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31)화 (266/486)

제31화

“지지.”

“…….”

“지지다, 지지.”

진짜 가스파르도 아닌 주제에 그림자를 일으켜 도박장을 싹 쓸어버린 루카스는 삐죽 튀어나온 내 콧물을 제 소매 끝으로 닦아 냈다.

“어케 와쩌?”

나는 느닷없이 등장한 루카스를 빤히 올려다보며 의아한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한 달에 한 번 몸을 빼앗기는 게 아니었나?’

요즘 나는 그보다는 루카스를 자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 말에 루카스는 대답 없이 손가락을 들어 하늘에 자리 잡은 희미한 초승달을 가리켰다.

‘벌써 초승달이 뜨는 날이었네.’

에녹 훈련에 매진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던 모양이다. 지붕이 날아간 탓에 하늘이 코에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져서 나는 괜히 콧잔등을 움찔했다.

‘일단, 남들 눈에는 가스파르가 온 것처럼 보일 테니까.’

나는 뺨을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새하얗게 질린 지배인을 돌아보았다.

“인누 와.”

“예?”

“압빠한테 일르라매? 너 인누 오라고.”

넌 이제 죽었다.

따위의 메시지가 담아 지배인을 향해 눈을 부라리자, 그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나와 루카스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각하, 모종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흐음.”

내 어투에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루카스는 지배인의 말을 무시한 채 오른팔을 들었다.

근육으로 단련된 그의 단단한 팔을 휘감은 그림자가 작은 소용돌이처럼 날카롭게 움직인다.

“고, 공녀님께서 길을 잃으신 것 같기에 머무시는 숙소로 안내를 해 드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루카스의 손에서 튀어나간 그림자가 뱀처럼 아가리를 벌리며 지배인의 목을 노릴 참이었다.

당황한 지배인은 셀리아를 제 앞에 내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가 부리는 하녀를 시켜서 말이죠!”

불과 몇 분 전 만해도 셀리아를 바리스탄에게 팔아 버리려고 했었으면서. 나는 순식간에 하녀로 둔갑한 셀리아의 신분에 눈썹을 꼼톨 움직였다.

“쩌 사라미 부뻡 노애 파라떠!” (저 사람이 불법 노예 팔았어!)

내 작달막한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자, 지배인은 헐레벌떡 손까지 내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설마 어린 공녀님의 말만 믿고 저를 처벌할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각하? 맹세코 저는 인신매매 따위는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치 혀가 길었지만 지배인의 말은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아르델. 각하의 영지가 아닌데 섣불리 나서셨다가는 영지간의 분쟁으로 번질 수 있는 문제고요.”

‘만약 상대가 가스파르였다면 재고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지.’

“뭐 어쩌라고.”

하지만 루카스는 지배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인간이었다.

“전쟁 하든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은 그가 다시금 오른손을 들어 올린다.

“허억!”

“쟘깐!”

지배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꼴은 분명 볼만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영지간의 분쟁으로 번지는 건 조금 문제가 있었다.

‘나는 아르델 백작에게 돈을 뜯어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지배인은 아르델 소속의 사람이었으니 루카스가 함부로 처벌하는 건 곤란했다.

‘증거가 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 순간, 시야 끝에 타오르는 불처럼 강렬한 적발이 들어섰다.

데구르르.

나는 내 발치에 툭 굴러들어온 동그란 마도구를 집어 들었다. 내가 아까 지배인과 바리스탄의 대화를 녹화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마도구였다.

“…소공작님. 가신 줄 알았는데요.”

다시 돌아온 트리스탄은 마도구를 품에 안은 나를 달랑 들어 올렸다.

“생각해 보니 이상해서 말이지.”

“웅?”

“분명 뭐가 날 콱 깨문 것 같았거든.”

설마 내가 자신을 깨물었다고 복수라도 하려고 온 걸까.

“니니 기여우니까 때지 마.”

사실 너 나 좋아하잖아~!

트리스탄은 그가 주먹이라도 들어 올릴까 손가락을 옴질거리는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각하, 증거가 있으니 직접 처벌을 강행해도 별 문제가 없으실 겁니다.”

“좋군.”

“아아악!”

루카스는 그대로 지배인을 작살내 버렸다.

* * *

불법 노예 상점은 폐점, 아르델에서 가장 커다란 도박장이었던 ‘골드러쉬’는 대공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꼴이 되어버렸다.

‘아르델 백작에게는 내가 잘 설명해야지.’

나는 이제 곧 그의 은인이 될 예정이었으니까, 이 정도 사고는 괜찮지 않을까.

나는 콧잔등을 움찔하며 골조만 남은 건물 근처에 서성이는 셀리아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아반니. 쎌랴두 데꾸가.”

내 말에 차그락차그락 움직이는 발찌만 매만지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다.

“저, 저요?”

“쎌랴, 나랑 구훌언 갈꼬야.” (셀리아, 나랑 구휼원 갈 거야.)

생각해 보니 나도 그곳에 볼일이 있거든.

나는 ‘구휼원’에 묻혀 있는 황금맥을 떠올리며 움후후,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내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셀리아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벙긋한다.

“서, 설마 제 아기를 찾는 일을 도와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아가씨?”

“우웅.”

셀리아의 아기를 찾는 겸, 내가 원하는 ‘세계 최강의 병기’도 브리넨 구휼원에 잠들어 있었으니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무언가 오해를 한 것만 같은 셀리아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분이…! 제국민은 하나같이 인간 말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아가씨-!”

셀리아는 봇물처럼 터진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를 끌어안았다.

‘음. 큰 오해를 산 것 같지만 일단 내게 나쁜 방향은 아닌 것 같으니까 내버려 둘까.’

아이처럼 우는 셀리아의 등을 토닥이는데, 나를 달랑 들어 올린 루카스가 뚱한 얼굴로 셀리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본다.

“이 여자를 데려가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눈누난나처럼 니니가 데꾸 다닐래.”

“네, 각하! 저 정말 아가씨를 열심히 보필할 자신이 있어요. 비록 지금은 노예 신분이지만 엘렌 제국에서는 집시라는 마땅한 직업도 있었고, 제국어뿐만 아니라 외국어도 두 개는 구사할 수 있습니다.”

‘집시가 직업이었나?’

나는 그녀의 설명에 둥근 눈을 크게 뜨며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아반니. 허락해 조.”

‘설마 노예 따위를 데려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겠지.’

혈족주의, 황실의 피나 대마법사인 자신의 핏줄이 무척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루카스는 노예 출신인 셀리아를 비천하게 여길 가능성이 있었다.

‘이럴 때는 인정 많은 가스파르가 튀어나오는 게 나을 텐데.’

루카스의 냉정한 얼굴이 불허를 내릴 것이라 생각했는지, 셀리아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비천한 제가 아가씨를 모시기엔 부족하다 느끼시겠죠. 아가씨는 워낙 마음씨도 곱고 귀엽고 아름답고 상냥한 분이시니까요. 따뜻한 마나를 지니신 고귀한 분이세요. 그러니 제가 모시게만 해 주신다면-”

“내 딸의 마나에서 그런 게 느껴지던가?”

“네. 저는 잘 모르지만, 아마 술자의 피가 흐르는 분이신 거죠? 제가 아가씨의 존재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던 것도 그 따뜻한 마나의 기운 때문이었어요. 사람 마음속에 몽글몽글 자리 잡는 무척 아름답고 존귀한 마나의 기운이었거든요.”

“……그건 그렇지.”

셀리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루카스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제 턱을 쓰다듬는다.

“내 딸이 좀 상냥하고 귀엽긴 하지.”

나는 루카스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저래…?’

설마 제 마나-내 몸에 잠든 마나는 루카스의 것이었으니까- 칭찬 좀 해 줬다고 저러는 건가.

“그게 날 닮아서 그런 거였나.”

“그럼요~! 저는 각하를 처음 뵌 순간, 아가씨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이 어디서 왔는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는걸요.”

지배인과 붙어 다녔기 때문인지 셀리아의 말솜씨는 청산유수였다.

“좋다. 뭐, 공녀에게 하녀 한 명 더 붙이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지.”

루카스는 건조한 입매를 답지 않게 씰룩이더니 셀리아의 동행을 허락해 주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아효. 힘드러.”

일단락이 된 건가 싶어 안심한 나는 다시금 달랑 안아 올려져 땅바닥과 멀어져야만 했다. 나는 나를 안아 든 채 멀뚱멀뚱, 고양이처럼 새초롬한 금안을 굴리는 트리스탄을 마주 보았다.

“애요?” (왜요?)

“왜 나를 도와준 거지.”

트리스탄의 얼굴에는 적개심이 가득했지만, 나는 그의 표정을 믿지 않고 뒤를 돌아 몰래 외전을 펼쳐 들었다.

‘몰래 보기 좋게 손바닥만하게 축소했지롱.’

“나는 솔로아의 직계이고 너는 하차니아의 사람이니 나를 도와줄 이유가 없을 텐데.”


‘원래 귀엽고 깜찍한 아기들은 마음씨까지 천사 같은 건가. 나같이 쓸모없고 버러지 같은 애까지 도와주다니.’

트리스탄은 하차니아의 막내 공녀가 제게 베풀어 준 친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린 아기에 불과한 그녀가 어떻게 마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지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헉. 얘가 의심을 시작하네.’

나는 트리스탄의 속마음을 읽고 화들짝 놀라 소년의 멱살을 답삭 붙들었다.

‘정신을 얼른 빼놔야해!’

“그고야 니니가 트리쯔딴 조아하니까요.”

“……뭐?”

“니니, 트리쯔딴 조하.”

쪽.

나는 트리스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지붕만 날아갔던 도박장은 삽시간에 건물 전체가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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