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5)화 (250/486)

제15화

아빠는 에녹의 검술 수업을 참관하게 된 나를 위해 연무장에 오러 보호막을 설치했다.

행여나 여름의 불꽃이 내게 튈까 염려한 탓이다.

덕분에 나는 푸른빛을 띠는 불투명한 보호막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소년의 얼굴에 눈살을 찌푸렸다.

“째썹써….”(재수 없어.)

흐릿하게 보여도 재수 없는 낯짝이었다.

트리스탄 드 솔로아-굴렘.

솔로아 공작가의 단 하나뿐인 후계자이자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의 남자 주인공인 그가 검을 삐딱하게 든 채 내게 저벅저벅 걸어온다.

트리스탄은 실베스테르보다 한 살 어렸으니 불과 열 살밖에 안 됐을 텐데도 벌써 키가 헌칠했다.

‘남주긴 남주네.’

쳇. 나는 별수 없이 그의 미모를 인정하면서도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뭐, 엑스트라인 에녹이랑 실비가 쟤랑 비교해서 크게 빠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굴리는데 트리스탄이 내게 불쑥 제 얼굴을 들이민다.

나는 내 생각을 읽어 내기라도 할 것처럼 번뜩이는 금안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이 아기가 네 여동생이라고?”

트리스탄이 내게 턱짓하자, 에녹은 마치 나를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으스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청 귀엽지?!”

“흠.”

“최고 귀엽지 않냐? 막 장난 아니지?”

에녹은 지루한 수업을 나와 같이 들을 수 있으리란 기대에 잔뜩 들뜬 모양이었다.

흥분한 에녹이 트리스탄에게 바짝 붙어 내 귀여움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아기 생긴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뭐.”

트리스탄은 싹퉁바가지 남주답게 친구의 여동생을 칭찬하는 말은 절대 입에 담지 않았다.

그의 말에 반박하듯 에녹이 입을 부루퉁 내민다.

“아닌데. 우리 리니는 다른 아기들보다 백배는 더 귀여워.”

‘잘한다, 우리 셋째!’

나는 에녹을 응원하며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

그래, 솔직히 나 정도면 엄청 귀여운 축에 속했다.

외모 지상주의 끝판왕인 룰루와 랄라가 내 유모직을 맡기 위해 괜히 50:1의 경쟁률을 뚫은 것이 아니니까.

“귀엽다고 쳐도, 네 동생이 왜 우리 수업을 구경하는 거지?”

“내 동생도 써머나이츠일 수 있대.”

“허?”

에녹의 대답이 의문스러운 듯, 트리스탄이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희한하군. 하차니아 공작가에서 같은 대에 써머나이츠가 두 명이나 나오다니.”

작게 중얼거리는 트리스탄의 말은 아이치고 무척 진중한 어조였지만, 공작가의 이름이 너무 하찮아서 딱히 진지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그래! 우리 리니가 적랑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고.”

적랑은 써머나이츠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으니 술자인 내가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에녹은 보호막 안으로 팔을 쑥 집어넣고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같이 적랑 들어가자, 리니야. 백랑은 실베스테르같이 재미없는 놈들밖에 없대.”

“웃기는군. 그래 봤자 여자애일 뿐인데 적랑에 쉽게 들어올 수 있을 리 없다.”

트리스탄의 이죽이는 말에 에녹이 예쁜 이마를 사납게 찌푸린다.

“너 지금 우리 리니 무시했냐?”

“그랬다면?”

트리스탄의 싸가지 없는 말에 에녹이 씨근거리며 그에게 달려들 기세로 몸을 틀었다.

“이 자식이…!”

“어허. 에녹, 오늘 수업은 대련 예정이 없다.”

때마침 연무장에 들어선 바리스탄 경이 에녹을 붙잡는다.

“경, 오셨습니까.”

꾸벅 고개를 숙이는 트리스탄에게 턱짓한 그는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방긋 웃어 주었다.

‘곰처럼 생긴 아저씨네.’

현 적랑의 기사단장인 바리스탄 경은 흐릿한 이목구비와 대비되는 거대한 몸집이 눈에 띄는 남자였다.

“오늘은 아기 공녀님이 구경을 나오셨으니 둘 다 오러 제어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예.”

바리스탄의 엄한 목소리에 에녹과 트리스탄이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들이 검을 빼 들자,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운 열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실비의 오러와는 확실히 다르구나….’

태어날 때부터 다룰 수 있는 속성이 정해진 소울나이츠들과 달리 술자들은 다양한 속성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오러와 비교하면 형편없는 위력이었다.

해서 이 제국은 소울나이츠 중심으로 군대가 편성되었고, 황실은 소울나이츠라면 평민에게도 바로 작위를 수여할 정도로 오러를 다루는 능력을 매우 높이 샀다.

‘하차니아 공작가는 대대로 윈터나이츠나 쉐도우나이츠를 배출하는 가문이었지.’

하지만 남자 주인공인 트리스탄과 비교하면 에녹과 실베스테르의 오러는 그리 대단하지 못했다.

‘눈으로 보니 더 확실하게 알겠어.’

검신을 에두르는 얄쌍한 에녹의 불꽃과 달리 트리스탄의 불꽃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치솟은 게 매우 강력해 보이긴 했다.

‘원작에서 트리스탄은 태양신의 현신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남주인 트리스탄이 세계관 최강자인 건 로맨스 소설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트리스탄 앞에서 풀이 죽은 에녹에게 마음이 쓰였다.

스승인 바리스탄도 제자들의 차이를 모르지 않는지, 에녹과 트리스탄의 대우를 달리하고 있었으니까.

“에녹, 넌 이제 오러를 그만 꺼내도 괜찮다.”

“더 할 수 있는데요.”

“쯧쯧. 너는 벌써 오러가 바닥나지 않았느냐. 트리스탄과 너는 다르니까 따라 하려고 하지 말거라.”

검을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러가 고갈된 에녹이 한심하다는 듯, 바리스탄이 혀를 끌끌 찼다.

‘에녹이 더 어리니까 오러 양이 적은 건 당연하지 않나?’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그런 바리스탄을 노려보았다.

‘검을 대하는 자세는 에녹이 더 좋은 것 같은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나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호흡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는 트리스탄보다 땀을 삐질 흘려 가면서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는 에녹이 더 대견해 보였다.

“훙. 여씨 째섭쩌.”(흥, 역시 재수 없어.)

밉살맞은 트리스탄을 가느스름히 뜬 눈으로 노려보는데, 갑자기 고개를 든 그와 하필이면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

자신을 쳐다보는 내가 의아한 듯 그가 미간을 좁힌다.

“히익.”

화들짝 놀라 냉큼 시선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트리스탄은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너.”

“녜, 녜?!”

“나를 왜 노려보는 거지?”

단순히 조금 쳐다봤을-노려봤을- 뿐인데, 성격 나쁜 트리스탄은 기분이 크게 상한 모양이었다.

나는 사납게 일그러진 그의 미간을 쭈뼛 살피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끄게…….”

“대답해. 난 아기라고 봐주지 않으니까.”

트리스탄은 낮은 목소리로 나를 협박하며 검을 잡은 손을 움직였다.

보호막이 쳐져 있는 덕에 크게 뜨겁지는 않았지만, 볼에 닿을 것만 같은 오러의 열기에 나는 울상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에녹…! 얘가 나 괴롭혀…!’

하지만 에녹은 마침 바리스탄에게 개인 지도를 받는 중이라 나와 트리스탄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놈 자식은 하여간 도움이 안 돼!’

나는 아까까지는 안타깝게 생각하던 에녹을 욕하며 험상궂은 트리스탄의 얼굴을 눈으로 훑었다.

트리스탄과 눈이 마주친 내가 방긋 웃자, 그가 잠시 흠칫 몸을 떤다.

“나를 비웃는 건가? 무슨 속셈인 거지.”

하여간 ‘새엄마와 이복형제의 갖은 견제를 받으며 험난하게 자라 성격은 비뚤어졌지만 내 여주에게만은 따뜻하겠지’의 전형인 남주다운 대사였다.

‘아기한테 속셈이 어디 있어, 인마.’

물론 나는 있지만.

나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그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예뽀서….”

“뭐?”

“예뽀서 쳐다봐떠요.”(예뻐서 쳐다봤어요.)

처세술이란 이런 것이다.

일찐 언니 훔쳐보다 걸렸을 때는 예뻐서 봤다고 대답해야 한다.

내가 미적미적 내놓은 대답에 양아치 남주인 트리스탄의 굳은 입매가 잠시 풀어진다.

“……예뻐서 봤다고?”

“녜. 누니 예뽀.” (네. 눈이 예뻐.)

나는 그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내 주특기-전생과 다른-인 깜찍하게 눈 깜빡이기까지 발휘했다.

“잘모해또요.”(잘못했어요.)

“…….”

“니니가 이제 안 보께.”(리니가 이제 안 볼게.)

“아니, 뭐….”

내 빠른 사과에 당황한 트리스탄이 제 턱을 긁는다. 그제야 내가 아직 어린 아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살짝 붉어진 그의 귓가를 발견한 나는 쐐기를 박기 위해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다음 머리를 푹 숙였다.

“데둉해요.”(죄송해요.)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는 없어.”

‘방금까지는 사과 안하면 한 대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굴더니.’

트리스탄이 뒤늦게 손을 내저었지만, 원작 남주에 대한 나의 편견은 이미 공고해진 뒤였다.

‘얜, 아이네스와 사랑에 빠지기 전엔 그레고르와 똑같은 놈이야.’

좋게 말하면 여주에게 감화되어 뒤늦게 마음을 열게 되는 암울한 과거의 북부대공, 나쁘게 말하면 그냥 소시오패스다.

‘에녹을 하루라도 빨리 이 수업에서 빼내 와야겠어.’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다정한 성정의 셋째에게 저놈을 계속 붙여 둘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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