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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35)화 (270/486)

제35화

나는 사람들의 탄성에 짜릿함을 느끼며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열심히 훈련시킨 보람이 있네.’

놀란 바리스탄의 얼굴을 보는 것이 통쾌하긴 했는지, 에녹 또한 입가에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제 ‘스승’을 향해 턱짓했다.

“오러소드라면, 저도 다룰 줄 압니다. 바리스탄 경.”

“……에녹, 도대체 언제부터 오러소드를 구현할 수 있게 된 거냐.”

자신이 가르친 적도 없는 기술을 구사하는 에녹의 눈부신 성장에 바리스탄은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떨떠름한 반응의 바리스탄을 향해 에녹이 비스듬히 턱을 치켜든다.

“스승님께는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제자인 제가 오러소드를 구현할 수 있게 되었는데.”

“기, 기쁘긴 하다만 네게 오러소드를 구현하는 방법을 아직 가르치지 않았으니…….”

“그러타면 에노끄는 가르친 적두 업는 오러소드를 사뇽할 줄 아눈 미찐 천졔네?!” (그렇다면 에녹은 가르친 적도 없는 오러소드를 사용할 줄 아는 미친 천재네?!)

나는 바리스탄을 향해 남몰래 혀를 삐죽 내밀며 에녹에게 도도 달려가 셋째의 손을 잡았다.

“에노끄, 넘 머시쩌!”

내게는 오러소드를 이미 몇 번이나 보여 줬는데도, 에녹은 내 칭찬이 부끄러운지 콧등을 검지로 쓸며 씨익 웃었다.

“어쨌든 제게 검술 대회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는 건 확실히 보여 드린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이른 나이에 오러소드를 구현하게 되었다고 너무 자만하지 말도록.”

“물론 트리스탄에게도 같은 말을 하셨겠죠. 알겠습니다.”

에녹이 날카로운 대답에 바리스탄이 멋쩍은 턱을 쓰다듬는다. 나는 에녹의 등 뒤에 숨어 빼꼼 고개를 내민 채 그를 노려보았다.

‘솔로아 공작이 저 인간을 팽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텐데.’

나는 ‘오러석 유통’이 단순히 그의 도박 빚 탕감을 위해서만은 아니리란 예상에 콧잔등을 움찔했다.

“일딴 에노끄, 훈뇬하러 가쟈.”

나는 에녹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아장아장- 걸어 연무장을 벗어났다.

* * *

‘일단 첫 번째 순서로는…….’

역시 찻물에 퇴치 당하지 않는 법을 연습해야겠지.

“악!”

아이네스가 미래에 찻물로 에녹을 퇴치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가장 먼저 손에 든 식은 홍차를 에녹에게 뿌리는 것으로 노출 치료를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리니!”

‘아직 찻물에 겁을 먹을 정도로 물 공포증이 심화된 상태는 아니구나.’

이 정도라면 약간의 트레이닝만으로 공포증을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에노끄, 우리 바다에 놀러 가까?”

마침 아르델은 바다와 맞닿은 항구 도시였으니까.

“바, 바다?”

“웅. 덥자나.”

“날 바다에 던질 셈인 거야, 리니?”

나는 에녹의 의심 가득한 시선에 헤헤, 천진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이, 내가 설마 그러게써? 니니가 에노끄 얼마나 조아하는데.”

“넌 충분히 그럴 것 같은데?”

이 자식, 날 생각보다 잘 파악했는걸.

나는 멋쩍은 턱을 긁으면서도 고집을 부려 에녹을 끌고 바닷가로 놀러 나왔다.

‘……이게 놀러온 게 맞는다면 말이지.’

나는 예비 훈련도구-마차 바퀴-와 밧줄, 그리고 교관 모자가 들어 있는 바구니의 리본 끈을 만지작거리다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쉬러 온다고 했으면서, 도대체 그런 건 왜 챙겨 온 거야?”

“혹시 모르자나.”

에녹이 훈련을 하고 싶어 할지도? 싶었지만, 그가 내 대답에 질색하며 고개를 젓는다.

“가까이 다가오지 마!”

“바닷가루 안 민다니까!”

저 자식이 사람 말을 못 믿네.

“에노끄 고생 마니 해쓰니까, 오늘은 쉬어두 대!” (에녹 고생 많이 했으니까, 오늘은 쉬어도 돼!)

“근데 왜 쉬는 장소가 하필이면 바다인 건데?”

“에노끄 바다 조아해짜나.”

하차니아 공작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다를 좋아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청량한 외모를 자랑하는 노엘, 제국 유일의 여자 제독이었던 엄마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것도 다 옛날 일이지, 리니.”

노엘과 함께 바다에 놀러 왔던 추억을 떠올린 듯 씁쓸한 미소를 지은 에녹이 내 머리를 쓰담쓰담 매만진다.

“그래도 오랜만에 나오니까 좋긴 좋다.”

백금처럼 새하얀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은 에녹이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 무릎을 툭툭 두드린다.

나는 햇볕을 받아 찬란하게 빛이 나는 에녹의 금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쫑쫑 셋째에게 다가갔다.

“에노끄, 슬포?”

“아니. 안 슬퍼. 엄마는 곧 돌아올 거니까.”

“…….”

아빠나 실비, 에녹은 당연하게도 노엘의 죽음을 받아들인 상태가 아니었다.

‘이네스 황후의 시체는 발견되었지만, 노엘은 단순히 행방불명 상태이니까.’

아빠는 엄마가 죽었으니 장례식을 치르고 공작 부인을 새로 들여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원로들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원작에서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인물은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겠네.’

원작에서는 노엘의 행방에 대해 언급조차 되지 않았고, 트리스탄의 외전에서도 이네스 황후의 죽음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외전을 모아 봐야 하는 건가.’

나는 마치 내게 채우라고 말하는 듯 텅텅 빈 꼭짓점을 자랑하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트리스탄의 외전이 생기자마자 꼭짓점이 붉은색으로 채워졌어.’

까맣게 번들거리던 오망성의 모서리는 이제 루비처럼 새빨간 보석이 되어 버렸다.

“후움.”

내 마나로 다른 모서리까지 채워질까 싶어서 끙, 힘을 줘 봤지만 텅 빈 모서리는 잠깐 반짝일 뿐 원래의 공허한 색으로 돌아가 버렸다.

‘다 채우면 무슨 일이 생기는 거지?’

구슬을 몇 개 모으면 신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준다는 구전처럼, 책을 수호하는 정령이라도 나타나 내 소원을 들어주려나.

‘엘릭서나 두 개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여자 주인공인 아이네스도, 나도 둘 다 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하나라면 반드시 내가 차지해야 해.’

내 소중한 목숨도 목숨이었지만, 하차니아 공작가의 가주-아빠-나 후계자들이 생각보다 너무 호구인지라 내가 죽으면 반역을 저지르지 않아도 공작가가 쫄딱 망해 버릴 것만 같았다.

‘솔로아의 가주도 아니고, 원로에 불과한 바리스탄에게 후려치기나 당하고 말이야.’

나는 에녹의 나약함에 잠시 침울해져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물 근처에는 가지도 않고 멀찍이 떨어져 해안선만 바라보는 셋째를 힐끗했다.

“에노끄, 니니는 바닷가에서 놀구 이쓸께.”

부러 물장구를 치는 게 재밌다는 양 찰박찰박 얕은 바닷물을 밟아 봤지만, 에녹은 나와의 거리를 좁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물에 빠뜨리는 방법은 트라우마만 자극할 뿐일 텐데.’

어쩌면 좋지, 고민하며 발을 동동 굴리는데 조용했던 해변가가 일순 소란스러워진다.

“이곳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이 해변은 하차니아 공작가의 사유지입니다! 마차를 멈추십시오!”

공작가 소유의 개인 해변에 누군가 억지로 들어오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간도 크지.’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마차 창문 밖으로 고개를 쑥 내민 소년과 눈이 마주친다.

잿더미에 파묻힌 듯 흐릿한 벽안을 마주하자마자,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 맞아?’

인간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창백한 도자기같이 흰 피부 위에 섬세한 선으로 채워진 이목구비는 한 폭의 명화에 가까웠다.

앳된 얼굴과 달리 키가 헌칠하지 않았다면 여자아이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 만큼 고운 소년이었다.

‘하지만 아름다워서 사람처럼 안 보인다기보다는….’

무뚝뚝한 가스파르나 신경질적인 루카스, 그리고 차분한 실베스테르도 표정이 다양한 편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그보다 더 무감해보였다.

무(無).

텅 빈 껍데기처럼 보이는 소년이 브리넨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에서 천천히 내려선다.

‘브리넨은 딱히 하차니아와는 접점이 없는 가문인데, 여긴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나는 소년을 따라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힐끗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당신이 레오노라 공녀입니까?”

“녜.”

“아버지께 명을 받아 찾아왔습니다.”

나는 소년의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브리넨 후작에게 아들이 있었나?’

애초에 그가 구휼원을 운영하는 핑계가 후계를 이을 자식이 없어서라고 알고 있는데.

나는 의아해진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딱딱한 얼굴의 소년을 마주했다.

“아버지께서 공녀를 이번 구휼제에 초대하고 싶어 하십니다.”

분명 소년은 잘 교육받은 귀족 아이처럼 정중하고 예의가 바른 태도를 지녔다.

하지만 내 안에 잠든 ‘미친개의 감’이 눈앞의 소년이 단단히 미친 인간이라는 걸 경고하듯 빨간불을 켜고 있었다.

“초대장을 받아 주세요.”

어딘지 모르게 현대의 로봇이 생각나는 딱딱한 말투였다.

나는 이름 모를 소년이 다짜고짜 손을 들어 내 눈을 파 버리기라도 할까 봐 질끈 눈을 감은 채 뒷걸음질 쳤다.

“헙.”

그러다 갑자기 수심이 깊어진 모양인지, 발을 헛디딘 나는 어푸어푸 손발을 저으며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리니!!!”

놀란 에녹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지만, 바로 가까이에 서있는 소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다.

“……인간 아기는 정말 약하네요.”

‘이 미친놈이!’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이상한 감상이나 하고 있는 게 역시 보통 정신머리는 아니었다.

‘도움 받는 건 포기하자.’

그나마 날 도와줄 수 있는 소년은 도와줄 기미가 없었고, 후작가 무리에게 붙잡힌 룰루와 시종들은 달려와 줄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잠수를 해서 다시 붕 떠오르는 거야.’

특수 부대 출신인 내가 수영을 못 할 리 없었다.

레오노라의 몸으로 수영을 해본 기억은 없지만, 나는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꾹 감은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레오노라!!!”

“꺄악, 아가씨!!!”

그런 내가 물에 완전히 빠졌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룰루의 비명이 자지러진다.

“누가 우리 아가씨 좀 구해 주세요!!!!”

‘익숙하지 않은 몸으로 수영을 하려니까 어렵네.’

아이 몸은 물에 더 잘 뜬다고 알고 있는데, 레오노라의 몸이 맥주병인 걸까.

나는 좀처럼 쉬이 떠오르지 않는 몸을 침착하게 관찰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잠깐만 기다려, 룰루.’

마음이 약한 룰루가 기절이라도 할까 싶어 서둘러 물장구를 치는 순간,

풍덩-!

누군가 바다로 뛰어드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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