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아씨, 입 아퍼.’
또박또박 말하느라 입 아파 죽겠네.
“니니가 고욘하게써.”
황당하단 듯 일그러진 백작의 얼굴을 노려보며 벨루치의 손을 잡은 나는 폴짝폴짝 뒤로 물러나 테이블에서 내려왔다.
“공녀님께서 벨루치를요.”
“웅.”
“오천 골드는 있으시고요?”
오천 골드는 공작가에서 없어서 죽을 돈은 절대 아니었지만, 세 살짜리 공녀에게 용돈으로 쥐여 줄 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나는 나를 무시하는 듯 이죽이는 후작의 얼굴에 콧방귀를 흥 뀌어주며 대답했다.
“당연히 이찌. 니니는 공녀니민데.” (당연히 있지. 리니는 공녀님인데.)
나는 나풀나풀 흔들리는 드레스자락을 뒤져 룰루와 랄라가 열심히 병아리 자수를 놓은 돈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여기써요.”
나는 오천 골드쯤은 푼돈이라는 양 후작에게 백지 수표를 던져 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후잔니, 가난한가 바요.”
전국에서 고아들을 모집해 갈취하는 후작가의 재산에 비하면 하차니아의 재산은 보잘것없을 것이다.
‘하지만 브리넨 후작이 착복한 부는 내가 어떻게든 뺏어올 테니까.’
나는 후작이 돈에 예민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콧잔등을 손끝으로 쓸었다.
“부땅해. 후잔니 가난해서 엉니 오빠들 팔아쩌요.” (불쌍해. 후작님 가난해서 언니 오빠들 팔았어요.)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내 말에 울컥한 후작이 당장이라도 내 멱살을 틀어잡고 싶은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는 귀족들의 눈치가 보이는지 차마 내게 손을 대지 못했다.
“암튼, 니니 이만 가께요. 연회 재미업써.”
눈물이 얼룩져 엉망이 된 벨루치를 잡아끈 채 뒤를 돈 나는 손바닥을 팔랑였다.
* * *
“네? 뭘 하시겠다고요?”
“몬 알아드러써?”
혹시라도 못 알아들을까 봐 혓바닥에 잔뜩 힘을 주고 말했더니 벌써부터 입이 얼얼했다.
나는 황망하게 일그러진 벨루치를 노려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첨부터 다시 말해조야대?”
구휼원 연회에 막 들어선 순간부터 빠르게 머리를 굴려 세운 내 계획을 셀리아와 벨루치에게 설명하느라 무려 두 시간을 소진했다.
‘아티팩트 효력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나는 초조함에 손가락 끝을 물어뜯으며 구석에 쥐죽은 듯 몸을 웅크리고 있는 소년을 힐끗했다.
‘셀리아의 아기는 갓난아기라 없어져도 크게 주목을 받지 않을 테지만, 쟤는 달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소년은 후작의 편애-그걸 편애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받는 듯했다.
‘없어지면 찾으려고 들 거야. 그러니까 구휼원을 아예 엎어 버려야 돼.’
브리넨 후작가가 소유한 고대 병기를 빼 오게 되면 어차피 후작가와 척을 지는 건 피할 수 없었다.
‘적으로 만들 거라면, 아예 처음부터 납작 눌러 버리는 게 낫지.’
병기를 빼앗기고 구휼원까지 와해되면 브리넨 후작가는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지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애초에 브리넨 후작가는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멸망한 마도 왕국인 아크레아의 고대 병기가 없었다면 5대 귀족에 속하지도 못할 한미한 가문이었으니까.
“공녀님께서 브리넨의 고대 병기를 무슨 수로 찾으시게요? 후작이 가보처럼 여기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인데.”
벨루치는 보기보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인 듯싶었다.
나는 ‘나를 고용해 준 건 고맙지만 병기를 훔치는 건 무서워. 죽고 싶지 않아!’ 따위의 말로 도배되고 있는 소녀의 외전을 힐끔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구휼원의 아이들도 구경 한 번 못 해 본 물건이에요. 포기하시는 게-”
“베루띠. 구훌언의 아이들이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어떠케 처리되고 인는지 아라?”
내 물음에 벨루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볼 안쪽을 깨물었다.
나는 내가 그녀의 속을 긁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어 말을 이었다.
“너는 또또칸 애니까 대충 눈치챘을 고야.”
“…정말로 후작이 아이들을 죽이고 있나요?”
나는 벨루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내리깔았다.
“응.”
마정석을 한계까지 추출하면 아이들의 마나는 언젠가 반드시 고갈된다.
팔리든 팔리지 않든, 구휼원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하지만 구휼원에 사는 아이들의 수가 어마어마해요. 그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죽었는데 어떻게 아무도 후작의 잔인함을 눈치채지 못할 수 있죠?”
“아이들의 보호자가 없었으니까.”
내 짤막한 대답에 잔뜩 흥분해 벌어졌던 벨루치의 입이 꾹 다물어진다.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약자였다.
지켜줄 어른이 없으면 삶이 고달파질 수밖에 없는.
“좋아요. 저, 공녀님을 돕겠어요.”
나는 한껏 결연해진 벨루치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웅. 고마어.”
벨루치가 구휼원의 아이들을 모아 도피를 준비하면 나와 셀리아가 병기를 훔쳐 구휼원을 파괴시킨다는 게 내 계획이었다.
“알겠어요. 준비가 되면 신호를 보내 주세요.”
“웅. 호루라기를 부꼬야.”
나는 가스파르 호출용 호루라기에서 그에게 알람이 가는 아티팩트를 떼어 내며 대답했다.
“가자, 쎌랴.”
“네, 아가씨!”
아기를 곧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설레는지 잔뜩 고양된 셀리아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아직도 구석에 몸을 옹송그린 채 박혀 있는 소년에게 손을 뻗었다.
“너두 가자.”
“저도 말입니까?”
“응. 구휼원 부수러 같이 가자.”
내 대답에 소년은 빛이 죽은 담백한 청안을 느릿느릿 깜박였다.
“때가 된 모양이군요.”
“…때?”
소년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내가 병기 위치를 아라. 따라오기만 하믄 대.”
원작에서 언급된 고대 병기의 묘사를 떠올리면 짐작 가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후작의 집무실과 연결된 비밀의 방.’
마도 왕국으로 불렸을 만큼 마법이 발전했던 나라인 아크레아의 장인들이 자신들의 고국을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제작했다던 병기는 분명 그곳에 있을 것이다.
* * *
소년이 후작저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집무실을 찾아가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열지?’
거대한 너도밤나무문 앞에서 멈춘 나는 턱을 긁적였다.
‘그냥 부수면 사람들의 이목을 사 버릴 텐데.’
병기의 작동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 병기만 손에 넣으면 후작저의 모든 기사들이 달려들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병기를 작동하기도 전에 발각되는 건 조금 위험했다.
“후우.”
“아가씨, 왜요?”
“어케 드러가지 시퍼서.”
전생에 괜히 특수부대 요원하지 말고 도둑질이나 배워둘걸.
영화에서 보면 실핀으로 어찌어찌 잘만 열던데, 내게 문이란 발로 차서 여는 것이었지 몰래 따는 물건은 아니었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민하자 셀리아가 그게 문제였냐며 앞으로 나서더니 문손잡이를 흔들기 시작한다.
“모하는 고야?”
덜그럭. 덜그럭.
달칵.
나는 길게 다듬어진 손톱으로 무려 후작의 집무실 문을 열어버린 셀리아의 재주에 입을 쩌억 벌렸다.
“…쎌랴, 언래 집시라구 해짜나?”
“네. 원래 집시들은 이런 거 다 할 줄 알아요.”
춤추고 노래하는 유랑집단을 집시라고 하는 거 아니었나.
나는 셀리아의 출신에 대한 의구심을 슬그머니 품으면서도 활짝 열린 집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원작에서 묘사된 그대로네.’
브리넨 후작가의 상징인 전나무가 인각된 널따란 책상과 테이블.
벽을 장식하는 태피스트리는 아크레아인들을 짓밟고 선 윌레닌 제국 초대 황제의 초상화였다.
‘아이네스가 우연찮게 병기를 찾았던 곳이 바로 저 초상화 뒤편이었지.’
원작에서 묘사된 고대 병기는 분명 셉터의 형태였다.
옅은 갈색머리에 여름 녹음처럼 푸른 눈동자, 아이네스가 그대로 빼닮았다는 초대 황제는 원작에서의 묘사보다 잔인한 인상이었다.
‘하긴, 선량한 황제가 한 나라를 그토록 흉포하게 도륙 낼 수는 없었겠지.’
초대 황제는 아크레아를 멸망시켰을 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지워 버렸다.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나라 자체를 심해 속으로 가라앉혀 버렸다고 했나.’
아이네스가 아크레아의 존재를 아는 것도 그녀가 황실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발견한 기밀문서 덕분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태피스트리를 잡아당긴 나는 모습을 드러낸 벽을 빠르게 훑었다. 각종 총기류가 벽을 빼곡히 장식하고 있었다.
‘라이플부터 리볼버, 그리고 카빈 소총까지 있네.’
나는 내게는 제법 익숙한 무기들을 살피며 인간이 들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바주카포의 몸통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중에서 어떤 게 고대 병기인 걸까? 셉터처럼 보이는 건 없는데.’
브리넨 후작은 화약 대신 마정석을 연료로 이용하는 무기를 개발해 오고 있었다.
‘동맹국과 손을 잡고 반역을 준비 중이었지.’
그레고르가 역적을 소탕하느라 골머리를 앓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지만, 후작이 쌓아 올린 힘의 원천이 힘없는 아이들이란 점이 내 ‘하차니아병’을 자극했다.
“구휼원을 와해시키려면 병기를 훔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파괴해야 할 겁니다.”
무기를 구경하는 내 옆에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소년이 내 손에 아기가 들 정도로 작은 총을 쥐여 준다.
차그락.
스프링이 장착된 레버에서 새빨간 불꽃이 튀었다.
“서둘러 나를 죽이십시오.”
“…뭐?”
“내 이름은 빌헬름 그라프 폰 슈페.”
아크레아의 마지막 왕이자 제국에 사로잡힌 병기입니다.
나지막한 음성이 고요한 먼지가 부유하는 어두컴컴한 방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