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오러?!”
“방금 공녀님께서 불 속성의 오러를 사용하신 겁니까?”
“세상에, 이토록 어린 나이에 오러를 다루다니! 소공작님과 비슷한 수준의 천재인 게 틀림없습니다!”
놀란 원로들의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오고,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하차니아 공작가의 직계가 아르델의 원로를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자신의 부상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 화가 난 듯, 울컥한 아르델 원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허어. 아이 장난에 왜 그리 열을 내십니까.”
그런 아르델 원로가 한심하다는 듯 하차니아의 가신들이 하나둘 앞으로 나서며 혀를 끌끌 찬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넓은 아량을 보이셔야죠.”
‘내가 사생아일까 봐 눈치를 줄 때는 언제고, 다른 가문 사람들 앞에서는 내 편을 드는구먼.’
하차니아는 참지 않는다는 새로운 신조-나는 요즘 하차니아의 새로운 가훈을 고르는 중이었다-를 읊조린 후, 나는 손바닥을 탁탁 털며 뒤로 넘어간 아르델의 원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쟈. 니니 구냥 원로 아저씨랑 친해지구 시퍼서 장난친 곤데.”
“……허, 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내가 응축한 오러의 구(球)를 이마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 이마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를 부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쓰면 니니가 미안~”
“지금 그걸 사과라고 하시는 겁니까!”
내가 애써 내뱉은 사과에도 아르델의 원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 듯싶었지만, 하차니아의 가신들이 헐레벌떡 나를 감싸며 앞으로 나섰다.
“제 눈에는 충분히 진심 어린 사과였습니다.”
“맞습니다. 어린아이 상대로 진정하시지요, 로덴 남작!”
더 난리를 피웠다간 일이 커지리라 생각한 건지, 아르델 쪽에서도 사람이 튀어나와 내게 눈을 부라리는 원로를 뜯어말렸다.
그 순간,
“무슨 소란들이지.”
때마침 등장한 아빠의 목소리에 어수선했던 회의장에 적막이 가라앉는다.
내게 바짝 다가온 룰루의 품에 냉큼 안긴 나는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굳은 아빠의 얼굴과 경악 섞인 원로들의 표정을 살폈다.
‘마나를 응축해 오러처럼 보이게 하는 건 사실 꼼수에 가까운 건데, 눈치챈 사람이 나오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내가 소울나이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낸 사람은 없어 보였다.
“……각하, 공녀님이 써머나이츠의 자질을 보이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쥐 죽은 듯 가라앉았던 회의장의 적막을 깬 건 하차니아의 수석 행정관이자 아빠의 부관인 헨리였다.
진지한 열의가 어린 그의 눈을 마주한 아빠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연다.
“그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원로들에게 미리 언급해 주시지 않으신 겁니까?”
헨리의 앞으로 튀어나온 하차니아의 원로회 수장 가르덴이 잔뜩 흥분해 목소리를 높인다.
“이렇게 소란 떨 일인 줄 몰랐군.”
그러나 아빠는 차분하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소란을 떠는 원로들이 한심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레오노라도 하차니아의 직계인데 언젠가 각성하리라 예상하지 못한 건가.”
“……하지만 아가씨는 사생아,”
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태도에 하차니아의 원로들 중 한 명이 섣불리 입을 열었지만,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금 누구 앞이라고 말을 함부로 놀리시는 겁니까!”
아빠나 내가 불쾌감을 표현하기도 전에 튀어나간 헨리가 다짜고짜 원로를 향해 눈을 부라렸으니까.
“다들 속성 마법을 잃어 가는 이 시대에, 아가씨의 재능은 크나큰 희망입니다!”
‘그치. 다른 가문들은 속성 마법을 잃어 가고 있긴 할 거야.’
5대 가문의 직계라고해서 늘 소울나이츠의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마도왕국 아크레아와 견줄 만큼 마법사나 마검사가 넘쳤던 윌레닌 제국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소울나이츠의 명맥이 점점 쇠락하고 있었으니까.
“그, 그렇긴 하죠. 다른 5대 귀족 가문과는 달리, 하차니아의 직계들 중에서는 꾸준히 소울나이츠가 나오는 편이니.”
“그럼 신탁의 사생아는 레오노라 아가씨가 아니었던 겁니까?”
“어허. 그건 이따 회의 끝나고 얘기해 봅세.”
신탁에 대한 궁금증이 수면 위로 떠오른 듯싶었지만, 원로들은 헨리의 눈치를 보며 허둥지둥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아가씨가 에녹 도련님과 마찬가지로 써머나이츠의 자질을 가지신 것 같아서 놀랐을 뿐입니다, 각하.”
자카리나 실베스테르, 그리고 에녹에 이어 나까지 소울나이츠-아니지만-라는 사실은 하차니아 쪽에서도 놀랄 만한 일이었지만, 원로들은 다른 가문을 신경 쓰는지 애써 침착한 태도를 고수했다.
“흥. 그럼 딱히 주목할 필요도 없었겠군요.”
“맞습니다. 저희 아르델의 도련님께서도 플라워나이츠이시죠. 아마 오러 각성은 지금의 공녀님보다도 어린 나이에 하셨을 겁니다.”
그러자 냉큼 내게 오러구를 얻어맞은 원로가 입술을 삐죽이며 사족을 붙인다.
‘거짓말.’
저 남자가 말하는 ‘아르델의 도련님’은 이번 대 아르델의 유일한 소울나이츠였는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원작에는 이름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한미한 엑스트라였다.
‘그나마 이름이라도 언급되는 나보다도 더 하찮다고 볼 수 있지.’
엑스트라가 서브남주인 자카리나 남자 주인공인 트리스탄만큼이나 일찍 오러 각성을 했을 리 없으므로 아르델 원로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는 하차니아에게 지고 싶지 않아 발악하는 듯 보이는 아르델 원로를 올려다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흐음. 이쯤에서 좀 더 기를 눌러 줘 볼까.’
“그치마안, 니니는 이런 것두 할 줄 아눈데.”
“허억!”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만들어낸 또 다른 오러의 구를 확인한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진다.
“저, 저건 얼음 속성의 오러가 아닙니까?”
“세상에, 설마 우리 아가씨께서 백만 년에 한 번 태어난다는 전설의 그 ‘소울마스터’이신 걸까요?!”
설레발을 치며 놀라는 원로들의 반응은 내가 기대한 것 그대로였다.
‘얼음 속성과 불 속성의 오러를 동시에 다루는 것처럼 보이면, 전설 속의 소울마스터로 여길 줄 알았지.’
지금 시대의 소울나이츠들은 정해진 속성의 오러 밖에 다루지 못하지만, 지금은 멸망한 망국인 마도왕국 아크레아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눈이 부신 마검사의 활약을 자랑했던 몇 백 년 전에는 모든 속성의 오러를 다루는 소울나이츠들도 존재했었으니까.
“이건 당장 신전에 알려야 할 만큼 큰일입니다!”
“네, 네! 당연하죠! 아가씨의 존재만으로 하차니아의 입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네스 황후가 하차니아의 공작 부인인 노엘의 함선에서 사망한 이후, 하차니아 가문의 위치가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던 원로들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토록 어린 나이에 오러를 이 정도로 자유자재로 다루는 분은 저도 처음 보는군요.”
마탑 출신의 학자 한 명이 안경을 으쓱 올리며 말을 덧붙이자, 하차니아의 원로들은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내밀었다.
“역시 우리 아가씨, 저는 아가씨가 특별한 아기님이라는 걸 진작에 알아봤습니다.”
“글쎄요. 아직 어려서 오러의 속성이 정해지지 않았을 뿐인 것 같은데요. 다들 너무 흥분,”
원로들의 호들갑에 불퉁한 아르델 측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지만,
“남의 가문 일에 과한 관심은 삼가주십시오, 메리카 자작.”
흥분한 원로들과 달리 차분한 태도로 상황을 관조하던 헨리가 그의 말을 잘라 버린다.
“만약 우리 아가씨가 전설의 소울마스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천재인 것은 분명하니까요.”
헨리는 내가 소울나이츠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엿본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누가 우리 아빠 오른팔 아니랄까 봐.’
나는 내 잔꾀를 그가 꿰뚫어 보기라도 했을까 봐 헨리의 눈을 피하며 룰루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이고, 아가씨, 피곤하세요?”
“우웅.”
나는 룰루의 품속에 꼬물꼬물 파고들어 자리를 잡았다. 이건 헨리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기 위함이긴 했지만, 마나를 응축해 오러구처럼 보이는 현상을 만들어 내는 건 꽤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졸음이 밀려들고 있기는 했다.
“아가씨, 혹시 방금 보여 주셨던 오러를 한 번만 더 보여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물 속성 오러는 다루실 수 없는 겁니까?”
룰루가 내 대답에 허둥지둥 담요를 몸에 둘러 줬지만, 흥분한 원로들은 내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내게 득달같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사람들 중에 누가 정말 하차니아를 위해 일해 줄 사람인지 솎아 내야 할 텐데.’
원로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하차니아의 부흥을 바라고 있을 터였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가문을 이용만 할 속셈인 원로를 쳐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부담스럽고 귀찮아.’
하차니아의 공녀로 아르델의 기를 납죽 눌러 줬으니 오늘 내 할 일은 이만하면 된 것이 아닐까.
“이잉, 니니 졸려.”
내가 부러 동그랗게 주먹을 쥔 채 눈을 비비자, 내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가르덴 수장이 내 손목을 붙잡으려는 듯 손을 뻗는다.
“아가씨, 그러지 마시고 한 번만 더……!”
“그만.”
그러나 그의 손은 내 자그마한 손에 닿지도 못했다. 내가 보인 재주에 원로들만큼이나 당황했을 아빠가 짐짓 굳은 얼굴로 그를 밀어냈으니까.
“내 딸이 졸려 하질 않나.”
“각하, 지금 아가씨가 졸린 것이 대수인 줄 아시는 겁니까?! 이건 가문의 흥망성쇠가 달린 일입니다!”
수장 가르덴이 노호를 터뜨리듯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가주에게 저토록 무례한 가신이 다 있나 싶어 기가 막혔다.
‘하지만 아빠는 그냥 넘어가겠지.’
가스파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신들의 무례한 태도나 언행을 한 순간의 실수로 넘어가줄 아량이 있는.
“머리를 날려 줘야 제 위치를 깨달을 셈인가. 어디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
“커억-!”
순간, 꽥꽥 우는 가르덴 백작의 목을 새까만 그림자가 튀어나와 조르기 시작했다.
음.
우리 아빠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