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33)화 (268/486)

제33화

“아악!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에구구. 니니는 먼지 안즌 줄 아랏네.”

후작의 회색 머리털을 쥐어뜯어 허공에 흩뿌린 나는 그의 머리색 탓에 헷갈렸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 니니는 애기라서 눈이 안 조아요.”

내 가벼운 사과에 점잖았던 후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그치만~ 후잔니 머리카락 먼지 색인골?!”

내가 입을 삐죽 내밀며 변명하자 로렐라인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래요. 아기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어요, 후작님.”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는 당장이라도 날 쥐어박고 싶은 듯 보였지만, 로렐라인의 앞이라 그런지 벌컥 화를 내지 못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 네, 뭐. 마나석 추출이나 시작하시죠.”

후작은 제 낡은 갈색 코트 안주머니에서 눈에 익은 마나 추출기를 꺼내 들었다.

트리스탄에게서 오러를 뽑아내던 것과 비슷한 황동색 기구가 로렐라인의 손목에 닿기 직전, 나는 기다렸다는 듯 빼액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앙!!!”

“공녀님, 왜 그러세요?”

당황한 로렐라인이 화들짝 놀라 후작을 제치고 나를 안아 든다. 나는 그녀의 목을 꼭 껴안은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후잔니 엉니항테 이상한 짓 하려구 해~!”

“에고, 에고. 이상한 짓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이 꽤나 당황스러웠는지, 로렐라인은 급격히 아기 같아진 내 말투를 눈치채지 못하고 내 등을 다독였다.

나는 그녀와 후작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뒷발로 추출기를 뻥 차 버렸다.

쨍그랑!

마나를 응축하는 부분이 유리로 되어 있던 추출기는 테이블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헉! 3천 골드짜리 추출기가!”

기겁한 후작이 나를 밀치고 추출기를 집어 들었지만, 이미 망가진 추출기의 조각에 손이나 찔릴 뿐이었다.

“쿠쿡.”

로렐라인의 품에서 빼꼼 고개만 돌린 나는 망연자실한 후작의 얼굴을 바라보며 샐쭉 입꼬리를 올렸다.

“지, 지금 일부러-!”

“후에엥~!”

나는 후작이 내 의도를 캐묻기가 무섭게 목이 터져나가라 울어댔다.

아기 목소리는 방긋 웃으며 얌전하게 잼잼놀이나 할 때 듣기 좋은 법이다.

카랑카랑한 내 울음소리가 아르델 백작저의 아담한 정원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자 어른들이 황급하게 달려 나왔다.

“왜 우는 거지.”

가장 먼저 달려온 루카스가 로렐라인의 품에서 나를 달랑 안아 든다.

“누가 울렸어?”

그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에녹이 내 왼쪽 팔목을 붙잡으며 다정하게 속삭였고,

“브리넨 후작인가? 감히 널 공격한 이가.”

왜인지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트리스탄이 날카롭게 눈매를 치켜세웠다.

‘이렇게 주목을 받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당장 로렐라인과 브리넨 후작을 물리적으로 떨어뜨릴 방법을 강구했을 뿐이라고.

사람들이 이렇게 우르르 몰려나올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내가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루카스는 나를 들지 않은 손을 움직여 후작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오랜만이군, 브리넨. 감히 내 딸까지 건드릴 정도로 간이 커졌을 줄 몰랐는데.”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저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셨을 텐데요.”

루카스는 후작의 떨떠름한 반응에 그제야 자신이 현재 ‘가스파르’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는 후작을 가볍게 땅에 떨구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내 딸아이를 건든 게 너무 화가 나서 그만.”

내가 납치당했다고 도박장을 부수고, 내가 울었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5대 귀족인 후작의 멱살을 거침없이 잡아 대고…….

‘누가 보면 엄청난 딸바보인 줄 알겠어.’

루카스는 성질은 더러웠지만 쉽게 흥분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브리넨 후작과는 과거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체를 들킬 수는 없지.’

나는 숨까지 씨근거리는 루카스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의 가슴을 도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로레 엉니랑 둘만 잇게 해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는 대강 상황을 정리한 다음 나를 로렐라인의 침실에 내려 주었다.

“엉니. 니니 할 말 이써요.”

“좋아요. 그럼 제 침실에서 얘기할까요?”

나는 로렐라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내민 손을 붙잡으며 뒤를 돌았다.

‘얘넨 도대체 언제까지 쫓아올 셈이지.’

“에노끄, 트리쯔딴.”

내가 둘을 번갈아 바라보자 소년들이 조금 얼이 빠진 얼굴로 느지막이 대답한다.

“응?”

“왜.”

“훈룐하러 안 가?”

“…….”

둘은 내 날카로운 물음에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특히 에녹 이 자식은 검술 대회가 코앞인데 연습은 안 하고 뭐하는 건지 모르겠네.’

트리스탄이야 뭐 원작 남주니까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지만, 에녹은 특훈 조금 쉬게 해 줬다고 군기가 다 빠진 건지 뭔지.

“에노끄.”

“으응?”

“오눌 저녁에 니니 좀 바.”

아주 혼이 빠져나가도록 빡세게 굴려야겠다.

내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에녹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진다.

“왜, 왜?”

“어짜피 오눌 할 일두 업자나.”

“있어!”

“거진말. 이따 바, 에노끄.”

“아니, 진짜 있는데-!”

트리스탄은 하차니아 셋째의 다급한 대답을 툭 잘라 먹듯 끼어들었다.

“난 없다.”

“머?”

“난 오늘 할 일 없다고.”

뭐 어쩌라고.

“웅. 알겟소요.”

바리스탄이 근신령에라도 처해져서 일정이 없어졌나?

나는 자신의 한가로움을 과시하는 트리스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다음 로렐라인의 침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자, 제게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나를 직접 제 침대에 앉혀 준 로렐라인은 예쁘고 상냥한 눈을 깜빡이며 인형처럼 의자에 앉았다.

“브리넨 후작님이 제 마나를 추출해 가는 걸 방해한 이유도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역시.

로렐라인 또한 평범한 아이는 아니었다.

‘물빛의 로렐라인.’

그녀가 황제의 인정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강력한 물의 술사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렐라인은 술사이자 현자였지.’

마나를 다루는 술사들은 사물의 진리를 꿰뚫고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진정한 힘을 얻게 된다.

‘그러니까 당연히 어릴 때부터 비상한 머리를 자랑했을 거야.’

지금부터는 말조심을 해야 했다.

나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침을 꼴깍 삼키며 느릿느릿 말문을 열었다.

“니니가 엉니 병 치료해 줄 수 이써.”

“……어떻게?”

“써머나쯔 오러 이욘하면 대.”

“써머나이츠의 오러, 말씀이신가요?”

나는 로렐라인의 의아한 목소리에 미리 에녹에게 받아 뒀던 오러석을 꺼내 들었다.

“쟈.”

로렐라인이 태양을 담은 것처럼 찬란한 붉은 보석을 손에 쥔 순간, 에녹의 불 속성 오러가 그녀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에녹 건강 해칠까봐 아주 조금만 추출해온 거긴 한데…….’

“으읏!”

로렐라인처럼 속성을 강하게 띠는 마나의 폭주는 마나 안정제 따위가 아니라 반대 속성의 기운으로 다스려야 했다.

나는 로렐라인이 혹시나 나를 의심해 오러석을 내팽개치지 않도록 그녀의 손을 꼭 붙들었지만, 다행히 그녀는 오러석을 거부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아.”

어느 정도 마나가 진정된 후, 로렐라인은 스스로 오러석을 내려놓았다.

‘똑똑한 아이니까 방금 제 몸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인지하겠지.’

“불 속성 오러로 제 마나를 다스릴 수 있는 거였군요.”

“웅.”

“거센 파동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되면, 당연히 제 병도 완화되겠죠.”

“웅!”

옳지, 잘한다.

나는 척하면 척, 치료 방법을 알아듣는 로렐라인이 기특해 활짝 웃었다.

“공녀님이 이런 방법을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비미리야.” (비밀이야.)

나는 자그마한 검지로 입술을 꾹 누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 긍데 말해 줄 수 업서요.”

“그럼 저도 공녀님을 믿을 수 없는데요. 방금 건 일시적인 효과일 수도 있잖아요.”

“거진말.”

나는 로렐라인의 말에 씨익 웃으며 확신했다.

“니니 미드먼서요.” (리니 믿으면서요.)

로렐라인처럼 똑똑한 아이가 나를 믿지 않으면서 에녹의 오러가 제 몸에 흡수되도록 방치했을 리 없었다.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으려는 발악이었겠지만.’

“왜 저를 도와주는 거죠? 공녀님께서 제게 바라시는 게 뭐길래요.”

나는 아주 약간 발그스레 달아오른 로렐라인의 뺨을 작은 손으로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바라는 거 업서. 구냥 도와줫서.”

“왜요?”

“애기는 아푼 고 아냐. 아프면 앙대.”

내 말에 로렐라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대가를 바라고 제 치료에 나서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지만, 실제로 도움을 준 사람도,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것도 공녀님이 처음이세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는 물빛 눈에 나는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렐라인한테는 바라는 게 없어서 솔직하게 대답한 건데.’

내가 바라는 건 로렐라인 아빠에게 있었다.

그러니까, 돈.

‘여덟 살짜리 백작 영애에게 무슨 돈이 있겠어?’

‘어차피 치료 방법을 알아 온 사람에게 후한 포상금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으니 알아서 주겠지.’

움후후.

나는 로렐라인의 침실 이곳저곳을 장식한 순금 조각들을 훑어보며 남몰래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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