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4)화 (239/486)

제4화

비명을 내지르는 노라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쯤 침대 기둥에 더 박아 댔다.

‘이렇게 사람 머리채를 잡아 보는 건 또 오랜만이네.’

“이, 이거 놓으세요! 꺄악! 놓으라고!”

노라가 버둥거렸지만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면서도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사람을 고통으로 다스릴 때에는 확실하게 위아래를 각인시켜 주어야 효과가 있었으니까.

“무슨 아기가 이렇게 힘이 세! 으윽!”

아기에 불과한 내가 버둥거리는 노라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건 내가 마나를 이용해 순간적으로 악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라는 그 사실을 모르니까 내가 괴물처럼 보이겠지만.’

탁-

튕기듯 노라를 놓아 주자 그녀가 비틀거리며 뒤로 엎어진다. 피범벅이 된 이마에서 붉은 피가 후두둑 떨어짐과 동시에 그녀는 기겁하며 눈물을 흘렸다.

“흐윽, 윽!”

자작가의 영애로 곱게 자라 공작가의 가정교사로 발탁된 노라로서는 난생 처음 겪어 보는 고통일 것이다.

나는 엉엉 우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에 남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탁탁 털었다.

“마니 아펏서?”

“미, 미친! 뭐 이런 아기가 다 있어?!”

“웅? 반말?”

노라는 무감한 내 얼굴이 소름 끼친다는 듯 새하얗게 질려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 있어요?”

겁을 먹긴 먹었는지 뒤늦게 존칭을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이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생긋 웃었다.

“이졔 맘마 가저와.”

“네?”

“밥, 가저오라구.”

별채까지 걸어오느라 체력을 소진했더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작은 배를 통통 두드리며 황망한 얼굴로 주저앉은 노라를 향해 턱짓했다.

“말 안 드러? 또 맞구 시퍼?”

생글생글 웃는 내가 악마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노려보던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노엘의 배신으로 태어난 딸이었으니 가스파르가 나를 미워할 수는 있었다. 실베스테르나 에녹이 내게 데면데면하게 군다고 해도,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괄시를 받고 살 수는 없지.’

하극상을 감내해 주기엔 미친개의 이름이 아까웠으니까.

* * *

노라가 가져다준 음식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운 나는 부른 배를 두드리다 데구르르 침대 위를 굴렀다.

‘단 거 먹고 싶다.’

원래대로라면 식사를 마치고 룰루나 랄라가 디저트를 가져다줄 텐데.

아쉬움에 손가락을 쫍쫍 빨던 나는 누군가 복도를 서성이는 듯한 기척에 문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뇸데드디?”(롬베르디.)

“헉!”

익숙한 인영은 본관 주방장 롬베르디의 것이었다. 내 작은 중얼거림에 롬베르디가 까슬까슬한 수염이 자란 입 주변을 매만진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제 이름은 언제 외우신 건가요.”

내가 제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에 롬베르디는 꽤나 감동한 얼굴이었다.

“쥬쭈 주는 놈데드디.”(주스 주는 롬베르디.)

“하이고, 아가씨! 어찌 저 같은 놈의 이름을 다 외우신답니까.”

“쥬쭈.” (주스.)

내가 롬베르디의 이름을 외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만드는 특제 딸기 주스가 무척 맛있었으니까.

딸기 알갱이가 살아 있는 즙에 설탕을 솔솔 뿌려 버무려 만든 그의 딸기 주스는 가끔 놀러 오는 다른 귀족가의 영식들이 찾을 정도로 유명했다.

“마침 오늘 들어온 딸기가 딱 주스 한 잔만큼 남아서요.”

룰루와 랄라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를 열심히 꼬셔 뒀던 보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롬베르디는 내 숙소가 갑자기 별채로 옮겨져 오늘은 주스를 챙겨 주지 못했다며 품에서 딸기 주스 한 병을 꺼내 들었다.

“꺄!”

단 게 당겼는데 잘됐다.

롬베르디의 말에 활짝 웃으며 나는 잘 닦인 창가에 과일 바구니처럼 얌전히 앉았다.

“자, 드세요.”

강아지 털처럼 포슬포슬한 내 머리를 쓰다듬은 롬베르디가 유리병의 뚜껑을 열자 달콤한 향기가 물씬 풍긴다.

히죽 웃으며 딸기 주스를 향해 손을 뻗는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롬베르디가 갑자기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도련님?”

롬베르디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방금 막 훈련을 끝낸 듯 피로한 얼굴의 실베스테르가 보였다.

“지금 레오노라에게 뭘 주는 거지.”

복도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그가 나와 롬베르디를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연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움찔하며 주스병을 껴안았다.

“아가씨가 주스를 드시고 싶어하실 것 같아서, 제가 본관에서 만들어왔습니다.”

“가주님의 허락은 받은 건가?”

“아, 아뇨…. 받지 않았습니다.”

실베스테르의 날카로운 물음에 롬베르디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사생아인 나를 챙긴다고 혼낼 작정이구나.’

나는 나 때문에 괜히 주방장이 혼나는 게 안쓰러워 품에 꼭 안고 있던 주스를 도로 내밀었다.

“…니니, 이거 안 머그께.”

내가 롬베르디쪽으로 불쑥 내민 주스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실베스테르가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쨍그랑-!

이제 겨우 열한 살에 불과한 실베스테르의 살벌한 기세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롬베르디가 움찔하다 내 손을 툭 치고 말았다.

나는 흰 대리석바닥을 물들이는 연분홍빛 액체를 내려다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자식이 어린애 코 묻은 주스를 노리더니 결국 음식을 낭비하게 만드네!’

물론 실베스테르도 아직 어린애였지만….

나는 눈을 가느스름히 뜬 채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치사하게 먹을 것 가지고 이러기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베스테르와 에녹은 늦둥이 여동생인 나를 무진장 좋아했다. 전생의 기억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해 이상 행동을 보이던 나를 감싸 줄 정도로.

“레오노라를 아실럼으로 보내신다면 저는 아버지를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가신들이 나를 전문 기관에 맡겨야 한다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가장 먼저 나를 위해 나서 준 아이도 실비였다.

‘애초에 가스파르는 나를 정신 병동으로 보낼 계획이 손톱만큼도 없었던 것 같지만.’

차남인 실비는 삼남 에녹만큼 다정한 성정이 아니어서 표현에 서툴렀지만, 나는 실비가 나를 굉장히 예뻐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더는 아니겠지.’

내가 공작가의 수치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걸 알게 됐을 테니까.

“흥.”

나는 깨진 유리병을 빤히 바라보는 실비에게 부러 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레오노라.”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부른 실비가 집요하게 내 시야 안으로 들어선다.

나는 그가 내 작은 발을 들고 나서야 작은 유리 조각이 발등에 박혔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다친 건가?”

이제 내가 싫어졌을 거면서, 다정함이 여상하게 몸에 배었는지 실비가 나를 덥석 안아 든다.

그는 내 발등에 박힌 유리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빼낸 다음 제 소맷자락으로 꾹 눌러 지혈까지 해주었다.

“롬베르디, 본관 주치의를 불러와.”

“네, 도련님.”

‘수치스러워…!’

이런 어린애에게 도움을 받다니 한때 미친개로 불렸던 내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를 다독이는 손길이 꽤 다정해서 나는 원인 모를 울컥함에 그를 밀쳐 냈다.

‘다정한 건 쓸모없어!’

레오노라로 살게 된 지 고작 3년. 그나마도 제대로 기억나는 건 전생을 자각한 몇 개월의 시간뿐이었다.

‘그런데도 사람을 이렇게 나약하게 만들다니.’

이제 내 앞에 펼쳐진 건 아주 험난한 가시밭길이라, 연약한 아기의 정신 상태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시져!”(싫어!)

“뭐?”

“쩌리 가!”(저리 가!)

내 격렬한 거부에 어쩐지 조금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실비가 뒤늦게 묻는다.

“…저리 가라고?”

나는 그제야 내가 실베스테르를 이렇게 대놓고 거부하는 게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 정을 떼 놓는 게 나아.’

기대하고 실망하느니, 처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백배천배 나았다.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내가 가족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면 황궁에서 그들이 나를 꺼내 줄지도 모른다는, 여자주인공인 아이네스 대신 나를 살려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어차피 공작가 사람들은 원작의 레오노라가 죽게 내버려 두질 않았나.

전생의 양부도, 현생의 가족들도 결국 허울뿐이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정을 떼자.’

나는 남들 몰래 굳게 다짐하며 답지 않게 멍청한 얼굴로 입을 헤 벌리고 선 실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내게 화라도 난 건가?”

실베스테르는 고작 세 살 먹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기 시작했다.

“리니.”

내 연보랏빛 눈과 달리 루비처럼 투명한 그의 적안이 나를 향해 반짝반짝 빛을 뿌린다.

“레오노라.”

“부르디 마.”(부르지 마.)

“……왜?”

“시삐 이졔 니니 오빠 아냐.”(실비 이제 리니 오빠 아니야.)

“!”

내 선언에 실베스테르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왔는지 그의 등 뒤에서 히이익, 룰루와 랄라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창가에 들러붙은 내게 저벅저벅 다가온 실베스테르가 사납게 말을 읊조린다.

아직 열한 살밖에 안 된 주제에 벌써부터 오러를 사용할 수 있는 천재답게 그는 날카로운 오러까지 드러냈다.

“도, 도련님!”

화가 난 실비가 나를 때리기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랄라가 나를 감싸듯 앞으로 나선다.

“비켜, 랄라. 나는 레오노라에게 대답을 들어야겠으니까.”

‘…허, 저놈이 지금 아기인 내게 오러를 사용려고 드는 거야?’

이제 제 동생 아니라고 막 나가기로 작정이라도 한 걸까.

“대답해.”

나는 생각보다 격한 실비의 반응에 조금 당황해 말을 머뭇거렸다.

내 주위를 감싸는 실베스테르의 오러는 겨울 새벽처럼 시리도록 푸르렀다.

‘내 여린 몸 다 꽝꽝 얼겠다!’

나는 순식간에 내려간 온도에 울상을 지었다. 냉동고에 갇힌 것처럼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추오.”(추워.)

“뭐?”

“추오!!!”(추워!)

내가 빼액 내지른 소리에 실베스테르는 그제야 자신이 오러를 사용하고 있음을 자각한 모양이었다.

“아.”

실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오러를 거둬 냈지만, 급격히 변한 온도에 충격을 받은 나의 육체는 서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역시… 친하게 지내면 안 될 놈이었어.’

제 맘에 안 든다고 어린 아기 괴롭히는 싹이 아주 누렇다. 누렇다 못해 응가색이다.

‘……이를 거야.’

나는 이제 가족이 없긴 하지만, 누구한테든 꼭 이르고 말 거다.

눈앞이 점멸하는 와중에도 나는 실비를 향해 눈꼬리를 치켜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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