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48)화 (283/486)

제48화

‘이 새끼가 어깨가 아니라 머리를 다쳤나?’

싶은 트리스탄의 발언에 나는 턱을 쩌억 벌렸다.

“천사든 요정이든, 이제 나의 레이디니까 상관없지만.”

내가 기가 막혀 뒤로 쓰러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린 트리스탄이 제 턱을 쓰다듬는다.

“례디 아녜오.” (레이디 아니에요.)

나는 트리스탄의 말에 철옹성 같은 벽을 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뭐?”

“니니 트리쯔딴 례디 아냐. 절대 아녜오.”

나는 당황한 듯 일그러지는 그의 금안을 분명히 보았지만, 보지 못한 체 그의 어깨 치료에만 전념했다.

‘얘를 기사로 삼았다간 계속해서 느끼한 말을 들어야 하잖아?’

생각해 보면 트리스탄은 아이네스의 ‘남주’로 자각한 이후 로맨스 남주의 정석처럼 굴곤 했었다.

‘하지만 난 겨우 세 살이라고!’

게다가 속은 이미 성인이라, 이제 겨우 열 살인 소년의 추파에 설레긴커녕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치뇨 끄읏…!” (치료 끝…!)

호다닥 붕대까지 칭칭 감아준 나는 속 시원하다는 듯 손뼉까지 짝짝 치며 트리스탄에게서 떨어졌다.

“잠깐. 내 레이디가 아니라는 건 무슨 뜻이지? 아까는 분명-”

“리니!!!”

당황한 트리스탄의 말을 끊은 괴성의 주인이 벌컥 응접실 문을 열어젖힌다.

“트리스탄이 다쳐서 네가 직접 치료를 해 주고 있다며, 그게 사실이야?!”

검술 대회 측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나보다는 조금 더 늦게 공작성에 도착한 에녹이었다.

“…정말이잖아.”

에녹은 내 손에 들린 붕대와 연고, 부상당한 트리스탄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흘깃하다 주르륵 제자리에서 무너졌다.

“정말 트리스탄을 너의 기사로 삼으려고? 내가 아니라?”

나는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진 에녹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웅?”

“그래서 트리스탄의 상처만 치료해 주는 거잖아! 나는 안 해 주고!”

“에노끄도 다치면 치뇨해 주 꼬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어떻게 키운 삼남인데.

하지만 아무리 훑어봐도 에녹의 몸은 상한 구석이 없었다.

‘아까 넘어져서 발목을 삐끗했나 싶었는데 멀쩡해 보이고.’

“그치만 에노끄는 안 아포.”

나는 트로피의 후광으로 반질반질하다 못해 번쩍 빛이 나는 에녹의 예쁘장한 얼굴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냐! 나 아파! 나도 다쳤어!”

“안 다쳐짜나.”

퍽!

에녹은 내 냉정한 판단을 믿지 않겠다는 듯 번쩍 손을 들어 트로피로 제 어깨를 내려쳤다.

졸졸졸.

트로피의 날카로운 장식이 박힌 에녹의 어깨가 기어코 피를 뿜는다.

콸콸콸이 아니라 졸졸졸이라 다행이었지만, 나는 에녹의 바보 같은 행동에 어이가 없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것들이 단체로 정신이 나간 건가?’

“에노끄! 모 하는 고야!”

“봐! 나도 피나! 나 아파!!!”

“당욘히 아푸겠지, 이 바부야~!!!”

트로피가 어깨에 꽂혔는데 그럼 안 아프겠냐!

나는 당당하게 제 고통을 호소하는 에녹의 만행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닫았던 구급상자를 허겁지겁 열었다.

“…솔로아 소공작에 이어 에녹까지 치료해 주는 건가?”

언제 응접실에 들어섰는지 모를 실베스테르가 빼꼼 고개를 내민다.

“나도 오전에 훈련하다 다쳤다.”

“…멀쩡해 보이눈데.”

나는 실비가 불쑥 내민 팔을 대강 살폈다가 그가 에녹의 어깨에 꽂혀 있는 트로피를 뽑아내는 것을 확인하고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다, 다쳔네!!! 여기 상처가 이썬네!!!”

아이고, 얼마나 아플까~!

호들갑을 떨며 구급상자에서 약을 찾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데 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진다.

“리니.”

“…압빠?”

“아빠도 손가락이 다쳤단다.”

나는 가스파르가 내민 손가락에 실가닥처럼 가느다랗게 그인 상처를 보고 한숨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오또케 다쳤눈데요?”

“종이에 베였다.”

“우웅. 압빠, 마니 아프겐네….”

“그래. 아프구나.”

별거 아니라고 했다간 그까지 트로피로 몸에 구멍을 낼 테지.

나는 별수 없이 한숨 섞은 호-호-를 연발했다. 니니 손은 약손 따위의 수치스러운 말까지 덧붙여 가면서.

* * *

“아가씨, 저 여기 아파요. 호- 해 주세요.”

나는 살짝 까진 손등을 들이밀며 울상을 짓는 룰루의 손을 붙잡은 채 헛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저는 아까부터 배가 살살 아픈 것 같아요.”

그러자 랄라까지 껴들어 제 배를 통통 두들긴다.

“공녀님, 저는 어제부터 두통이~”

‘코제트는 안 이럴 줄 알았는데…!’

나는 명석한 인재의 상징 같은 인물인 코제트가 꾀병을 부려 가며 내 앞에서 휘청이는 것을 보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저는-”

“저도-!”

코제트 뒤로 힐끗 보이는 인파는 계급 순으로 주르륵 줄을 선 공작가의 고용인들이었다.

‘기사도 몇 명 섞여 있는 것 같네….’

나는 아예 병자처럼 복도에 드러누운 고용인 한 명 한 명의 상처에 호호 바람을 불며 움직였다.

‘빨리 해치워야지. 그러지 않으면 공작가에 마비가 걸리겠어.’

저택 내부를 총괄하는 헨리가 나서서 이 사태를 해결해 주면 좋으련만, 그는 제 권력을 특혜삼아 일찌감치 내 ‘호호’를 받고 출근한 지 오래였다.

“아효, 내가 제명에 몬살아.”

나는 좀비처럼 어기적어기적 움직이는 고용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다음 식당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넝.”

황성에 불려 간 아빠와 전장에 나간 자카리를 제외한 공작가의 남자들, 그리고 트리스탄이 조르륵 식탁에 앉은 채 나를 반긴다.

각각 제 옆자리를 비우고 있는 게 조금 특이했지만, 그것만 빼면 영락없는 화목한 오찬 자리의 모습이었다.

“공녀, 여기 자리가-”

“리니, 내 옆에!”

나는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는 트리스탄과 에녹을 스윽 무시한 채 도각도각 걸어 실비의 옆에 안착했다.

“좋은 아침이다.”

무뚝뚝한 성정에 좀처럼 웃는 법이 없는 실비의 입꼬리가 씰룩 위로 올라간다.

‘웃을 일 아닐 텐데.’

나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실비의 매끈한 옆얼굴을 힐끗하며 왼손에 턱을 괴었다.

에녹의 검술 실력을 남주인 트리스탄과 대등할 정도로 키워 냈다.

검술 대회의 우승까지 거머쥐었으니 이제 숨은 강자이자 원작 남주의 귀인이었던 스승이 에녹을 맡아 줄 것이다.

‘이제 슬슬 실비를 개조할 차례야.’

삼남 다음에는 차남 아니겠는가.

가늘게 뜬 눈으로 실베스테르를 살핀 나는 그의 몸 안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은색 오러의 향연에 입맛을 다셨다.

‘트리스탄보다도 체내에 담은 오러의 파동이 거대해. 실비는 제 힘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어.’

원작에는 제대로 등장하지도 않는지라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실비는 타고난 오러를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잠재력을 일깨우는 게 또 내 전문이란 말이지.’

움후후.

절벽에서 확 밀어 버려? 악어 입에 던져?

실비의 능력을 극대화시킬 만한 상황을 상상하며 손가락을 맞부딪힌 나는 상큼한 산딸기가 장식된 프렌치토스트를 한 움큼 입에 집어넣으며 히죽 웃었다.

* * *

“아가씨, 각하께서 편찮으시대요! 황궁에서 마악 오셨는데요!”

“우웅.”

침대에 엎드린 채 실비 개조 계획을 열심히 짜던 나는 룰루의 다급한 말에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니니가 이따 호- 해 주러 가께.”

보나마나 내 재롱을 보고 싶어 아빠가 꾀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아가씨….”

한데, 내게 가까이 다가온 룰루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굳어져 있었다.

“…니니, 구냥 지굼 갈래.”

“네, 아가씨.”

룰루는 나를 냉큼 안아 든 후 가스파르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떡갈나무문이 가까이 보일수록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뛴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압빠?”

침대에 누워 있는 가스파르의 파리한 얼굴에 덜컹 가슴이 가라앉는다.

“…압빠!!!”

발밑이 꺼지는 기분에 나는 오도도 달려 나가 의식을 잃은 가스파르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우리 아빠, 왜 이래?”

“황궁에 다녀오신 후에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지셨습니다.”

내 물음에 의사는 말을 고르는 중인지 뭔지 입술만 달싹이며 답을 회피했다.

“왜 이러냐니까-!”

그런 그가 답답해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잘 모릅니다. 저희들이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의사가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진단표를 만지작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공녀님.”

나는 주군을 모시는 태도가 아닌, 애를 어르듯 하는 의사의 태도에 기가 막혀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파악하기 위해 노오력을 한다고?’

아픈 가족을 둔 사람에게 의사가 할 수 있는 말 중에 그것보다 답답한 말이 어디 있나.

“노력만 다하지 말구, 잘해.”

나는 이를 부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바루 하는 게 조을 거야.”

나는 내게 고개를 조아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공작가의 의사들 한 명 한 명을 노려보며 눈을 빛냈다.

“압빠 못 깨어나묜, 한 놈씩 목을 치게써.”

의사 목 자르는 건 아빠들만 하는 건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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