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45)화 (280/486)

제45화

가스파르는 루카스가 자신의 몸을 차지하는 동안의 일들을 기억할 때도 있었지만, 새까맣게 모를 때도 있었다.

“후작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이 들이닥쳤지만, 레오노라 너는 지루함을 참지 못해 그전에 저택을 빠져나왔다고.”

바로 지금처럼.

‘일이 조용히 마무리되어서 참 다행이야.’

나는 내 말을 철썩같이 믿어 주는 순진한 아빠의 얼굴에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녜!”

“네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가스파르는 해맑은 내 대답에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안아들었다.

“도대체 어떤 후안무치가 제국의 개국 공신인 브리넨 후작가의 저택에 불을 질렀는지.”

“그로니까 마리에요, 압빠. 전말루 몹쓸 넘들이야.”

바주카포로 후작저를 날린 건 다름 아닌 나였지만, 나는 가스파르의 말에 크게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우리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저 소년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냐, 리니.”

나는 가스파르의 말에 달리는 마차의 창문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었다.

햇빛에 바랜 먼지 같은 은회색 머리칼이 바람에 산들산들 흔들리고 있었다.

‘고생하지 말고 마차에 타라니까.’

가속 아티팩트를 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달리는 마차를 발로 따라잡는 소년의 신체 능력은 가히 놀라울 지경이었다.

‘웬만한 오러나이츠들보다도 뛰어난 것 같은데.’

“우웅. 알아요. 니니 친구야.”

“친구?”

“웅. 구훌언에서 데려와써요.”

“아, 벨루치라는 소녀와 함께 말이냐.”

“녜.”

가스파르는 구휼원의 정체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구휼원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고 있는지는 아는 모양이었다.

“그래. 너도 그럴 때가 되었지.”

그는 내가 데려온 벨루치와 소년을 어린 귀족들이 흔히들 구휼원에서 데려오는 말동무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애도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이해하면 좋을 텐데.’

“종속된 노예가 어찌 주인과 함께 마차에 오르겠습니까.”

나는 마차에 오르라는 내 말을 단호하게 거절하던 소년의 말을 떠올렸다.

“아효….”

내가 소년에게 같이 구휼원에서 나가자고 한 건 자유를 찾아 주겠다는 말이었지, 내게 종속되라는 뜻이 아니었는데.

‘셀리아 모녀와 벨루치, 그리고 저 애까지. 하차니아가 먹여 살릴 입이 갑자기 늘어 버렸네.’

나는 가스파르의 눈치가 보이는지 내 옆에 바짝 굳어있는 셀리아를 돌아보았다.

“압빠, 니니는 쎌랴를 니니 호위로 삼고 시퍼요.”

내 말에 아기를 껴안고 있던 셀리아의 팔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저, 저를 호위로요?”

놀란 셀리아의 얼굴을 힐긋한 가스파르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집시를 말이냐.”

“웅. 집시 완전 쎄요.”

집시가 강한 건지, 셀리아가 특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구휼원에서 확인한 셀리아의 무위를 떠올리며 뺨을 긁었다.

“그래. 너도 이제 외부 활동을 시작할 나이니까. 아기는 탁아소에서 보살필 수 있도록 하마.”

내 말에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한 눈초리로 셀리아를 판단한 가스파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말대로 강한 사람인 것 같으니.”

“…감사해요, 공작님.”

셀리아는 눈길 한 번으로 제 무력을 간파한 가스파르가 놀랍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요?”

마차가 공작저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눈치챈 벨루치가 다급하게 입을 연다.

“공녀님, 저는 뭘 하면 되나요?”

아빠의 에스코트를 받아 땅을 디딘 나는 왠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벨루치를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응? 베루띠는 그냥 쉬어.”

“저, 일할 수 있어요.”

“쉬어. 베루띠 어짜피 할 일두 업서.”

당분간은.

벨루치는 명석한 인재였으니 후에 내게 요긴하게 쓰일 터였지만, 나는 구휼원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살아온 그녀를 당장 부려 먹고 싶지 않았다.

“…네, 공녀님.”

하나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벨루치의 얼굴이 어둡다.

나는 그 점이 의아했지만, 도개교까지 넘어와 나를 꼬옥 끌어안는 에녹에게 정신이 팔려 그녀를 챙기지 못했다.

* * *

“미찐….”

브리넨 후작의 비밀 서고에서 챙겨 나온 서류를 펼쳐 든 나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구휼원의 이해관계에 기가 막혀 한숨을 내쉬었다.

구휼원에서 생산되는 마정석의 유통망은 황실에서 운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바하무스 상단과 5대 귀족에 속한 솔로아, 브리넨과 맞닿아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솔로아 공작과 브리넨 후작, 그리고 황제까지 한통속이었단 뜻이지.’

나는 구휼원의 주공급원, 그러니까 고아들을 가져다 바친 곳의 정체가 국교인 루엘라드의 중앙 신전인 것을 확인하곤 머리를 쥐어뜯었다.

‘중앙 신전까지 이 사업에 얽혀 있는 거라면, 이건 제국이 뿌리까지 썩었다는 거야.’

중앙 신전이 정말로 브리넨 후작이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 줄 거라고 생각해서 신전이 거둔 고아들을 구휼원에 보낸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원작에 구휼원이 언급되었을 때는 분명 브리넨 후작이 최종 흑막이었을 텐데.’

나는 벨루치의 외전 이후로는 단어 한 글자 추가되지 않은 원작을 손끝으로 꾹꾹 누르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만에 하나 황실과 중앙 신전이 구휼원의 주체라면, 제2의 구휼원이 생기는 건 시간문제야.’

기밀문서에 따르면 브리넨 후작은 마정석 공급자였지, 마정석의 재료가 되는 ‘인간’의 공급원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썩은 어른만 가득한 사회라니 끔찍하네.’

차라리 하찮은 조무래기 가문이어도 이런 일에 연루되지 않은 하차니아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나는 하차니아의 성을 이은 남자들의 나약한 정신머리를 떠올리며 소시지를 이어 만든 듯 통통한 손가락으로 깃펜을 들었다.

☆★ 리니의 비밀 계획 ★☆

1. 노엘 찾기

엄마의 실종은 이네스 황후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

생트로페 해적단이 황실에 원한을 갖게 된 원인을 알아볼 것.

노엘을 찾는 건 가스파르나 에녹, 실비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슬퍼하는 거 다 느껴지니까.’

나는 노엘이 사라진 후 수심이 떠나지 않는 가스파르의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며 아효효, 한숨을 내쉬었다.

‘찾는 김에 트리스탄의 어머니도 같이 찾으면 좋을 텐데.’

뭐, 내버려 두면 원작 여주인 아이네스가 찾긴 하겠지만.

2. 변절된 제국 무너뜨리기

이건 결국 내가 살 수 있는 방법과 맞닿았다.

하차니아는 그레고르 황제의 마수를 피해야만 했으니까.

‘게다가 제국이 무너져야 마정석을 인간에게서 채굴하는 반인륜적인 행위가 사라지겠지.’

황실과 신전이 사람들의 생명을 갈취하면서까지 마정석을 긁어모아야만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나와 오러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으니까.

마법사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탓에 제국의 왕족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편리한 삶을 지키기위해 아티팩트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신전과 황실은 늘 서로를 견제하며 내전을 준비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 대부분에 마정석이 필요했으니 더욱 안달을 내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애초에 안 싸우면 마정석도 필요 없는 거잖아.’

나는 몇 번의 회귀를 거듭한 아이네스가 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지 고민하다 노트를 접었다.

“아효, 애나 확인하러 가바야지.”

고집을 부려 공작저까지 걸어온 소년에게 주어진 자리는 겨우 잔심부름이나 하는 시동이었다.

‘벨루치처럼 쉬게 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었어.’

솔직히 나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소년은 아이네스가 주인공인 원작에서도 전설 속 인물로 언급되는지라 정보가 거의 없었으니까.

“눈누, 내가 데려온 ‘그 애’ 어디 이써?”

“아마 지금은 마구간에 있을 거예요. 마구간 일은 워낙 험해서 원래는 바느질이라도 시키려고 했는데….”

“했눈데?”

나는 늘어지는 룰루의 말꼬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애가 힘이 장사더라구요. 바늘이든 뭐든 전부 부러뜨려서 어쩔 수 없었어요.”

“…우웅, 그래꾸나.”

병기로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기 때문인지 일반적인 노동에 어느 정도의 힘이 필요한지 감을 잡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구간 근처에 당도한 나는 바닥을 나뒹구는 나무 기둥과 히잉, 힝 소리를 내며 주변을 뛰어다니는 말들을 발견하고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마구간도 부쉈구나.’

나는 마구간지기 폴에게 잔뜩 혼이 났는지 기가 죽은 듯 구석에 웅크려 있는 소년을 응시했다.

“얘.”

나는 소년을 ‘빌헬름’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 이름은 셉터와 마찬가지로 소년을 구속하는 도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오셨습니까.”

“웅.”

“죄송합니다. 공녀에게 폐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

“갠차나. 나 이졔 돈 마나서 마구깐 세 개쯤 부셔도 대.”

“…일전에 말했듯이 나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못 될 겁니다. 내 역할은 이미 소멸했으니까.”

나는 쭈글쭈글하다 못해 땅 속으로 기어 들어갈 것만 같은 소년의 모습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빌헬름은 수호자라는 뜻이었지.’

아크레아를 지킬 수호자. 목적이 명백한 소년의 이름에 가슴 한구석이 시려 온다.

“도움 안 돼도 대.”

“…….”

“내가 널 조껀 업시 사랑해 준다구 약속해쓰니까.”

나는 나와 가만히 조용히 눈을 맞춰 오는 소년을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히스.”

“네?”

“나는 이졔 너를 히스라고 부르 꺼야.”

“무슨 의미입니까.”

나는 히스의 물음에 근처에 피어난 히스꽃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옅은 분홍색 꽃은 분명 눈앞의 소년만큼이나 아름다웠지만, 왜 생겨났는지, 왜 존재하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의미도 업써.”

너는 앞으로 그렇게 살아도 되니까.

들판에 핀 꽃처럼,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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