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누가 감히 우리 셋째보고 한심하다고 해!’
방금까지 에녹이 바보 같다고 생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면서, 나는 에녹을 비웃는 듯한 목소리에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트리스탄.”
나보다 그림자를 먼저 발견한 에녹이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름에 나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으아. 눈부셔.’
태양빛 아래 반짝이는 적발이 눈에 해로운 수준으로 발광한다.
이죽이는 목소리의 주인은 트리스탄이었다. 원작 남주 버프라도 받는 건지, 그의 등장에 맞게 휘날리는 바람결에 그의 붉은 머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겨우 새끼 그리즐리 따위에 그렇게 겁을 집어먹은 건가, 에녹 하차니아.”
나는 트리스탄의 부연 설명과 부쩍 잘 어울리는 하차니아의 이름에 입술을 짓씹었다.
‘으으, 분해.’
내가 시한부 운명을 탈피하고 하차니아 공작가를 폭군의 손아귀에서 지켜 내기만 하면, 이름부터 바꾸고 말 것이다.
분해서 숨을 씨근거리는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트리스탄은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그리즐리를 향해 입을 벌렸다.
“꺼져.”
오러를 실은 언령이었다.
‘극히 섬세하게 오러를 조종할 수 있는 소울나이츠들만 쓸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는데.’
남주인 트리스탄이 사용하지 못하는 소울나이츠의 스킬이 이 세계관에 존재할 리 없었지만, 이제 겨우 열 살이 넘었을 뿐인 소년이 발휘하기엔 너무 과한 능력이었다.
“꾸우?”
‘역시, 아직은 아기 그리즐리에게도 통하지 않을 만큼 낮은 단계의 언령만 사용할 수 있는 모양이지.’
트리스탄이 낮게 읊조리는 명령에도 그리즐리가 나를 먼저 돌아본다.
‘도망가도 돼.’
나는 에녹과 트리스탄 몰래 고개를 까딱이며 그리즐리의 퇴장을 서둘렀다.
“대단해. 넌 벌써 오러를 목소리에 담아 마물을 움직일 수 있게 된 거구나!”
트리스탄의 능력에 감탄이라도 한 듯 에녹이 탄식한다.
“네가 나타나 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리니와 나 둘 다 말이야.”
나는 에녹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그리즐리는 나를 공격할 생각도 없었는데!’
그리즐리는 트리스탄의 언령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내 퇴각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부러 그리즐리를 훈련시켰다고 에녹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선망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에녹의 눈을 흘깃하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리니, 도움을 받았으면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에녹의 재촉에도 내가 입을 열지 않자, 트리스탄이 결 좋은 적발을 위로 쓸어 올리며 한숨처럼 웃는다.
“……뭐, 딱히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나를 흘깃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내쫓은 건데 웃긴 자식이네.’
하지만 그가 내 반응을 무척 바라는 것 같아서 나는 별수 없이 두 손을 바짝 모으며 눈을 빛냈다.
‘에녹을 자극할 필요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머시쩌! 트리쯔딴 왕 머시쩌요!”
“별거 아니다.”
“아냐. 엄쩡 머싯어쩌요!”
감사 인사를 하라고 나를 재촉한 건 에녹이었으면서, 정작 에녹은 내가 트리스탄을 멋있다고 칭찬하자 씁쓸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나도 리니를 지켜 주고 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나는 에녹이 조금 기특하게 느껴졌다.
‘우리 에녹이 오러가 조금 부족해서 그렇지, 다정한 마음씨 하나만큼은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애라고.’
에녹의 동그란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리즐리가 나타나 우왕좌왕하던 때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바리스탄이 뒤늦게 등장했다.
“에녹! 트리스탄! 괜찮은 거냐? 그리즐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네, 경. 제가 잘 처리했습니다.”
트리스탄의 대답에 바리스탄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에녹과 두 손을 바짝 모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흠. 더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 트리스탄이 에녹과 아기 공녀님을 위기에서 구한 모양이군요.”
당연히 트리스탄이 그리즐리를 물리쳤을 거라고 판단하는 바리스탄이 무척 얄미웠지만, 나는 그의 물음에 별수 없이 작게 고개를 까딱였다.
“……녜.”
“트리스탄이 언령을 사용해 그리즐리를 조종했어요.”
에녹이 짧게 덧붙이는 말에 바리스탄이 감격스러운 얼굴을 하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트리스탄! 벌써 언령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면서 왜 말을 하지 않았느냐!”
“검술 훈련에는 딱히 필요한 능력이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녀석, 겸손하기는. 언령을 사용할 줄 모르는 에녹을 배려한 것이로구나.”
‘저번부터 느낀 거지만 너무 트리스탄 칭찬만 하는 거 아닌가, 저 아저씨?’
타이밍 좋게 등장하긴 했지만, 두려움을 이겨 내고 나를 구하려고 뛰어든 건 트리스탄이 아니라 에녹이었는데.
‘아무래도 저 아저씨가 우리 셋째 자존감 도둑인 것 같은데.’
바리스탄은 트리스탄을 너무 대놓고 편애하는 경향이 있었다.
“흠. 일단 오늘 수업을 시작해 보도록 하죠. 따라오시렵니까, 아기 공녀님?”
“녜.”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바리스탄의 물음에 냉큼 대답한 다음 에녹의 품에 안겨 들었다.
“에노끄.”
“응?”
“고마오.”
제 품 안에서 꼼지락꼼지락 손가락을 움직이는 나를 흘깃한 에녹이 의아한 듯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에노끄, 에노끄도 무셔운데 니니 구하러 달려와써.”
그리고 그건 트리스탄이 어린 나이에 발휘할 수 있는 언령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리니, 그건 너무 당연한 거야. 난 너의 오빠잖아.”
내 말에 에녹은 아주 오랜만에 저가 어른인 양 코를 쓱 만지며 입을 열었다.
“가족이니까. 내가 널 지켜 줘야지.”
포슬포슬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에녹이 덧붙이는 말에 나는 반박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만 작게 되뇌었다.
나는 그런 다정한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안다고.
* * *
나는 룰루가 준비해 준 높은 의자에 앉아 한쪽 볼에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채 에녹과 트리스탄의 검술 훈련을 지켜보았다.
“어허, 에녹! 위험하니 너는 오러를 밀집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하지만 저도 할 수 있는데요, 스승님.”
한손으로 목검을 든 에녹이 바리스탄의 말에 불만스럽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찡그린다.
‘그래! 우리 셋째도 할 수 있겠구먼, 뭘!’
애초에 검을 감싸기 위해 오러를 밀집시키는 건 요령의 문제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 원작에 그런 설명이 나왔었는데, 어느 부분이었지?’
나는 아직은 백지에 가까운 ‘책’을 떠올리며 자그마한 턱을 짚었다.
‘트리스탄이 남주답게 기연을 만나 검술을 닦아 나가는 장면에서 읽었던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 트리스탄의 ‘검술 스승’은 바리스탄이 아니었다.
‘훨씬 더 뛰어난 써머나이츠가 트리스탄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교육을 시켰었지.’
그 스승을 에녹에게로 빼올 수만 있다면 암만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셋째가 트리스탄을 따라잡는 게 더 수월해지지 않을까.
“트리스탄이 오러를 이용해 촘촘한 검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해서 너도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했지 않냐, 에녹! 넌 트리스탄과 다르다고.”
나는 혀를 끌끌 차며 에녹을 탓하는 바리스탄의 말에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자존감을 깎아 대는 말을 들으면서 검을 배우면 천재도 둔재로 둔갑하겠어.’
“트리스탄은 써머나이츠, 아니, 소울나이츠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난 아이다. 반면 너는 그럭저럭 재능은 있지만 어찌 됐든 크게 될 그릇이 아니야.”
“…….”
“지금 네 능력에 맞는 커리큘럼을 짜 놓았으니 내가 시키는 것 외에는 연습하지 말아라. 다 네 안전을 생각해 하는 말이니.”
“……네, 스승님.”
바리스탄의 혹독한 말에 에녹이 기가 죽어 어깨를 수그린다.
‘사사건건 에녹을 물고 늘어지네, 저 인간이?’
나는 경에서 아저씨, 그리고 인간으로까지 호칭이 전락한 바리스탄을 노려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무 이상할 정도로 에녹을 무시한단 말이야.’
아무리 하차니아 공작가가 이네스 황후의 죽음 이후 가세가 기울고 있다지만, 한낱 기사단장인 그가 공작가의 자제를 이정도로 후려치다니.
‘그래, 이건 이상한 걸 떠나서 수상한 수준이야.’
“흐응…….”
나는 손가락을 맞부딪히며 훈련하는 트리스탄, 그리고 에녹이 더는 검술을 연습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바리스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우리 에녹, 내 생각보다 더 재능이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