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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14)화 (249/486)

제14화

어쩌면, 노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책 속 세상에서 환생했다는 걸 깨달은 이후 곰곰이 생각하던 것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에 등장하는 아리나 해협은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기묘한 바다였어.’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네스 황후의 시체는 제국으로 송환되었지만, 노엘은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왜?’

생트로페는 해적 무리긴 했지만, 망국이 되어 버린 마도왕국 아크레아의 후예들이었다.

기껏 노엘을 포로로 잡아놓고 이용조차 하지 않은 것은 윌레닌에 대단한 앙심을 품고 있을 그들로서는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이었다.

원작 내에서는 큰 비중이 없었으니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노엘은 공작 부인이자 윌레닌 제국의 유일한 여자 제독이었으니까.

노엘은 결혼 전, 제국 인근 바다를 혼자 전부 점령했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군인이었다.

여성 귀족들의 열성적인 지지와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제독의 자리까지 오른 그녀는 생트로페가 이용할 만한 충분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네스 황후를 죽인 건 황제에 대한 복수라고 쳐도….’

왜 노엘까지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죽여 버린 걸까.

아니, 사실은 죽이지 못한 건 아닐까.

나는 그런 의구심을 떨치지 못했다.

‘생트로페 해적들이 아리나 해협에서 엄마를 놓쳤을 가능성이 있어.’

나는 간질간질한 입을 두 손으로 꾹 누르며 가스파르의 눈치를 살폈다.

노엘의 초상화를 살피는 검붉은 눈이, 왠지 평소보다 조금 더 붉어 보인다.

“압빠, 우러요?” (아빠, 울어요?)

나는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여 가스파르의 눈가를 짚었다.

건조한 피부에서는 물기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게는 그가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아빠가 낮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는다. 나는 그를 위해서라도 노엘이 꼭 돌아오길 바랐다.

‘아직은 실낱같은 희망에 불과했기에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가망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리니, 그래서 나는 왜 찾은 거냐.”

가스파르는 슬퍼하는 제 모습을 들킨 것이 민망한 듯 괜히 말을 돌렸다.

“우움….”

나는 그의 물음에 크게 눈을 끔뻑이며 말을 머뭇거렸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라도 생긴 거냐.”

가스파르는 답지 않게 주저하는 나를 보며 슬며시 웃었다.

나는 내 이마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곤 아닝데….”(그건 아닌데.)

“?”

“니니 에노끄랑 가티 꼼 배우고 시포요!”(리니 에녹이랑 같이 검 배우고 싶어요!)

내 호기로운 외침에 가스파르가 베일 것처럼 날카로운 자신의 턱을 검지로 매만진다.

정말, 우리 아빠는 애가 넷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유려한 사람이었다.

“…검?”

나는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녜, 꼼!”(네, 검!)

“에녹 이 자식이 네 앞에서 또 자랑질을 했나 보구나.”

내 대답에 가스파르가 이를 부득 갈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당장이라도 에녹을 찾아 혼을 낼 것만 같은 흉흉한 기세에 화들짝 놀란 나는 그의 다리를 덥석 붙잡았다.

“아닝데?! 아녜오!”(아닌데?! 아니에요!)

“아니긴. 작년에도 에녹이 네게 오러를 보여 준다며 설치다가 널 크게 다치게 할 뻔했지.”

나는 아빠의 말에 그제야 에녹의 뜨거운 오러에 내 머리가 홀라당 다 탈 뻔했던 작년의 사고를 떠올렸다.

‘아, 젠장. 그걸 잊고 있었네.’

머리끝이 조금 그을렸을 뿐 다치지도 않았고, 전생을 기억하는 내게는 너무 하찮은 사고에 불과한지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가스파르는 에녹이 내 머리를 태울 뻔했던 게 당장 어제였던 것처럼 숨을 씨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놈 자식, 오러는 멋을 부리기 위해 사용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단단히 일렀는데도 네게 또 자랑을 하다니!”

“아녜오!” (아니에요!)

“자꾸 오빠를 감싸려고 들지 말아라, 리니.”

‘진짜 아닌데.’

에녹은 실제로 그 이후 내 앞에서 단 한 번도 오러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내가 계속 도리질을 쳐 가며 가스파르의 말을 부정했지만,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저벅저벅.

보폭이 넓은 그의 걸음 소리가 집무실을 울린다.

‘에녹을 혼낼 생각인가 보네.’

죄 없는 에녹이 나 때문에 혼이 나게 둘 수는 없었다.

가스파르를 따라 문 쪽으로 내달린 나는 이제 막 집무실을 벗어나려는 가스파르의 왼쪽 다리에 대롱 매달렸다.

“압바!” (아빠!)

“놔라, 리니! 다친다.”

“압빠! 이거 보셰오!” (아빠, 이거 보세요!)

‘이렇게 준비 없이 보여 주려던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내 정수리에 내려앉는 가스파르의 세찬 시선을 느끼며 양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잇!”

나와라!

“이이잇!”

나왓!

“이이이잇!”

아니, 왜 안 나와?

“이런.”

제자리에 오똑 서서 두 눈을 꼭 감은 채 몸에 힘을 잔뜩 주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가스파르가 나를 급하게 안아 든다.

“…화장실이 급한 거냐.”

나는 아빠의 품에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녜오!”

‘이상하다. 혼자 연습할 때는 잘됐는데?’

나는 빨갛게 볼을 붉히며 허둥지둥 팔로 엑스자를 만들었지만, 가스파르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내 등을 다독일 뿐이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리니. 아빠도 화장실은 가니까.”

“아녜오!!”

이 몸도 이제 벌써 세 살이나 됐고, 나는 당연히 혼자 용변을 볼 줄 알았다.

아기들이 흔히 앓는 변비도 없었는데 이런 수치스러운 오해를 사다니!

억울해서 눈물까지 찔끔 나온다.

“요고, 요고 보셰오!”(이거 보세요!)

뒤늦게 마나 응축에 성공한 나는 언뜻 불 속성 오러처럼 보이는 덩어리를 가스파르의 눈앞에 흔들었다.

“…오러?”

“에노 꼬.” (에녹 거.)

“그래, 정말 에녹의 오러와 흡사한 것도 같다.”

나는 놀라움이 섞인 가스파르의 목소리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속인 건가?’

오러를 다루는 소울나이츠는 되고 싶다고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능력은 날 때부터 타고나는 일종의 재능이었고, 아쉽게도 ‘레오노라 하차니아’에게는 오러를 다루는 능력은 없었다.

‘레오노라는 술자에 가까웠지. 아이네스처럼.’

술자, 그러니까 마법사의 마나는 날카로운 검기로 응축되는 오러와 달리 공기처럼 옅게 퍼진 에너지였다.

‘미약한 오러는 마나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하니까….’

내가 응축한 마나를 심각한 얼굴로 관찰하는 가스파르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두근거린다.

‘속아라, 제발!’

“리니.”

“녜?”

“네게 써머나이츠의 자질이 있는 것 같구나.”

“써머나쯔?”(써머나이츠?)”

“그래, 우리 가문에서는 매우 드문 오러일 텐데.”

가스파르가 흥미롭다는 듯 내가 만든 마나 쪽으로 팔을 뻗는다.

나는 그가 내가 만든 오러가 가짜라는 것을 눈치챌까 재빨리 마나를 흩뜨렸다.

“업서저쩌!” (없어졌어!)

내가 부러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가스파르가 피식 웃으며 내 볼 살을 누른다.

“아직 다루는 게 서툴러 그렇다. 바리스탄 경에게 말해 둬야겠군, 에녹에 이어 리니까지 써머나이츠라니.”

아빠를 속였다는 죄책감에 털이 부숭부숭한 초라한 양심이 조금 아파 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에녹이 어떤 방식으로 오러를 단련하는지 알아내야 하는걸.’

나는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강인하게 개조시키는 데는 도가 텄지만, 소울나이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으니까.

오러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알아야 훈련을 시키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아가 황녀님의 장밋빛 인생>에 나오는 건 술사에 관한 지식이었으니까….’

선천적으로 마나를 다룰 수는 있었지만, 마법은 배워 본 적 없는 내가 마나를 오러처럼 응축시킬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원작 덕분이었다.

별궁에 유폐된 채 할 일 없이 시간만 죽이던 아이네스는 우연히-많은 소설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정체를 숨긴 대마법사를 만나 최고급 마법 과외를 받게 된다.

‘대마법사 할아버지가 아이네스에게 마나를 응축하는 방법을 알려 줬던 장면을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야.’

게다가 내게는 원작-비록 지금은 백지장에 가까웠지만-도 있지 않은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아이네스는 무럭무럭 자라 대마법사를 만나게 될 테고, 책에는 법사 할아버지의 꿀팁들이 고스란히 적힐 예정이었다.

아이네스는 꼬장꼬장한 대마법사 할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서 원작을 읽기만 하면 된다니…!

‘빙의 버프 개꿀!’

나는 아빠의 품에 안긴 채 움후후,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을 맞부딪혔다.

그러나 다음날,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맞부딪히고 만다.

‘아니, 얘도 같이 수업을 듣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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