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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34)화 (269/486)

제34화

‘저놈이 어떻게 아직도 스승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지?’

솔로아 공작은 몹시 멍청하거나 제 아들을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님 둘 다 일지도 모르지.’

나는 적랑의 기사들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바리스탄의 모습에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내 눈치를 보는 건지 그는 내 쪽으로는 아예 얼굴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뭐, 어차피 검술 대회에서 우승만 하면 에녹의 검술 선생이 바뀔 테니까.’

오늘은 아주 간만에 트리스탄과 에녹의 합동 수업이 잡힌 날이었다. 하계 훈련이라는 명명하에 아르델에 적랑과 백랑의 기사들이 모인데다 검술 대회 출전자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왔군.’

훈련에 임한 건 에녹이지만,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움후후.”

아르델 백작저의 연무장이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차양을 설치한 나는 룰루랄라를 양옆에 단 채 의자에 앉았다. 백작에게 받은 포상금의 일부로 산 이동식 의자는 아기의 여린 엉덩이를 편안하게 보호해 주는 아티팩트였다.

‘남은 돈은 가스파르에게 맡기지 말고 내가 굴려야겠어.’

나는 원작에서 쓸 만했던 투자처를 속으로 골라내면서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그나저나 바리스탄놈, 에녹의 실력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승한 것을 보면 아주 눈이 튀어나오겠지!’

에녹이 트리스탄에 비해 오러를 다루는 요령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간 그가 우리 셋째를 얼마나 괄시했는가.

‘그간의 설욕을 되갚아 줄 차례라고.’

얄미운 바리스탄 솔로아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이를 뿌득 갈며 열이 오른 뺨을 손등으로 눌렀다.

“눈누, 부째질.” (룰루, 부채질.)

“네, 아가씨.”

“난나, 쥬쭈.” (랄라, 쥬스.)

“넵.”

쪼로록.

룰루가 일으키는 시원한 바람과 랄라가 가져다준 딸기 주스로 머리에 오른 열을 간신히 가라앉힌 나는 차분하게 연무장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시끌벅적한 연무장에는 솔로아 공작가 측의 기사처럼 보이는 자들도 여럿이었다.

‘대기 중인 써머나이츠가…… 한 열 명쯤 되는 건가?’

트리스탄과 에녹의 합동 수업이 오랜만인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적랑에서도 검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하는 기사들이 꽤 있을 테니까.’

바리스탄은 개인적인 일정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고 변명했지만, 남몰래 적랑의 기사들과 트리스탄의 특별 훈련을 감행하고 있었다.

‘에녹만 쏙 빼놓고, 얄미운 자식들!’

에녹이 하차니아의 공자이긴 하지만, 써머나이츠라 적랑에 입단할 가능성이 높다며 친한 척을 할 때는 언제고.

딸기 주스를 쪼록 삼킨 나는 입을 삐죽 내밀며 바리스탄의 호령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기사들을 흘깃했다.

“자, 이번 검술 대회에 참가할 의사가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도록!”

바리스탄이 크게 외치자 서너 명의 기사들이 단상 위에 오른다. 나는 대열 뒤에 숨었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 에녹의 밝은 금발을 찾아 목을 앞으로 뺐다.

“트리스탄, 그레이, 그리고 조슈아. 이번 대회는 이렇게 세 명만 참가 의사가 있는 건가?”

검술 대회는 가문, 만약 기사단 출신이라면 기사단의 이름을 내걸고 참가하기 때문에 나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나가게 할 수는 없었다.

‘바리스탄은 물론 트리스탄을 내보내고 싶어서 부릉부릉하고 있겠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바리스탄은 트리스탄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을 내걸었다.

“자, 그럼 앞으로 나온 세 명은 검을 잡도록! 가장 강력한 오러를 지닌 사람이 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공정히 판단하겠다!”

나는 바리스탄의 어리석은 말에 혀를 끌끌 찼다.

‘오러면 다 되는 줄 아는 건가. 무식하기는.’

소울나이츠에게 오러가 중요하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었지만, 소울나이츠의 능력을 판별하는 데 오러의 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트리스탄 외전을 조금만 읽으면 알 수 있는데, 바보.’

이름 없는 기사가 트리스탄에게 흘리듯 말한 것을 떠올린 나는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는 에녹의 정수리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에노끄가 안 보여, 눈누.”

“에녹 도련님이요? 아! 제가 아까 후원에 가시는 걸 봤어요.”

“……후원? 훈룐은 연무쟝에서 하눈데!”

“그러게요. 그래서 저도 의아했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는 랄라의 말에 기함하며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이놈 자식……! 설마 도망간 거야?!’

아침까지도 검술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포부를 보이며 의기양양했던 에녹이었다.

“에노끄……!!!”

백작저 뒤편에 위치한 후원에 빠르게 당도한 나는 수풀 너머 삐죽 튀어나온 금발을 발견하고 빽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지금 모해, 이 멍충이!!!”

제 뒷덜미를 확 붙잡은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에녹이 허둥지둥 팔을 내저으며 울상을 짓는다.

“나, 아무리 생각해도 대회 참가 못 하겠어.”

“이졔 와소 왜!!!”

“이번 검술 대회는 단순히 대련만 있는 게 아니래, 레오노라.”

“그게 무슨 마리야?”

나는 울적하게 가라앉은 에녹의 얼굴에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내 매서운 눈살을 온몸으로 받은 셋째가 우물쭈물 말을 잇는다.

“……폐하께서 기사들의 적응력을 보기 위해 본선부터는 계곡이나 함선 위에서 대련을 시키겠다고 하셨대.”

“그게 모 어때소?!”

“나, 물 공포증이 있어.”

“!”

나는 에녹의 주눅 든 목소리에 그제야 셋째가 원작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얘, 물 공포증이 너무 심해서 여주가 컵에 든 찻물만 뿌려도 퇴치 가능한 하찮은 악당이었지.’

“띠바.”

아니 뭔 놈의 악당이 찻물로 퇴치가 되고 난리야~!

“응? 리니, 지금 뭐라고 했어?”

“아냐.”

잊고 있던 에녹의 약점에 나는 무척 당황했지만, 일단 잔뜩 주눅 든 셋째를 설득하는 게 먼저였다.

“에노끄, 사실 나는 에노끄가 물 공포증을 이길 쑤 있는 방법을 알구 이쩌.”

내가 진지하게 입매를 굳히고 하는 말에 에녹의 어두웠던 안색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정말?!”

“웅. 그로니까 걱정하지 말구, 검술 대회에 참가하도로 캐.”

물론 개뻥이었다.

“나만 미더, 에노끄.”

속으로 긴가민가하면서도 호언장담하는 내 당당한 태도에 에녹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난 레오노라를 믿으니까.”

나와 훈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오러를 다루는 능력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승한 게 에녹의 신뢰를 얻는 데 톡톡한 노릇을 한 모양이었다.

나를 여동생이 아닌 스승이나 교관처럼 여기는 듯한 에녹의 태도가 따끔따끔 얼마 남지 않은 내 양심을 쑤셔 온다.

‘트리스탄의 외전이 없었다면 절대 누리지 못했을 성장이지만, 지금은 에녹을 달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결국 나는 에녹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연무장을 걸어 내려갈 수 있었다.

“에녹, 오늘은 적랑의 기사들과 합동 수업이 있다고 했는데 늦었구나.”

뒤늦게 등장한 에녹을 발견한 바리스탄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짧게 혀를 찬다.

“그런 게으른 태도로는 적랑에 입단할 수 없을 거다. 네가 아무리 하차니아 공작가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결국 네들 다 우리 에녹 시다바리하게 될 거거든?’

나는 바리스탄이 에녹을 탓하는 말에 혀를 빼죽 내밀며 셋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내가 바리스탄을 언짢아한다는 사실을 눈치챈 에녹이 서둘러 나를 등 뒤에 숨긴 채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동생과 할 말이 있었습니다.”

“흠, 그래. 어쨌든 검술 대회 참가자들은 오늘 내가 따로 교육을 진행할 생각이니 너는 부단장인 리벨로에게 수업을 받으면 된다.”

내가 에녹을 찾으러 간 사이에 이미 검술 대회 참가자들과 일반 기사들이 조를 나눈 모양이었다.

나는 트리스탄이 속한 네 명의 조를 눈으로 흘깃한 뒤 에녹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건 아니겠지?’

“스승님.”

조마조마했지만, 내가 뒤에 서 있기 때문인지 에녹이 바리스탄을 향해 단호하게 말문을 연다.

“저도 검술 대회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네가?”

단단한 각오가 어린 제자의 말에 스승으로서 감명을 받을 법도 하건만, 바리스탄은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일 뿐이었다.

“허, 에녹, 나는 네가 네 주제를 알 만큼은 머리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른 판단이었던 모양이로구나.”

‘저 자식이, 아빠나 실베스테르가 옆에 없다고 또 막말을……!’

“이제 겨우 여덟 살인 네가 검술 대회의 출전을 논하다니 어불성설이다.”

바리스탄의 비아냥에 내가 앞으로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트리스탄도 제 나이에 검술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에녹이 평소와 달리 단어 하나에 또박또박 힘을 주며 바리스탄의 말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검술 대회에 딱히 연령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되레 기사단에 입단한 기사들은 출전이 제한되고 있어 종기사들의 무대라고 판단했는데요.”

“트리스탄은 너와 경우가 다르질 않느냐.”

에녹의 합리적인 반박에도 바리스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는 에녹을 설득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지, 바리스탄은 동의를 구하는 듯 주변에 시립한 적랑의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고 해도 트리스탄처럼 오러소드 정도는 구현할 수 있어야 검술 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나는 네 안전을 걱정하는 거다. 괜히 오기로 검술 대회에 나섰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나는 공작 각하를 뵐 면목이 없으니까. 내 말이 틀렸나, 리벨로?”

“맞습니다, 공자님.”

바리스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적랑의 부단장인 리벨로 경이 앞으로 나선다.

“소공작님은 이미 아홉 살에 오러소드를 만들어 낸 천재이시니까요.”

나는 미리 준비라도 한 듯 매끄럽게 쏟아지는 리벨로의 말에 왼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누가 지네 공작가 소공작 아니라고 할까 봐, 엄청 찬양하네.’

오러소드란 실제 검 없이 오러만으로 검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하는데, 정교하게 오러를 조율하는 능력이 필요한지라 숙달된 소울나이츠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트리스탄처럼 자신과 같은 계열의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상태로 매일매일 단련하면 못 하는 게 더 이상한 거잖아?’

내가 자신의 말에 기분 나빠한다는 걸 느꼈는지, 리벨로가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덧붙인다.

“물론 트리스탄 소공작님께서 특별하신 거니까 에녹 공자님께서 주눅 드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 에녹.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서 리벨로에게…….”

리벨로와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바리스탄이 에녹을 타이르기 위해 입을 연 순간,

화르륵-

“!!!”

에녹은 검 손잡이에는 손도 대지 않고 불에 타는 듯 화려한 불의 검을 구현해 냈다.

“오러소드?!!”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는 기사들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우리 셋째가 이런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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