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6)화 (251/486)

제16화

  

  

  

별궁에 유폐된 아이네스의 상황에는 별다른 진척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늘에서 책이 뚝 떨어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새로운 문장은 추가되지 않았다.

‘…그냥 자라기만 하고 있는 건가?’

아이네스가 움직여야 원작에 대한 정보가 생성이 되든 말든 할 텐데, 아직 아기라 힘을 모아야 한다는 음산한 생각을 할 뿐 구체적인 움직임은 묘사되지 않았다.

‘흑막 같은 계획도 지금은 세우고 있지 않는 것 같고.’

내 마나통이 필요한 이유도 직접적으로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히잉.”

아무리 노려봐도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검은 글씨에 시무룩해진 나는 별수 없이 원작을 덮는 대신 역사서를 펼쳐 들었다.

‘원작에 대략적인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아직 본격적인 원작의 스토리는 시작도 하지 않은데다, 내 기억만 믿고 미래를 설계할 수는 없으니까.

“히잉, 일기 시져….” (힝, 읽기 싫어.)

하지만 룰루가 가져다준 역사서는 크기는 내 몸과 비슷한 주제에 새까만 글씨가 빽빽한, 펼치자마자 졸음이 밀려오는 종류였다.

‘공부는 내 체질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런 내가 먼저 역사 공부를 하는 날이 생기다니.

사람이 참 오래 살고, 아니, 두 번 살고 볼 일이다.

  

<윌레닌 제국에는 건국 공신으로 알려진 5대 귀족이 존재한다.>

  

역사서를 눈으로 훑던 나는 그나마 알고 있던 문장에 밑줄을 쳤다.

솔로아 공작가, 브리넨 후작가, 아르델 백작가, 발탄 자작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차니아 공작가가 건국 공신으로 존경받는 5대 귀족 가문이었다.

남자 주인공이자 북부 대공의 가문인 솔로아 공작가가 당연히 권력 및 군사력에서 압도적으로 다른 가문들을 앞지르고 있긴 했지만, 원작이 진행되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하차니아 공작가도 솔로아와 마찬가지로 5대 귀족의 중축이었다.

‘백랑(白狼)의 역할도 크겠지.’

백랑과 적랑은 북부와 남부를 대표하는 기사단이었다.

법으로 정해진 바는 없었지만, 유구한 역사 속에서 각각 하차니아와 솔로아 가문의 직계가 단장과 부단장직을 맡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장자는 아니지만 윈터나이츠인 실비가 백랑의 기사단장이었고, 트리스탄이 적랑의 기사단장이었지.’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에녹은 백랑의 부기사단장직을 맡아야 했다.

하지만 원작에서 에녹은 자신과 같은 불 속성 오러를 다루면서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폭발적인 위력을 휘두르는 트리스탄을 동경하게 되고, 적랑에 지원한다.

‘물론 에녹은 제 행보를, 하차니아가 솔로아에 종속되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기게 될 줄은 몰랐겠지만.’

원작에서는 깊게 다뤄지지 않았던 에녹의 적랑 입단이 하차니아의 몰락의 시발점이 된 건 아닐까.

명색이 공작가임에도 권세를 잃고, 황제의 비합리적인 화풀이에도 바람 앞 촛불처럼 쉽게 위태로워질 만큼 말이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역사서에 머리를 콩콩 찧던 나는 입술을 꼭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에녹이 트리스탄보다 더 강하도록 훈련시키면 되는 거잖아?’

에녹이 적랑의 일개 단원이 아니라 기사단장이 된다면 사람들이 하차니아의 입지가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게 될 리도 없었다.

‘하지만 바리스탄 경은 수업 태도부터 글러먹었어.’

써머나이츠라는 이유로 에녹과 트리스탄의 검술 선생을 맡은 그는 사사건건 트리스탄과 비교하며 에녹의 실력을 후려쳤다.

‘태생적인 오러의 양을 변화시킬 순 없겠지만, 인간은 험하게 굴리면 정신력으로 뭐든 하게 되어 있는 법인데 말이야.’

대장 노릇하며 부대를 이끌어 본 내 경험에 의하면, 트리스탄같이 뻗대는 천재 타입 보다야 에녹 같은 타입이 교육시키기엔 훨씬 수월했다.

‘그래, 좋았어.’

턱을 긁으며 계획을 수립한 나는 고개를 치켜든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럼 이제 게임을 시작해 볼까.’

나는 곧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랄라를 소환했다.

“난나.” (랄라.)

“네, 아가씨.”

“니니, 요로케 생긴 모쟈 피료해.” (리니, 이렇게 생긴 모자가 필요해.)

나는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공책 구석에 삐죽삐죽 그린 군용 모자 낙서를 내밀었다.

“흐음? 이상하게 생긴 모자네요.”

“쪼록색이야. 딱따캐.” (초록색이야. 딱딱해.)

“알겠어요. 마담 프랑소와에게 말해 놓을게요.”

“쁘랑소아?” (프랑소와?)

“네. 마침 아가씨 옷을 지으러 갈 때가 되었으니까요.”

룰루와 랄라는 인형을 가지고 소꿉놀이하듯 내 옷이나 장신구를 사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아뉘야.” (아니야.)

나는 들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예쁜 장식용 모자가 아니었으니까.

“졔라드. 쁘랑소아 아냐.”

“제랄드요? 대장장이 제랄드 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웅.”

“아아, 투구 같은 모자인가 보네요.”

랄라는 내 갑작스러운 요구에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딱히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그녀는 어른, 나는 아이에 불과했지만 신분이 다르기도 했고….

‘하차니아에서 나는 천재 아기로 통용되기 때문이겠지.’

전생과 현생을 구분하지 못했던 시절-그러니까 불과 1년 전- 나는 내가 아기의 육체에 갇힌 어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전생의 지식을 꺼내곤 했었다.

난 그다지 학식 깊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단순히 영재 아기의 혼란한 성장 과정의 일부로 치부되고 말았지만.

“훙.”

‘선글라스도 있으면 좋은데….’

군모나 선글라스가 훈련에 꼭 필요한 아이템들은 아니었지만, 위압감과 분위기라는 게 훈련 성과를 은근히 좌지우지했으니까.

하지만 투구를 조금 변형해서 만들 수 있는 군모와 달리 색안경은 굉장히 비싼 물건에 속했다.

‘너무 비싸면 아빠 귀에도 들어갈 테니까.’

룰루와 랄라는 내 계획을 알아도 상관없지만, 가주인 가스파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아가씨, 뭐 재밌는 놀이라도 생각하신 건가요?”

“웅.”

“무슨 놀이인데요?”

에녹 굴리기 놀이.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으므로 나는 쉿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갔다.

“비미리야, 난나.” (비밀이야, 랄라.)

나는 공작가의 집사인 코제트의 안경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타다닥. 탁탁.

오동통한 소시지 같은 손가락들이 움직이며 경쾌한 소리를 낸다.

“움후후.”

“어머. 우리 아가씨, 또 악당처럼 웃으신다.”

랄라가 내 포슬포슬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음흉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 * *

  

“꼬졔뜨.” (코제트.)

“네, 아가씨.”

내 부름에 집사 코제트가 자신의 날카로운 눈매를 빛내 주는 안경을 검지로 쓸어 올린다.

‘저 안경이 탐난단 말이야….’

색안경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긴 했지만, 그냥 안경도 제법 비쌌다.

그래서 그런지 공작가의 사용인들 중에 안경을 쓰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꼬졔뜨, 안경 마나?” (코제트, 안경 많아?)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코제트의 눈치를 살폈다. 차가운 인상의 그녀가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대답한다.

“아뇨.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이랑 예비용으로 보관하고 있는 안경 두 개가 전부랍니다.”

‘다행히 한 개 더 있구나.’

그럼 내가 잠시 빌려도 무방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나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코제트의 손을 붙잡았다.

“안경 어디쩌?”

“제 방에 있지요.”

내 필살 눈빛 공격에도 코제트의 반응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코제트는 다른 사용인들이랑 좀 다르니까, 마냥 달라고 할 수 없어.’

다른 사용인들은 나만 보면 귀여워서 함박웃음을 짓고, 어떻게든 내 관심을 얻기 위해 안달을 냈는데 코제트는 아니었으니까.

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그녀는 유모인 룰루와 랄라보다도 내게 엄하게 굴곤 했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나는 모두가 잠든 틈을 타 그녀의 방에 숨어들었다.

끼이익.

낡은 나무문이 삐끄덕 움직이는 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지만, 다행히 잠이 든 코제트의 숨소리가 안정적이었다.

살곰살곰.

까치발을 든 채 코제트의 침대 근처에 다가선 나는 희붐한 달빛에 의지해 안경을 찾아낼 수 있었다.

‘저기 있다!’

안경은 침대 머리맡에 위치한 작은 책장 위에서 반들반들 윤을 내고 있었다.

‘어떻게 올라가지.’

내 육체는 이제 요람형으로 만들어진 내 침대에서도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는 날렵함을 갖추고 있긴 했지만, 코제트의 침대는 내 요람보다도 한 머리가 높았다.

‘그렇다고 펄쩍 뛰면 코제트가 깰 염려가 있는데….’

엄격하고 깐깐한 그녀의 성정은 잘 때도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인지, 코제트는 바로 일어나기 쉬운 정자세로 자고 있었다.

“휴우.”

작게 심호흡을 한 나는 협탁을 잡고 몸에 반동을 준 다음 깃털처럼 가볍게 그녀의 침대 위에 안착했다.

콩-

매트리스 위에 내 작은 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지만, 나는 재빠르게 이불을 손으로 눌러 진동을 최소화했다.

‘역시, 내 실력 안 죽었어.’

나는 새근새근 울려 퍼지는 코제트의 숨소리에 헤실 웃었다.

‘집사 방에 몰래 숨어들어 안경을 훔쳐 오는 일 따위, 암살이 특기였던 내겐 별거 아니지.’

금세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재빠르게 안경을 집어 품에 넣은 다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촤악-!

멋진 자세로 바닥을 짚고 일어선 나는 날렵하게 문가로 몸을 날렸다.

콰당-!

살짝 넘어지고 말았지만, 코제트의 잠든 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코제트의 안경을 내가 가져갔다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겠지. 후후.’

완벽 범죄다.

  

* * *

  

‘우리 아가씨… 역시 내 안경을 갖고 놀고 싶으셨나 보네.’

코제트는 리니의 작은 궁뎅이가 방을 빠져나가며 울리는 뽀시락 소리에 흐뭇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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