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2)화 (237/486)

제2화

“에녹, 실베스테르. 훈련 시간이다.”

내 방문에 얼굴을 들이민 가스파르의 말에 실비와 에녹이 미적미적 몸을 일으킨다.

내 걱정 때문에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라 나는 괜찮다는 듯 방긋 웃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탁.

아이들이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내 코와 입 모양 그대로 눈물 자국이 남은 베개를 짚고 엉금엉금 요람에서 기어 나왔다.

‘아이쿠!’

아직 나의 신체가 시답지 않은 삼등신인 탓에 머리부터 떨어질 뻔했지만, 나는 용케 중심을 잡아 바닥에 착지했다.

꼬물꼬물 움직여 요람 근처를 벗어난 나는 어제 룰루가 가져다준 공책을 서랍에서 끄집어냈다.

‘한글로 쓰면 아무도 못 알아보겠지.’

아직 이 세계의 글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나는 아직 한글을 기억했다.

오동통한 손가락으로 깃펜을 움켜잡은 나는 질 좋은 양피지의 부드러운 촉감을 만끽하며 서걱서걱 손을 움직였다.

1. 내 이름은 레오노라 에스트렐라 드 하차니아. 하차니아 가문의 독녀. 현재 세 살. 열아홉 살에 병으로 죽을 운명(ㅅㅂ)

‘앗. 번졌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손에 너무 힘을 준 탓에 잉크가 연한 볼 살에 튀고 말았다. 나는 오징어 먹물처럼 번지는 잉크를 슥 문질러 닦은 다음 천천히 메모를 이어 나갔다.

2. 아빠는 가스파르 데지레 드 하차니아, 윌레닌 제국의 공작이자 현재로써는 황제의 오른팔. 아내에 이어 딸까지 잃고 원작 여주의 아빠인 황제와 대립각을 세우는 등장인물.

가스파르의 아내인 노엘은 제국에 단 하나뿐인 여자 제독이었다.

그녀는 죽마고우인 황후의 고집으로 나를 낳자마자 항해를 떠났는데, 해적들에게 붙잡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고 노엘이 황가의 사람과 내통하여 낳은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이 시점이었지.’

노엘이 행방불명되자마자 하차니아 공작가의 자식 중 한 명에게 황실의 피가 흐른다는 신탁이 내려온 덕분이었다.

공작가는 개국공신일 뿐 황실과 혈연관계는 아니었다. 게다가 콕 짚어 ‘한 명’에게만 황실의 피가 흐른다니.

‘그렇다면 노엘의 부정밖에는 말이 되질 않잖아.’

나는 결국 황실을 배반하게 된 가스파르를 이해했다.

시체도 없이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게 생겼는데, 심지어 죽은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충성심으로 차오르는 분노를 꾹 인내하던 그가 완전히 황제의 반대편으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계기는 사생아인 그의 딸, 그러니까 나의 죽음이었다.

나는 어렴풋이 기억나는 원작의 사건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나랑 아이네스가 똑같은 병을 앓는 설정이었던가….’

3. 아이네스와 내가 앓게 될 병은 신의 이름을 따서 루에르병이라고 불림(내가 신이라면 기분 나쁠 듯).

루에르병은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마비되다 이내 심장까지 굳어 죽게 되는 무서운 병이었다.

성수를 아무리 쏟아 부어도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 주신 루엘라를 향한 간절함을 담아 루에르병이라고 불렸다.

다행히 원작에서는 이 병의 유일한 치료제인 엘릭서가 등장하지만, 대륙에 단 하나뿐인 엘릭서는 당연하게도 엑스트라인 내가 아니라 여자 주인공인 아이네스에게 돌아간다.

4. 루에르병을 고칠 엘릭서를 구해 오는 사람은 남자 주인공인 트리스탄이나 황제가 아니었음.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끝없는 사막과 망망대해를 건너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그 전설의 엘릭서를 구해 오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얼굴도 모르는 내 첫째 오빠 자카리다.

흑랑(黑狼)의 기사단장이자 황실 근위대장이었던 자카리는 황제의 명을 받아 목숨을 걸고 엘릭서를 구해 온다.

내 오빠가 엘릭서를 구할 운명이었으니 걱정할 것 없지 않느냐고?

그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였다. 원작대로 미래가 흘러간다면 나는 예외 없이 죽게 될 것이다.

자카리가 바로 비운의 서브남주였으니까.

로판 남주와 서브남주라는 종족은 대개 사랑밖에 모르는 똥멍청이인 법이다.

사랑하는 아이네스가 아파하는 모습에 죽어가는 여동생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는지, 자카리는 기껏 구한 엘릭서를 홀라당 아이네스의 입에 털어 넣는다.

‘아내가 내통해 낳은 자식이라고 생각해 아픈 레오노라를 외면했는데, 막상 죽어 버리니 그 나약한 성정에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꽤나 힘들었을 거야.’

가스파르 하차니아는 그런 인물이었다.

아내의 배신을 매번 각인시켜 주는, 단순히 입적만 시켰을 뿐인 자식의 죽음에도 진심으로 분노하고 슬퍼하는.

‘나였으면 죽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았을 텐데…….’

소설에 정확히 묘사되진 않았지만, 레오노라가 사생아라는 것은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막내딸인 레오노라를 제외한 삼형제는 전부 공작을 판에 찍은 듯 닮았으니까.

‘그래서 하차니아 공작가에서는 엘릭서를 찾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던 걸 테고.’

나는 동글동글 커다란 눈을 가느스름히 뜨며 이 막막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끄으으.”

모르겠다. 당장은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작은 뇌는 조금만 열심히 굴려도 금세 엄살을 피우며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 댔다.

아무리 전생을 기억한다지만, 내 육체는 어린아이의 것에 불과했으니까.

“아가씨, 간식 드실 시간이에요!”

때마침 내 유모이자 하녀인 룰루와 랄라-엑스트라 가문의 하녀들이라 작가가 이름을 몹시 대충 지은 것 같다-가 달콤한 쿠키가 차곡차곡 쌓인 트레이를 들고 나타난다.

“꺄아!”

그들을 반기면서도 공책을 카펫 아래로 숙 집어넣어 숨기는 것을 잊지 않은 나는 아장아장 걸어가 룰루의 다리에 매달렸다.

“눈누 채고!”(룰루 최고!)

하녀의 치마폭에 휩싸여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안아 든 룰루가 내 보들보들한 뺨에 제 얼굴을 비비기 시작한다.

“흐잉, 아가씨, 오늘도 너무 귀여우세요.”

‘…침은 흘리지 말지.’

나는 룰루를 좋아했지만, 가끔은 그녀의 애정표현이 부담스러웠다.

“어머, 룰루가 공녀님 간식 시간을 까맣게 잊고 있길래 제가 챙겨 온 건데요?”

“웅?”

“저는 최고 아니에요, 공녀님?”

“난나도 채고야.”(랄라도 최고야.)

룰루의 품에서 나를 빼앗듯 꺼낸 랄라가 입을 삐죽 내밀길래 나는 서둘러 그녀의 앞에 주먹을 들이밀었다.

‘앗, 따봉 만들려고 했는데.’

비엔나 소시지처럼 오동통한 손가락은 가끔 내 뜻을 따라 주지 않는다.

‘서러워….’

나는 랄라가 입 안에 쏙 넣어 준 쿠키를 오물오물 씹으며 하찮은 몸뚱이에 대한 설움을 함께 삼켰다.

“쥬쭈.”(주스.)

“앗, 주방장이 공녀님 너무 단 것만 찾으신다고… 쿠키랑 주스랑 같이 주지 말라고 하던데요.”

그럼 오늘은 주스가 없다는 말인가!

하차니아 가문에서 유일하게 하찮지 않은 이름을 가진 롬베르디 주방장의 특제 딸기 주스가…!

“쥬쭈…? 업…쩌…?”(주스…? 없…어…?)

내가 엑스트라 악당의 딸-심지어 사생아라 사랑도 못 받는-인 것도 모자라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아이고, 제가 공녀님께 미리 말씀을 못 드렸네요. 어쩌죠?”

랄라는 쿠키를 먹다 말고 공황 상태에 빠진 나를 안아 든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히잉….”

“아가씨, 그러면 오늘은 공녀님이 간식으로 쿠키를 반만 드실 테니 주스를 달라고 해 볼까요?”

현명한 룰루가 벌꿀 무늬 양말을 신은 내 발을 만지작거리며 제안한다. 나는 그녀의 말에 허둥지둥 끄덕였다.

내가 사생아라는 소문이 퍼지면 고용인들이 날 외면하기 시작할 거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놔야만 했다.

“웅!”

“그럼 쿠키 두 개만 더 드셔야 해요. 더 드시면 안 돼요?”

“웅!”

나는 다짐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룰루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어멋. 쪽. 쪽쪽.”

“…….”

‘약속한다는 의미로 내민 건데.’

“눈누?”(룰루?)

“죄송해요. 너무 귀여워서 그만….”

내 작은 손가락에 새털 같은 입맞춤을 퍼붓던 룰루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침실 문을 연다.

“아가씨, 그럼 식당에 같이 가실까요?”

룰루와 랄라는 요즘 내게 저택의 구조를 가르치는 중이었다.

기회 삼아 저택을 한 번 더 돌아볼 생각인 건지 랄라가 내 등 뒤로 커다란 담요를 둘렀다.

“자, 아가씨 방은 저택의 3층 중앙에 위치한 방이에요. 기억하시나요?”

“웅. 아빠 방은 꼬때기쯩.”(응. 아빠 방은 꼭대기 층)

“하유, 우리 공녀님은 똑똑하기도 하셔라.”

내 야무진 대답에 랄라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각하의 침실은 공녀님의 침실 바로 위에 있어요. 혹시라도 공녀님이 위험에 처하시게 된다면 각하께서 바로 내려오실 수 있도록 장치가 설치되어 있거든요.”

나는 랄라의 설명에 아이답지 않은 씁쓸한 미소를 내걸었다.

그래, 가스파르 하차니아는 세 살 박이 막내딸의 침실을 저택 중앙에 배치할 정도로 레오노라를 아끼는 아버지였다.

‘어제까지만,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겠지만.’

노엘이 행방불명된 게 일주일 전 일이었으니 그녀가 사생아를 낳았다는 신탁이 가스파르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황실의 핏줄이 새어 나갔다는 소문이 퍼질까 두려워 이제 곧 황제가 나를 불러들일 테고.

‘실비와 에녹은 누가 봐도 아빠 아들들이니까…… 의심받는 건 당연히 나일 거야.’

서브남주의 가문인 하차니아에 속한 레오노라가 소설 속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 건 이유가 있었다.

신탁의 진위를 밝힌다는 핑계로 이제 나는 황실의 별궁으로 옮겨질 테니까.

‘말이 별궁이지, 감옥이나 마찬가지일 테지.’

“아효효.”

안락했던 하차니아 공작가를 벗어나 살벌한 황궁에 들어갈 생각에 벌써부터 한숨이 나왔다.

품에 안긴 채 등을 톡톡 두드리는 나를 내려다보던 룰루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아가씨, 웬 한숨이세요?”

“사눈 게 이런 곤가 시퍼서….”

비루먹은 인생, 겨우 빛 본다 싶더니만은.

내 한숨 섞인 말에 하녀들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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