무어라 말씀을 해 주세요.”

보다 못한 로만 자작이 가주의 맞은편 상석에 앉은 가르덴을 재촉한다.

“저는 각하의 뜻에 동의합니다.”

그러자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는 듯 보였던 가르덴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까짓 거, 배를 인양하지요. 저희가 허리띠를 졸라매면 될 일입니다, 각하.”

“뭐라고요?? 백작님, 설마 섬망이라도 드셨습니까?”

당황한 로만이 말까지 버벅이며 묻자, 가르덴은 짙은 주름이 잡힌 이마를 날카롭게 찌푸렸다.

“말버릇이 나쁘군, 로만. 내가 원로회의 수장이라는 걸 잊었는가?”

“아, 아니…. 너무 말도 안 되는 말씀에 동의를 하신다니까 그러지요!”

로만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와중,

“잘됐군. 그럼 회의는 이만하도록 하지.”

루카스는 그의 말을 여상하게 무시하며 뚜벅뚜벅 대회의장을 가로질렀다.

“아직 의견이 통합되지 않았는데 어찌 회의를 마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남은 원로의 표를 다 합쳐도 가주인 나와 가르덴 백작의 의결권을 이기지 못하는 것으로 아는데.”

반대하는 원로들의 목소리에 루카스는 나를 안아 들지 않은 손을 움직여 검은 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다들 읽어 보도록.”

내가 밤새 읽게 한 하차니아 공작가의 규율서였다.

“각하~!!!”

나는 원로들이 울먹이는 소리를 개 짖는 소리라도 되는 양 무시하는 루카스가 너무너무 기특해 그의 가슴을 포옥 끌어안았다.

‘우리 아빠였으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정말 다행이야!’

* * *

아크레아의 함선 인양 작업도 무사히 착수했겠다- 나는 슬슬 차남인 실베스테르를 개조할 시기가 도래했음에 손뼉을 짝 맞부딪혔다.

‘에녹의 훈련 상대가 트리스탄이었다면, 실비의 훈련 상대는 프란츠 황자였지.’

아이네스의 오빠인 그는 그레고르와 함께 뒤늦게 그녀에게 동화되어 동생 바보가 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성격은 개차반이라는 의미겠지.’

“오늘은 마침 프란츠 황자님이 같이 훈련을 받고 계시네요.”

룰루의 손을 잡고 실비의 검술 수업을 구경 나온 나는 그와 검을 맞댄 소년을 힐긋했다.

‘적금발에 녹안이라, 그레고르 황제랑 똑같네.’

누가 아들 아니랄까 봐 그는 그레고르 황제와 판박이처럼 닮아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별로 안 강해 보이는데?’

여자 주인공의 오빠이긴 했지만 비중 없는 조연이라 그런지, 프란츠의 윈터소드는 기력이 없어 흐물흐물했다.

그릇에 담은 마나가 방대한 만큼 상대의 마력에 예민한 나는 눈을 가늘이며 콧잔등에 얹은 선글라스-코제트의 안경을 훔쳐 만든-를 위로 올렸다.

‘레오노라 무력 측정기 발동-!’

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런 아티팩트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대강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오러의 선명함을 떠나서 자세까지 어설퍼. 실비의 검이 훨씬 깔끔하게 떨어지잖아.’

나는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검술의 정석을 펼치는 실비와 굼벵이처럼 움직이는 프란츠를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실비가 밀리는 것 같지?’

“에고. 오늘도 실비 도련님의 패배로 끝이 나겠네요. 우리 아가씨, 그래도 너무 속상해 마셔요.”

승패를 분명하게 예견할 수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실비와 프란츠의 대결을 지켜보던 룰루가 품에 안은 나를 둥가둥가 흔들며 달랜다.

“언래 시삐가 계속 져또?”

“네. 훈련 때는 무척 잘하시는데, 프란츠 황자님과는 상성이 안 맞으시나 봐요. 한 번을 이기질 못해서 이상하다고 로더릭 님이 그러시던데요.”

로더릭은 백랑의 기사 단장이자 공작가의 가신이었다.

나는 룰루의 설명에 선글라스에 가려진 콧잔등을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이샹해.”

실비가 저놈에게 질 리가 없는데.

“우리 시삐가 더 잘생견눈데?!”

원래 로판 세계에서 검술 실력은 외모순이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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