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하차니아 공작가 관할 의료원의 원장인 닥터 아이반은 ‘원인 불명의 질병’에 관련된 두터운 서적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입을 열었다.
“막내 아가씨,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되바라지셨네.”
제 허리에도 닿지 않는 작은 아기에게 겁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왕년에는 잘나갔던-잘나갔다고 믿고 싶은- 아이반은 크흠 헛기침을 덧붙였다.
“각하께서도 의료원을 이끄는 우리에게는 정중한 태도를 보이시는데 말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가 사람 목숨을 가지고 어찌나 살벌하게 협박을 하는지!”
그럼에도 레오노라의 오러구에 맞고 싶지 않아 열과 성을 다해 근 몇 년만에 밤까지 꼬박 새 가며 의료 서적을 뒤졌다.
의사들은 레오노라에게 품은 불만을 궁시렁거리며 가스파르의 침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각하!”
침대 헤드에 기댄 루카스를 가장 먼저 발견한 아이반이 입을 벙긋했지만, 엉엉 우는 레오노라를 품에 안은 루카스는 아이를 안지 않은 손의 검지를 제 입가에 가져다 댔다.
“각하께서 깨어나셔서 아가씨가 울음을 터뜨린 모양이네.”
후욱, 욱.
숨까지 헐떡이며 듣기에도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는 레오노라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아이반이 목소리를 죽인다.
“……각하를 아주 많이 걱정하신 모양이야.”
“소울나이츠들이 오러를 전부 소진해 잠시 의식을 잃는 건 꽤 흔한 일이라 저희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는 아직 어리시니까요.”
아이반의 중얼거림에 발갛게 달아오른 레오노라의 눈가를 힐긋하며 막내 의사 힐다가 말을 덧붙인다.
“얼마나 마음을 졸이셨을까요.”
그녀의 말에 레오노라를 욕하던 의사들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빠를 걱정하는 어린 딸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못하다니, 어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었으니까.
“크흠.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각하.”
루카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벅저벅 침대 가까이 다가간 아이반은 서적을 협탁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저희들은 각하께서 무사히 깨어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레오노라가 이렇게 과한 행동을 취할 필요는 없다는 속뜻이 담긴 말이었다.
“그래?”
아이반의 말에 레오노라를 달랑 안아들고 둥가둥가 흔들던 루카스가 턱을 치켜든다.
“아주 뛰어난 명의로군.”
가주의 뜬금없는 칭찬에 아이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도통 울음을 그칠 줄 모르는 레오노라를 아이반에게 내밀었다.
“공녀의 울음을 멈추게 하라.”
“…예?”
아이반은 의사였지, 유모가 아니었다.
평소 ‘가스파르’의 너그러움만 믿고 다리를 뻗던 그는 눈앞의 가주가 전혀 다른 사람이란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보고 공녀님을 달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명의는 사람의 마음까지 어루만질 수 있는 법이지.”
허엉, 엉.
우는 레오노라를 아이반의 앞에 눕힌 루카스가 살벌하게 뇌까린다.
“서둘러. 이러다 탈진하겠다.”
아이반은 묘하게 자신이 아는 가주보다 날카롭게 느껴지는 남자를 흘깃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하, 하지만-”
“한 시간 안에 어르지 못하면 네놈 목을 뽑아 주지.”
자르는 것도 아니고, 뽑겠단다.
“넵. 알겠습니다, 각하!”
아이반은 가주의 경고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이고, 우리 아가씨.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어요.”
“저희가 사랑하는 예쁘고 깜찍하고 귀여운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음? 부어서 커진 것 같지 않아, 룰루?”
“그런가? 하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우신걸!”
“…시끄러어. 눈누난나.”
나는 룰루랄라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퉁퉁 부은 눈가에 얼음주머니를 얹었다.
‘으, 너무 울었더니 머리 아파.’
마나를 소진해 정신력을 유지하지 못했더니 루카스 앞에서 완전히 아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탈진할 정도로 울어 젖히던 나는 의료원 원장인 아이반이 흉측한 제 얼굴을 내게 들이민 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우루루, 까꿍 따위를 하는 바람에 식겁하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게으른데다 못생기기까지? 반드시 내쫓고 말겠어.’
윽박지르는 나를 뚱하니 바라보며 무시하던 의사 무리 속에서 유일하게 결연히 고개를 끄덕인 여자를 떠올렸다.
‘그 사람에게 의료원을 맡겨야지.’
아직 젊은 여자였지만, 나태하고 게으른 아이반을 중요한 보직 중 하나인 의료원장 자리에 앉혀 놓고 싶지 않았다.
‘쓸 만한 의사를 곁에 두면 나중에 내 병을 치료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치료제를 알고 있긴 했지만, ‘엘릭서’는 대륙에 단 하나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치료제였다.
‘아이네스에게 빼앗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내 병을 치료할 다른 방도를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이불을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제 좀 진정이 된 건가.”
언제 침실에 들어왔는지 모를 루카스가 머리맡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쉰다.
“우는 아이 달래 본 적이 없어서.”
룰루와 랄라에게 축객령을 내린 그는 침대 근처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아내.”
“음?”
“미아내요. 갠히 루카쯔한테 화풀이해떠요.”
나는 손가락을 옴질거리며 나를 직시하는 루카스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창피해.’
우리의 맹약은 깨지지 않았으니 루카스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고로, 부러 가스파르의 몸을 차지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걸 다 알면서도 루카스를 원망하다니.’
어른스럽지 못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는데 루카스가 손을 뻗어 반쯤 미끄러진 얼음주머니를 다시 내 눈 위에 올려 준다.
“됐다. 뭐, 결과론적으로 내가 네 아빠 몸을 차지하게 된 건 맞으니까.”
“…압빠 영혼은, 느껴저요?”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루카스가 짧게 고개를 까딱인다.
“내가 일시적으로 몸을 차지할 때와 다르지 않다. 공작의 영혼이 장막 너머에서 너와 나를 지켜보고 있군.”
나는 루카스의 대답에 크게 안도하며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죽은 건 아니니까 되돌릴 방법이 분명 있을 거야.’
가령, 루카스의 몸을 되찾아 준다든가.
“루카쯔. 루카쯔 몸 어디쩌요?”
“내게 이런 저주를 건 놈의 손아귀에 있겠지.”
“죽진 안아꾸?”
“육체가 소멸했다면 내 영혼이 이리 멀쩡하게 남아 있진 못할 거다.”
나는 루카스의 설명에 흐음, 옅은 신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타몬 현 항제에게 있겐네.”
아이네스의 아빠이자 원작의 폭군, 그레고르 황제에게 말이다.
내 추측에 루카스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필시 그놈에게 있을 거다.”
“니니가 루카쯔 몸 찾아주께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잔뜩 부어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눈에 힘을 주었다.
“도와줄 수 이써요?”
“좋다. 몸을 찾는 건 나도 바라는 바이니 최선을 다해 돕도록 하지.”
대마법사 루카스 윌레닌이 지원해 준다니 무척 든든하군.
“움후후.”
게다가 루카스는 지금 가스파르, 그러니까 하차니아 공작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빠는 나를 걱정하느라 무모한 계획은 분명 방해했을 거야.’
나는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작은 머리를 파바박 굴리기 시작했다.
“뭐부터 하면 되지?”
열심히 계획을 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스가 침대에 올린 손으로 턱을 괸다.
‘원래의 루카스 윌레닌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레고르를 닮았으려나?’
나는 고요한 햇볕이 투명하게 맺히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힐끔하며 대답했다.
“됸.” (돈.)
“뭐?”
“우리 돈부터 버러야 대요.”
황제와 다이다이를 뜨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자금력이었다.
무력으로도 권력으로도 치환이 가능한 게 금이었으니까.
‘브리넨 후작에게서 뜯어낸 거금이 있긴 하지만, 충분하진 않아.’
나는 이아론 후작가의 손실을 메꾸느라 거덜 난 하차니아의 창고를 떠올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기에 불과한 네가 어떻게 돈을 벌 생각이지?”
내가 자꾸 볼 안쪽을 깨물고 입술을 깨무는 게 거슬렸는지, 내 입술에 제 손가락을 슥 가져다 댄 루카스가 뚜하니 입을 연다.
“녜? 니니 도와 준다면서오?”
나는 그의 물음에 화들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욘히 루카쯔가 벌어야조.”
“……어?”
“니니는 애기인데 돈을 어케 버러요.”
나는 당연한 걸 모르는 루카스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을 내저었다.
‘이래서 권력을 잡은 어른들이란! 게을러 빠져서 안 된다니까.’
어딜 감히 공으로 몸을 되찾으려고.
“루카쯔, 니니 대신 돈 벌어 올거조~?”
나는 앞으로 나를 위해 발로 뛰어 줄 어른 노예 1의 손등을 쓰다듬으며 헤헤 웃었다.
똑똑.
내 말에 와락 인상을 찡그린 루카스가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다급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침실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