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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1화 (234/486)

제2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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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이 떠졌다.

한낮의 햇볕처럼 강렬한 빛이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찌를 듯 쏟아진다.

“에티모스가 만든 건 완전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자애롭지만 어쩐지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이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여신 루엘라.

제국이 섬기는 주신이었지만 신관들에게 치유력을 부여하는 것 말고는 도통 간섭이 없는 무심한 신이었다.

“신도 아닌 인간이 세계 하나를 창조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까요.”

“역시 영특한 아이로구나.”

내가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내 행동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래. 에티모스가 아무리 신의 사랑을 받는 인간이라 한들, 인간이 세계를 창조하는 건 불가능하단다.”

그녀가 설명하지 않아도 <아.황.장>을 기반으로 만든 세계가 온전하지 않다는 건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멀쩡한 세계의 시간선이 그토록 반복될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에티모스는 새로운 세계를 만든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세계에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덮어씌웠을 거야.’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 새로운 영혼을 만들어 낼 수 없으니 아이네스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 속 캐릭터를 수행하기 위해서 삶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결국 에티모스의 ‘이야기’가 아이네스가 그토록 파괴하고 싶어했던 족쇄였다.

‘아이네스는 에티모스에게 속아 자신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면 이 굴레를 끊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지만…….’

나는 내가 안쓰럽다는 듯 물기 젖은 눈으로 내 얼굴을 살피는 여신의 옷소매를 조심스레 붙들었다.

“이제 제가 레오노라로 살았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원형으로 돌아갈 거란다. 에티모스의 간섭이 없었던 모습 그대로 말이야.”

아이네스가 더는 주인공이 아니게 되어 버린 세계.

나는 그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눈을 굴렸다.

“그곳은 네가 모르는 세계란다. 널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고.”

이야기에서 파생된 인연은 전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니?”

그녀가 자신의 물음에 입술만 달싹이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잇는다.

“이곳에서 넌 평온할 수 있단다.”

여신이 가리킨 곳은 빛무리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작은 정원이었다.

“어떤 고통도 슬픔도 느끼지 않을 수 있어.”

정원에서는 마음을 안온하게 하는 달큰한 향기가 풍겨오고 있었다.

“네가 외로운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늘 네가 바라 마지않던 소원이잖니.”

나는 정원 안에서 들려오는 맑은 웃음소리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녀는 지금 내게 ‘기회’를 주고 있었다.

본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내가 해방될 기회.

신이 직접 보살피는 영혼이라니, 나는 분명 평온을 손에 넣을 것이다.

“다시 돌아가면 넌 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잃는 경험을 할 수도 있어.”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호흡을 고르게 하려고 노력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리는 내 머리를 그녀가 느긋하게 쓰다듬었다.

“그건 널 아주 끔찍하게 외롭게 만들 거야.”

“……괜찮아요.”

나는 내 결정을 이해한다는 듯 웃는 그녀를 향해 입을 벌렸다.

“외로움을 알아야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요.”

“그래, 그게 네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원과 반대 방향에 문 하나가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내게 미소로 인사하는 그녀를 뒤로한 채 서둘러 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 * *

“레오노라!”

“리니!!”

“아가씨! 아, 아니, 공주님!!”

눈을 뜬 내 곁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린다.

번쩍 몸을 일으킨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웅성이는 사람들 속에서 가장 걱정되었던 인물을 찾아냈다.

“노엘! 어디 있어요?!”

다행히 노엘은 사라지지 않았다.

원작 속 가스파르의 불행을 위해서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레오노라.”

“노엘.”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에게 대답하며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내 손을 붙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지금의 나를 노엘이라고 부르는 건 조금 버릇없지 않겠니.”

노엘의 말마따나 그녀는 더는 어려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휘황한 미모를 잃지 않은 그녀가 조심스레 내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사히 깨어나서 다행이다.”

‘원작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이야기를 억지로 이어 가느라 발생한 모순이 사라진 거야.’

모두 원형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루카스는…….’

나는 노엘 다음으로 걱정되었던 인물을 찾아 몸을 돌렸다.

“이 모습으로 널 보는 건 오랜만이군.”

“루카스!”

내가 자신을 찾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온 루카스가 제 긴 은발을 만지작거리며 퉁명스레 입을 연다.

“결국 노엘 다음이었군, 나는.”

‘하지만 루카스는 원작에서 비중이 거의 없는 사람이니까, 사라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걸.’

나는 속으로만 변명하며 섭섭한 듯 입술을 삐죽이는 루카스를 끌어안았다.

“내 걱정 많이 했어?”

“아니.”

루카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면서도 제게 엉겨 붙은 나를 밀쳐 내진 않았다.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아빠가 기가 막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다.

“리니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엉엉 운 주제에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았던 척하는 건가.”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군. 조금 더 쉬는 게 좋겠어, 공작.”

“어머. 우는 모습이라면 저도 봤는 걸요, 루카스 님.”

나는 아빠의 말을 거들며 눈에 고인 눈물을 닦는 룰루를 돌아보았다.

“룰루, 히스는 어디 있어?”

내가 노엘과 루카스 다음으로 걱정한 인물이 히스였다.

그는 <아.황.장>의 주연은 아니었지만, <아.황.장>이 아니라면 기실 역사 속에서나 존재할 인물이니까.

‘문’을 여는 대가로 히스가 스스로를 희생했다지만, 여신의 말대로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놨다면 히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설마 그대로 사라진 거야?”

“아뇨, 그건 아닌데.”

나는 룰루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그녀를 뒤로한 채 방을 벗어났다.

“히스!”

다행히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이 눈에 익숙하다.

나는 무장한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구류된 히스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왜 히스를 붙잡고 있는 거지?”

“윌레닌은 적국이라며 마구잡이로 공격 마법을 시전했습니다. 공주님이 개발하신 제어구가 아니었다면 황성이 전부 무너졌을 겁니다.”

나는 기사단장의 설명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히스 앞에 몸을 수그렸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그가 무구한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본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를 포로로 잡을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아크레아는 나를 왕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내 이름은 레오노라야, 히스. 그리고 미안하지만, 아크레아는 더는 존재하지 않아.”

나는 품 안에서 딸칵이는 회중시계를 꺼내 들어 히스 앞에 흔들었다.

시계가 나타내는 날짜가 제 기억보다 한참 뒤라는 사실을 깨달은 히스가 잘생긴 미간을 찌푸린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제 이름은 히스가 아닙니다.”

“빌헬름 그라프 폰 슈페.”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그의 옛날 이름을 찾아냈다.

“네가 원한다면 빌헬름이라고 불러 줄 수도 있어. 썩 내 마음에 드는 이름은 아니지만.”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 입을 다문 그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하지만 히스라는 이름이 싫어?”

그러자 습관이라도 된 듯 내 손에 제 머리를 기댄 히스가 천천히 대답한다.

“……아뇨.”

그는 내 손길을 피하지 않으면서 의아한 시선을 숨기지 못했다.

“기이하군요. 싫지 않습니다.”

“다행이네. 나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닌 모양이야.”

“당신은 내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눈치챈 히스가 차분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그 질문에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이다 히스의 하얀 뺨에 손을 올렸다.

“널 사랑하는 사람.”

어떤 의미로 사랑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억을 잃은 히스가 여전히 내 곁에 머물고 싶어 한다면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떠난다고 하면 무척 서운할 거야.’

“앞으로도 계속, 널 사랑할 거라고 맹세한 사람.”

내 말에 얌전히 귀를 기울이던 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제가 상당 부분의 기억을 잃은 것까지는 인지한 상태입니다만, 결혼까지 했는지는 몰랐습니다.”

히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누군가가 우당탕탕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울려 퍼진다.

“겨, 겨, 결혼은 무슨!”

말도 안 된다는 듯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나를 번쩍 안아 든 루카스와 합을 이룬 아빠가 마찬가지로 소리를 지르며 히스를 가리킨다.

“당장 저 자식을 끌어내지 못할까!!”

나는 다시 아이라도 된 마냥 루카스의 목을 끌어안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가 억지로 떠안았던 ‘엑스트라’의 역할은 사라졌다.

하나 이야기가 사라진 세계는 망가지고 부서진 구석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에티모스의 소멸을 깨달은 아이네스가 자신을 방해했다며 내게 다시 칼날을 세울지도 몰랐다.

“걱정 마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아빠가 내 머리에 커다란 손을 올리며 북북 쓰다듬는다.

“넌 혼자가 아니니까.”

“응, 알아요.”

나는 아빠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화 속 주인공처럼 영원히 행복하진 못하더라도, 내 두 발로 걸어 나갈 수는 있을 테니까.

<조무래기 공작가의 깡패 아기님>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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