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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52)화 (287/486)

제52화

그렌섬, 나리아섬, 히노텐섬은 윌레닌 제국이 다스리는 아리나 해협 중앙에 자리한 무인도들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삼각형 형태의 거대한 섬으로 보일 만큼 가깝게 위치해 있었다.

‘아이네스가 그레고르의 폭정을 막는다는 핑계로 가출하는 바람에 발견할 수 있었던 보물섬들이었지.’

겉보기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로 이루어진 무인도였다.

그러나 이 섬들의 영역권에 위치한 바다에는 마도 왕국 아크레아의 유물을 품은 거대한 함선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보물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유물들이 천문학적인 가치를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기억나.’

“움후후.”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악당처럼 웃은 나는 허둥지둥 대회의장을 벗어나는 원로들을 훑어본 다음 자리를 벗어났다.

“후움. 고민이네.”

섬을 매입하는 것 정도는 루카스가 임의로 공작가의 예산을 움직이는 것으로 가능했지만, 가라앉은 함선을 인양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내 비자금을 쓰지 않으려면 원로회를 설득해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함선 인양에 동의하게 만들어야 해.’

하차니아는 제법 많은 봉신 가문을 거느린 대귀족가였지만, 가스파르가 딱히 두려운 가주가 아닌 탓에 하차니아의 원로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가감 없이 표출하는 편이었다.

‘루카스가 으름장을 놓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테지.’

별채의 복도를 아장아장 작은 보폭으로 왕복하던 나는 곧 원로 한 명 한 명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수장인 가르덴 백작 한 명을 설득하는 게 보다 더 쉬우리란 결론을 내렸다.

“조아써. 움직이자!”

다행히 가르덴 백작가의 가훈은 내가 기억할 수 있을 만큼 심플했으니까.

<받는 대로 되갚아 준다.>

가르덴 백작은 그것이 빚이든 은혜든 되로 받으면 말로 갚아 주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은 대개 지는 걸 싫어하지.’

창가에 우뚝 멈춰선 나는 뽀얀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창틀을 툭툭 두드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움후후.”

‘드디어 벨루치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도래했어.’

* * *

“베루띠 어디써?”

나는 볼록 가라앉은 내 베개를 팡팡 두드리는 랄라를 향해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 벨루치라면 별관 응접실 청소를 하고 있을 거예요.”

내 행동이 귀여운지 헤죽 웃은 랄라의 대답에 나는 뾰로통 입술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일 시키지 말라니까눈.”

조금 쉬게 냅두래도.

“일을 주지 않으면 너무 불안해해서요. 벨루치도 그렇고, 그 남자애도 마찬가지예요.”

내 핀잔에 랄라가 억울하다는 듯 나를 따라 입술을 내민다.

나는 그녀의 부연 설명에 쉬는 버릇을 들이지 못한 구휼원 아이들을 떠올리며 아효,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라써. 니니가 말해 보께.”

“그럼 응접실로 데려다 드릴까요?”

“웅.”

내가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내 짜리몽땅한 다리로는 침실에서 응접실까지도 한참 걸렸다.

“킁, 킁킁. 하아.”

“…….”

내 허락에 나를 덥석 안아 든 랄라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코를 벌렁거린다.

“아가씨 몸에서는 꼭 갓 구운 과자같은 냄새가 나요. 꼬소하고 달콤한 버터 쿠키 같은….”

“오늘 하루치 끈나써, 랄라.”

나는 랄라의 변태 같은 말에 질색하며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힝. 알겠어요. 아껴서 마실걸….”

룰루와 랄라는 둘 다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과자 같다며 매우 좋아했는데, 나는 그들의 행동이 영 꺼림칙해 제한을 두는 중이었다.

“공녀님!”

랄라가 울상을 짓든 말든 응접실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마른 행주를 손에 든 벨루치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인다.

“여, 여긴 어쩐 일로…!”

“베루띠 만나러 와써.”

“저를요? 공녀님께서요?!”

내 말에 벨루치의 고운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진다.

“우웅. 부타칼 게 이써서.” (으응. 부탁할 게 있어서.)

“뭐든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공녀님!”

나는 기대보다 격한 그녀의 환대에 떨떠름한 턱을 긁었다.

‘너무 오래 방치해 뒀나? 그래 봤자 한 달인데.’

나는 내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게 매우 기쁜지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벨루치를 빤히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베루띠가 피료해. 니니 따라와.”

“네!”

내 명령에 벨루치가 힘차게 대답하며 내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아차참! 행주를 그대로 들고 갈 뻔했네요!”

회색 천을 위아래로 흔들던 벨루치는 내 코앞에서 몸을 돌려 구석으로 다가갔다.

“자, 히스. 나머지 정리를 부탁해. 공녀님이 내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말이야!”

나는 벨루치의 얼굴에 완연한 승리자의 미소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자랑할 게 없어서 부려 먹히는 걸 자랑하는 건가?’

더 어이가 없는 건 히스의 반응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벨루치.”

언뜻 듣기에는 벨루치가 자신을 상대로 우월감을 느끼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는 듯 딱딱했지만, 묘하게 삐친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인상을 쓰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기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거지?’

나는 비인간적일 정도로 아름답고도 무심한 소년의 얼굴이, 호흡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실망감을 표현하는 것이 조금 놀라워 입을 벌렸다.

“공녀.”

대화를 엿듣느라 문가에 서성이는 나를 발견한 히스가 머뭇머뭇 입술을 움직인다.

“나는,”

“웅?”

“나는 필요하지 않습니까?”

“어….”

나는 소년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피, 피료하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정말 이상하게도 저 무뚝뚝한 얼굴이 당장 와앙 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으니까.

“그럼 나도 같이 가도 됩니까?”

“그건 안대. 오늘은 베루띠의 미인계가 피료한 날이거든.”

벨루치는 머리 회전이 빠르고 재치가 있어 연기에도 능숙했다.

가르덴 백작을 회유하러 경마장에 몰래 나갔다 와야 하는데 딸린 인원이 많으면 이목만 끌 뿐이었다.

‘백작을 회유하는 데 딱히 히스의 힘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내 면구한 대답을 이해했다는 듯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말귀를 알아먹는 애라 다행이야.’

나는 소년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경매장에 당도한 나는 목적도 잊고 와아, 탄성을 내질렀다.

푸르른 하늘 아래, 질주하는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말갈기가 더없이 아름다웠으니까.

“제가 그렇게 예쁜가요?”

“…머?”

“타, 탄성을 지르시기에.”

내 부탁으로 곱게 단장한 벨루치가 내 곁에서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힌다.

“공녀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제 미모가 공녀님께 꼭 필요한 무기라고. 물론 제 눈에는 공녀님이 백배천배 더 예쁘시지만.”

벨루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퍽 잘 파악한 소녀였다.

‘예뻐서 후작 부인이 될 뻔했으니 당연하겠지만.’

“우웅, 그러티.”

가르덴 수장의 눈을 현혹할 만한 금발 소녀가 필요한 작전이었으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도아조서 고마워, 베루띠.”

“아녜요!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다행이녜.”

“그간 공녀님이 저를 잊으신 줄 알고 얼마나 슬펐는데요. 제가 예뻐서 다행이에요.”

나는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어 무척 기쁘다며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벨루치의 모습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크흥!”

때마침 경마장에 들어선 가르덴 백작을 발견하고 헛기침으로 그녀에게 신호를 주자,

“그러니까 저 노인네 옆에서 큰 소리로 공녀님이 알려 주신 말들을 응원하면 되는 거죠?”

햇볕을 반사해 눈부시게 빛이 나는 흰색 실크드레스를 차려입은 벨루치가 생긋 웃으며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다.

‘내가 꾸며 놓은 거지만 정말 요정 같잖아.’

나는 나풀나풀 가벼운 걸음걸이로 멀어지는 벨루치를 멍하니 바라보다 호다닥 고개를 내저었다.

‘가르덴 백작이 단번에 넘어오면 좋을 텐데.’

나는 헨리에게 레몬 사탕을 안겨 주며 수집한 고급 정보를 떠올리며 악당처럼 손을 맞부딪혔다.

금발, 녹안, 그리고 미소녀.

‘전부 가르덴 백작이 루엘라 여신처럼 믿는다는 행운의 요정 니케리아의 상징이지.’

백작의 신심이 어찌나 깊은지 그가 지나가는 금발 녹안 소녀를 쫓아가다 치안대에 붙잡힌 사건도 있었단다.

‘백작가에 누가 될 만한 질 나쁜 소문이라 금세 사위어 들었지만.’

처음에는 그냥 예쁜 여자애를 좋아하는 변태 아닌가 싶었으나 헨리의 말에 따르면 가르덴 백작은 이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결혼까지 마다한 사람이었다.

‘벨루치처럼 생긴 애가 연이어 우승할 말을 짚어 낸다면 분명 혹할 거야. <아.황.장> 세계의 요정들은 종종 인간 마을에 놀러 나오기도 했으니까.

미리 사람을 시켜 상대편 기수에게 뇌물을 잔뜩 먹인 나는 움후후, 아이답지 않은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지. 벌써 넘어오고 있잖아?’

나는 경마가 진행되면 될수록 제 옆에 앉은 벨루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가르덴 백작을 발견하고 한쪽 입꼬리를 시원하게 들어 올렸다.

“…혹시 존함을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던 가르덴 백작이 벨루치에게 우물쭈물 말을 걸었다.

‘잭팟.’

나는 저보다 어릴 게 뻔히 보이는 벨루치에게 무척 공손한 태도를 취하는 가르덴을 흘깃하며 콧잔등을 움찔했다.

“들린다, 들료.”

돈덩이가 데굴데굴 굴러 들어오는 소리가 귓가를 댕댕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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